'59분 대통령'이 침묵할 때는 다 이유가 있었네
국힘 당내 경선 때 토론기피…거품 꺼질까 봐?
'글로벌 리더스 포럼' 2분 침묵은 프롬프터가 없어서
'김건희 7시간 녹취록' 질문에는 "아는 게 없어서"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때는 "당선인 신분이라"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침묵은 지난 10일 취임 1년을 맞아서도 마찬가지였다. 역대 대통령들이 으레 해오던 공식 기자회견 없이 슬그머니 지나갔다.
기자 회견 아닌 기자 방문은 있었다. 윤 대통령은 10일 기자실에 예고없이 들러 기자들과 돌아가며 악수를 나눴다. 기자들이 “만나는 기회를 자주 만드실 의향이 있냐” 물으니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대답했다. ‘싫다’는 의사를 돌려 말한 것으로 보인다.
하기사 신년 기자회견도 없었다. 대신 조선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하는 것으로 떼웠다. ‘불통의 화신’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조차 비록 질문지를 미리 받아 빈축을 사기는 했지만, 취임 1주년 기자회견을 했다.
대통령에게 침묵은 금(金)이 아닌 금(禁)이다. 끝없이 대화하고 소통해야 한다. 국민과 소통하지 않는 대통령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은 취임 1년이 넘었는데도 야당 대표를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있다. 대단한 기록이다.
윤 대통령 침묵의 역사를 몇몇 사례를 통해 살펴봤다. ‘대통령 꿈’을 꾸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검찰총장 때부터 들여다봤다. 호칭이 ‘검찰총장’ ‘당내 경선후보’ ‘대선후보’ ‘대통령’으로 계속 바뀌어서 어떤 경우에는 그냥 이름만 썼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편집자주]
검찰총장 윤석열, “장모 수사 해야”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묵묵부답
“3월 9일 MBC ‘스트레이트’에서 보도한 윤석열 총장과 그와 관련된 주변인들의 의혹이 매우 중대한 비위로 보도되었습니다. 공정하고 청렴해야 할 직위에 있는 자가 이런 비위 의혹이 있다는 건 검찰조직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들고 국민에게 정의 실현은 허울이라는 자괴감을 심어 줍니다. 따라서 보도된 모든 의혹이 해소될 수 있도록 법무부의 감찰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MBC 방송을 본 한 시민이 2020년 3월 10일 <윤석열 총장에 대한 법무부 감찰을 요청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와대 청원글을 올렸다. 하루 만에 청원자 수가 1만 명을 넘어섰다.
다시 다음날인 11일 <윤석열 장모 사기죄 의혹에 대한 수사촉구 및 윤석열 자진 사퇴 촉구합니다>란 청원이 또 올라왔다. “대한민국 국민 중 상식을 가진 국민이라면 윤석열 장모는 구속감이라고 말합니다. 조국 전 장관과 관련하여 사실이 아닐 수 있는 표창장 의혹 제기만으로도 약 70회 이상 압수수색을 했던 검찰이었습니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자주 말한 것처럼 법과 원칙대로 수사를 해야 합니다. 윤석열 장모의 건은 조국 장관의 표창장 의혹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반드시 윤석열 총장의 장모에 대한 수사를 해야 합니다.” 역시 하루 만에 청원자 수가 6000명을 넘어섰다.
윤 총장은 침묵했다. 대검찰청이 대신 MBC ‘스트레이트’에 보낸 서면 답변을 통해 “사건의 구체적 내용을 밝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밝혔을 뿐이다. 검찰도 이후 ‘무음(無音) 모드’로 전환했다.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들의 “토론하자” 요구에 묵묵부답이더니
2021년 8월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들은 TV공개토론 준비에 열심이었다. 특히 윤석열 후보와 함께 양강 후보였던 홍준표는 TV토론에 큰 기대를 걸었다. 홍준표는 달변이다. 토론 경험도 많다. 한데 윤석열은 TV토론에 대해 묵묵부답이었다. 다른 후보들이 “왜 토론을 피하느냐”며 압박에 나섰다.
