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BM 발사는 북의 제2전선 만들기
[창간기획: 신냉전, 판을 바꾸자] ② 북의 미사일 도발, 우크라이나 제2전선?
“박정희에게 베트남이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는 제2전선이었다면, 김일성에겐 한반도가 베트남전의 제2전선이었다. 결국 (1968년) 1월 21일의 청와대 공격은 ‘남조선혁명’ 공세의 하나이고, 베트콩에 대한 측면지원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진 인민군 정예부대의 ‘베트남 참전’이었다.”
<베트남전쟁 1968년 2월 12일 - 베트남 퐁니·퐁녓 학살 그리고 세계>(한겨레출판. 2021)를 쓴 고경태가 2013년 10월 <한겨레21>에 연재한 글의 한 구절이다.
일본 역사가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도 2019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동북아 평화센터’(이사장 김영호) 주최 국제회의 제4차 회의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와다 교수가 그때 발표한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일본인의 관점’(How To Go Beyond the San Francisco System: A Viewpoint from Japanese)의 일부를 옮긴다.
“1960년에 미국진영과 공산진영 간의 군사적 적대의 무대는 한반도에서 인도차이나반도로 옮겨갔다. (…) 베트남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떤 의미에서 이 전쟁은 한국전쟁의 연장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이 새로운 전쟁을 위한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 19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은 한국에 경제협력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일본의 지원을 받은 한국은 베트남에 지상군을 파병했다. 베트남인들과의 전쟁에 한국인들이 매년 5만명씩 투입됐다. 북베트남은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지원을 받았다.
북조선(북한)도 한국과 제2전선을 조성함으로써 북베트남을 지원하고자 했다. 북조선은 1967년부터 ‘유격대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해 1968년 1월 21일 한국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한 무장 게릴라부대를 남파했다.”
최근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갈수록 대담해지고 회수도 크게 늘면서 한반도 및 주변정세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북은 이달 초 단 며칠 만에 30여발의 미사일을 연쇄적으로 발사했다. 북의 이런 ‘이상’ 동향은 올해 초부터 감지됐고 특히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뚜렷해졌다.
북한이 왜 이럴까?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국력이나 전력의 현격한 차이, 그리고 안팎의 여건 등을 감안할 때 북한이 직접적인 대남 무력공격을 감행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싸워서 이길 공산이 거의 없고, 대규모 반격의 빌미를 제공해 자칫하다가는 북한이 목표한 체제안보 자체를 오히려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과를 자초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북 최근 연쇄적인 미사일 다량 발사
되살아나는 1968년 1·21사태의 기억
신냉전의 진영 대결에 앞장서는 남북
그럼에도 최근 이처럼 도발을 강화하는 이유나 목적이 무엇일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미 군사연습 재개 등 윤석열 정부 들어서 강화되고 있는 군사대비태세와 대북 강경자세 등에 대한 반발, 또는 이를 체제안보 위협으로 보고 맞대응 하겠다는 경고의 표시로 본다. 미사일과 핵 무장 능력 과시를 통해 존재감을 높이면서 미국에 협상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는 풀이도 있다.
하지만 전혀 다른 관측도 있다.
최근 북의 도발 강화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한층 더 분명해지고 있는 신냉전의 기류 속에서 한반도에 일종의 ‘제2전선’을 조성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추측 내지 관측이 그것이다. 무엇의 제2전선이며, 무엇을 노린 제2전선인가? 그런 관측의 확정적 근거는 아직 없지만, 그런 관측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역사적 전례가 있다. 바로 1968년의 ‘1·21사태’다.
“청와대 까부수고 박정희 멱을 따러 왔다.”
1968년 1월 21일 새벽, 무장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6기지의 특수부대원 31명이 서부전선 미 2사단 철책을 뚫고 남하했다. 그 이틀 전 황해도 연산군 기지에서 출발했던 그들은 철책을 넘은 뒤 파주 법원리의 삼봉산과 앵무봉, 그리고 북한산 비봉과 세검정을 거쳐 청와대 500미터 앞까지 침투했다. 세검동 파출소 관할 자하문 초소에까지 이르러서야 경찰의 저지를 받자, 그들은 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지는 등의 교전 끝에 도주했으나 결국 소탕됐다. 앞의 얘기는 그 ‘1·21사태’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신조가 생포된 뒤에 했다는 말이다.
<베트남전쟁 1968년 2월 12일>은 그 1·21사태를 북한이 당시 최고조에 달했던 베트남전쟁 한쪽 당사자인 북베트남 및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FL, 베트콩)을 측면지원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저지른 베트남전쟁 제2전선 만들기 전략의 일환이었다며 여러 자료와 정황들을 제시한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고 있었고, 한국군도 미국의 요청으로 ‘맹호부대’ ‘청룡부대’ 등의 이름으로 매년 5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해 베트콩과 싸우며 미군을 지원했다.(그 파병 한국군 중 약 5천명이 전사했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을 두 축으로 한 동서 냉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그 냉전의 동아시아 최전선이었던 베트남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쟁, 말하자면 그 제1전선에 파병돼 북베트남에 맞서 싸우고 있던 한국군, 그리고 그 배후요 주력군이었던 미군의 전략을 교란하고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북한이, 역시 미군이 방어하던 한반도에서 제2전선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만일 최근 강도와 횟수를 더해가고 있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 무력시위(도발)가, 이른바 신냉전으로 치닫고 있는 국제정세 속에서 그 충돌의 제1전선인 우크라이나 전장에서의 미국의 힘과 영향력을 교란하고 분산하는 제2전선을 만들기 위해 의도된 공세라면? 냉전 시기의 제1전선 베트남전쟁, 그리고 지금의 신냉전 제1전선이라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전쟁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미국이 이들 전쟁의 실질적인 한쪽 당사자라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과 미군은 전면에 나섰지만, 우크라이나전쟁에선 배후에서 무기와 전비를 대고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지휘하고 있다. 지금 우크라이나전쟁의 한쪽 당사자인 러시아에겐 베트남전쟁 당시 북베트남을 지원했던 사회주의 진영과 같은 우군의 지원이 절실할 것이다. 이른바 신냉전의 북중러 ‘북방 삼각동맹’의 일원인 북한이 한미일 ‘남방 삼각동맹’의 일원인 한국을 겨냥해 제2전선을 만든다면? 북한이 러시아와 서로에게 득이 될 수 있는 거래를 통해 밀약을 맺고 미사일 도발을 강화하고 있다면? 이런 추측을 입증할 만한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북한이 러시아에 포탄 등 무기와 인력을 제공하고 있다는 언론들의 보도나, 푸틴 대통령이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고 있다며 공개적으로 경고를 날린 사실 등에서, 우리는 공표된 사실들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의심해 볼 수밖에 없다.