특히 홍준표의 공격이 매서웠다. “그만 떼쓰라. 토론 회피하지 말고 꼭 나오라”라는 식의 메시지를 거듭 날렸다. SNS에 글을 올릴 때마다 끝에 “토론 때 봅시다”라는 말을 붙여 도발했다. 유승민도 “토론을 겁내고 어떻게 선거를 나오느냐”며 몰아세웠다. ‘토론회 두세 번이면 윤석열의 실체가 드러나 거품이 꺼질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윤석열은 묵언수행하는 승려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윤석열은 오늘날 ‘입벌구’(입만 열면 구라)라는 별칭을 갖고 있지만, 그때는 ‘입벌고’(입만 열면 사고)라 불릴 만했다. 언론과 인터뷰할 때마다 크고 작은 구설수가 따라붙었다. 정치적 신념이 무엇인지, 그런 게 있기는 한지, 알아채기 어려웠다. 우여곡절 끝에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들이 첫 TV토론에서 격돌한 것은 9월 16일이다.
윤석열이 전국민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은 10월 1일에 열린 5차 토론 때였다. 윤석열은 그때 손바닥에 왕(王)자를 쓰고 등장했다. 유승민은 10월 5일 6차 토론에서 윤석열의 무속 관련 의혹을 터뜨렸다. 이에 윤석열은 토론회가 끝난 뒤 유승민을 찾아가 손가락을 흔들며 항의했다고 한다. “(천공의) 정법 유튜브를 봐라.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정법(천공)에게 미신이라고 하면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유승민은 그때 “주(呪)술에 취한 건지 주(晝)술'에 취한 건지(주술에 취한 건지 낮술에 취한 건지) 무속에 의지하는 후보에 대한 국민적 불안을 거짓말과 말장난으로 대하는 윤석열 캠프는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논평을 내기도 했다.
‘수첩 공주’ 저리 가라…‘프롬프터 왕’의 탄생
2021년 11월 22일 대형 사고가 터졌다. 윤석열은 대선 후보로서 서울 광진구 그랜드워커힐서울에서 열린 TV조선 주최 <글로벌 리더스 포럼 2021>에 참석해 ‘국가 미래비전’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윤석열이 연단에 올랐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두 손을 모으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그렇게 침묵의 2분이 흘러갔다. 생방송 중이었다. 윤석열은 이날 마치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먼 사람 같았다. 사회자는 ‘프롬프터 준비’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수첩 공주’에 이어 ‘프롬프터 왕(王)’이 탄생하는 산고의 시간이었다. 산고의 고통은 관객과 시청자의 몫이었다.
반면 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명은 윤석열에 앞서 프롬프터 도움 없이 ‘무려’ 10분에 걸쳐 ‘국가 미래비전’을 발표했다. 이재명은 기초과학·첨단기술에 대한 국가의 투자와 지원, 이를 위한 기반시설 구축, 미래형 인재 양성 등 방안에 대해 연설했다. 막힘도 없었고 거침도 없었다.
여담이지만 TV조선은 4시간 넘는 관련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가 저녁 무렵 비공개로 전환했다. 윤석열 정부는 최근 ‘TV조선의 재승인 심사 과정에서 점수 조작에 관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 면직 절차에 착수했다.
‘김건희 7시간 녹취록’ 질문에 “언급 안하는 게 좋아”
지난해 초 MBC 시사 보도 프로그램 ‘스트레이트’는 이른바 ‘김건희의 7시간 통화 녹취록’ 일부 공개를 예고하고 있었다. 방영 예고 날짜는 1월 16일이었다. 이명수 당시 서울의소리 기자가 2021년 7월~12월 김건희와 나눈 50여 차례의 통화 녹취록이었다. 녹취에는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등 초대형 폭탄들이 들어 있었다.
후보 윤석열은 녹취록의 실체가 드러난 뒤로 침묵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윤석열은 방송 당일에도 서울시 선거대책위원회 필승결의대회를 마친 뒤 기자들의 관련 질문을 받고 “글쎄,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가지고…”라며 말끝을 흐릴 뿐이었다. 기자들이 “그래도 한말씀 해달라”고 거듭 요구해도 “여기에 대해서는 제가 언급 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하곤 입을 닫았다.
일본 역사왜곡 교과서에도 침묵…“당선인 신분으로 입장 표명 부적절”?
지난해 3월 29일, 일본 교과서 검정 결과가 공개됐다. 역사 교과서에서 ‘위안부’와 ‘강제동원(징용)’ 등의 내용이 사라졌다. 사회과목 12종에는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기술돼 있었다. 국민적 공분이 일었다. 윤석열은 대한민국의 대통령 당선자로서 이에 대한 입장을 내놔야 했다. 그러나 그는 직접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다음날 김은혜 인수위 대변인이 “(윤석열은) 아직 당선인의 입장이라 개별적 외교 사안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밝혔다. 원일희 인수위 수석부대변인도 “개별 외교사안이라 인수위 차원에서 입장을 낼 문제가 아니다”라고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윤석열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아이보시 고이치 주한 일본대사와 통화·면담하는 과정에서 했다는 발언을 상기시켰다. 윤석열의 대일 메시지는 “올바른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양국이 미래지향적 관계 발전을 위해 앞으로 본격적으로 논의를 진행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이때 이미 대일 굴욕외교는 예정돼 있었다고 봐야 한다.
‘체리 따봉’ 사태에 이준석 “입장 표명 없이 한 달? 비정상”
이준석은 잘 알려진 대로 윤석열의 대단한 ‘천적’이다. 국민의힘 중앙윤리위원회는 지난해 7월 8일 이준석 대표에 대해 당원권 정지 6개월의 징계 처분을 의결했다. 사유는 ‘품위유지 의무 위반’ 등이었다.
국회사진기자단은 얼마 뒤인 7월 26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대정부 질문 도중 권성동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누군가와 휴대전화로 문자를 주고받는 모습을 포착했다. 윤석열이 이준석 전 대표를 겨냥해 “내부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가 바뀌니 (당이) 달라졌다”는 메시지를 ‘체리 따봉’ 이모티콘과 함께 권성동에게 보낸 것이었다. 권성동도 이에 화답해 “대통령님의 뜻을 잘 받들어 당정이 하나 되는 모습을 보이겠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 한 장의 사진은 ‘대통령의 당무 불개입 원칙’과 ‘당정 분리’가 파괴돼 있음을 만천하에 알려주고 있었다. 사안이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윤석열은 이에 대해 일언반구 없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지역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체리는 7월이 수확철인데, 금방 8월이 됐다.
이준석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윤석열의 침묵이 한 달째 이어질 즈음 이준석은 SBS ‘주영진의 뉴스 브리핑’에 나와 맹공을 퍼부었다.
“자기들끼리 제 뒷담화하다가 언론 카메라에 노출돼 기사화 되고 그 때문에 국민들의 실망감이 커졌다는 어떤 상황이 있으면, 그 상황을 일으킨 사람들에 대해 지적하고 책임지는 모습이 필요한데, 아직까지 문자를 주고받던 분들이 내부 총질 문자라든지 체리 따봉에 대해 아무 입장 표명이 없는 상태로 벌써 한 달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비정상적인 상황이죠. 우리 국민들 중에 해명 들으신 게 있나요? 이런 중차대한 정치적 문제들을 그냥 뭉개면서 가고…”
윤석열의 ‘이런 침묵’엔 고개 끄덕끄덕
지난해 2월 중순 전후,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대선후보는 국민의힘 대선후보 윤석열에게 이런저런 ‘단일화 협상’ 촉구 메시지를 날렸다. 윤석열은 안철수의 애만 태웠다. 들으나마나한 원론적 입장만 되풀이했다.
윤석열은 13일부터 안철수의 단일화 제안에 대해 환영한다면서도 “단일화에 대해선 제가 언급하지 않겠다” “더는 말씀 드릴 게 없다”며 사실상 묵묵부답 제스처를 보였다. 윤석열의 침묵은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그때 안철수 지지율은 지지부진이었다. 당시 안철수의 지지율은 윤석열에 비해 3분의 1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윤석열 입장에서는 아쉬울 거 없으니 ‘싫으면 말고’였다.
그래도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단일화를 이뤄냈다. 이후 안철수의 ‘운명’이 어떻게 됐는지는 다 아는 얘기니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