1968년 그해에 북한의 대남 공세는 1·21사태로 끝나지 않았다.
1·21사태 이틀 뒤인 1월 23일 미 해군 정찰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 동해에서 북한 해군에 나포돼 미 해군 승무원 83명이 함정과 함께 북에 억류당했다. 북은 그해 10월부터 11월에는 3차례에 걸쳐 무장병력 120명을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시켜 그해 말 소탕될 때까지 게릴라전을 벌였다.
한국군 전투부대는 1965년 10월부터 베트남에 파병됐고, 북의 대남 공세는 그 다음해부터 본격화해 1968년에 최고조에 달했다. 1968년 10월 3일 유엔군 사령관이 유엔에 낸 보고서에 따르면, 남북 간의 중요 사건 발생 수가 1965년에 69건, 1966년 50건에서 1967년에 566건으로 급증했고, 1968년에는 1-8월에만 661건이었다. 남북 간 교전 횟수도 같은 기간에 각각 29회, 30회, 218회, 356회로 비슷한 증가세를 보였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이 맹활약을 펼치던 1966년 10월, 평양에선 조선노동당 제2차 당대표자회의가 열렸고, 김일성은 ‘사회주의 진영의 통일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단결 회복’을 강조했다. 회의는 마지막 날 ‘월남(베트남) 문제에 관한 조선로동당 대표자회의 성명’을 채택했다. 북의 제2전선 전략의 논리를 엿볼 수 있는 성명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미 제국주의자들이 윁남(베트남)에 대한 침략전쟁을 확대하고 있는 형편에서 사회주의 진영, 국제공산주의 운동, 로동운동, 민족해방운동을 비롯한 전 세계 반제력량은 굳게 단결하여 미제를 단호히 반대하고 윁남 인민의 투쟁을 적극 도와야 한다.(중략) 미 제국주의자들이 이미 30만의 침략군대와 수만명의 추종 국가 및 괴뢰들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남부 윁남과 사회주의 나라인 윁남민주공화국을 침략하고 있는 조건에서 사회주의 나라들은 미제 침략자들에게 집단적 반격을 가하여 침략의 마수를 꺾어버려야 하며, 싸우는 윁남 인민을 지원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힘을 다하여야 한다. 사회주의 나라들이 윁남에 지원병을 보내는 것은 응당한 일이다.”(<로동신문> 1966년 10월 31일. <한겨레21> 게재 같은 글에서 재인용)
박정희 정권이 1968년 4월에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5월에 주민등록법 개정을 강행한 것, 그리고 그해 12월에 국민교육헌장을 공포하는 등 대북 대결자세를 강화하면서 전체주의적 체제 단속을 강화한 것도 북의 제2전선 전략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그 몇 년 뒤 유신헌법체제 곧 유신독재체제로 이어진다.
베트남전쟁 때 남북한이 벌인 제2전선 전쟁은 동서 냉전기간의 일종의 대리전쟁이었다. 신냉전 시기의 젤렌스키 정권이 한쪽 당사자인 우크라이나전쟁도 결국 미국(서방)과 러시아 충돌이 빚은 일종의 대리전쟁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만일 북한이 러시아와의 밀약 속에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한반도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려 한다면(물론 이것은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 역시 대리전쟁적 성격이 짙다. 대리전쟁의 최대 희생자는 언제나 그 전쟁이 실제로 벌어지는 나라의 일반주민들이다. 지금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그 최대 피해자이듯이.
근대 이래 한반도는 수많은 대리전쟁들이 치러졌고 수많은 한반도 주민들의 희생당했다. 불길하게도 윤석열 정권은 출범 이래 신냉전의 진영 대결에서 한쪽 당사자 쪽에 술을 서려는 자세를 적극적, 노골적으로 드러내 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지난 13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 협의 내용은 그것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주었다. 북의 최근 움직임도 이와 다르지 않다.
북의 제2전선 전략이 근거 박약한 추측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중요한 것은 냉전시대 상황이 반세기도 더 지난 21세기에 신냉전 형태로 되풀이될지도 모를 정세가 조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제2전선 전략의 끝은 1970년대의 남북간 적대적 공존체제 강화로 이어졌고, 대립하는 두 체제가 대외적으로 쌍방 공격과 비난의 수위를 높이면서 내부적으로는 각기 전체주의적 억압체제를 강화해 정권 안보를 확보하려 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런 점에서도 최근 북의 미사일 도발 강화는 불길하다. 이 추세를 멈추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