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빵~검정고무신…"저작권 보호" 흐지부지 10년
자작 캐릭터 썼다가 1억소송 당한 '검정고무신' 작가
15년 저작권료 1200만원…한 못풀고 한달전 타계
4천억 수입에 저작권료 1850만원 '구름빵 사태' 반복
정부나 국회나 여론 끓을 때만 '저작권 보호' 시늉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구름빵’은 내 자식이지만 내 자식이 아니다. 마음에서 지우려 한다. 다시는 나 같은 작가가 없기를 바란다.”
2013년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어린이책 ‘구름빵’의 저자 백희나 작가의 말이다. 당시 백 작가는 ‘구름빵’의 저작권도 없이 제작의 대가로 겨우 1850만 원을 받은 부당함을 호소하며 이같이 밝혔다.
하지만 백 작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난달 11일 인기 TV 애니메이션 ‘검정고무신’의 원작자인 이우영 작가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유족에 따르면 이 작가는 생전에 ‘검정고무신’의 저작권 관련 소송으로 심적 어려움을 호소했다. 이른바 ‘구름빵 사태’ 10년 뒤 유사한 사건이 또 벌어진 것이다.
‘구름빵 사태’와 ‘검정고무신 사태’는 판박이 같다. 콘텐츠 창작 당시 ‘을’의 입장이던 작가와 ‘갑’인 출판사 혹은 제작사 사이의 불공정 계약이 문제였다.
소 잃고도 10년간 외양간 안 고쳐
2013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구름빵’이 애니메이션, 뮤지컬 등 2차 콘텐츠로 만들어져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자 ‘창조경제의 모범’이라고 추켜세웠다. 속내를 알고 보니 원작자인 백 작가에게 돌아간 몫이 형편없이 적었다. 2003년 계약 당시 신인이던 백 작가는 이후 모든 저작권을 출판사인 한솔교육에 넘기는 조건으로 850만 원을 받았다.한꺼번에 일정 금액을 받은 뒤 이후 대가를 받지 않는 이른바 ‘매절(買切)’ 계약이었다. 신인이나 무명작가의 경우 매절 계약이 성행했다. 이후 출판사가 백 작가의 전시회 명목으로 1000만 원을 추가 지원했다. 40만권 이상 팔린 ‘구름빵’은 2차 콘텐츠 등으로 가공돼 4000억 원이 넘는 부가가치를 창출한 것으로 평가된다.
백 작가의 사연이 알려지자 문화체육관광부가 대책 마련에 나섰다. 문체부는 2014년 창작자 보호를 위해 ‘저작권 양도·이용허락 표준계약서’를 마련해 발표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집·단행본 분야 매출액 상위 20개 출판사에 대해 저작권 양도계약서 등 불공정 약관 조항을 시정하도록 했다.
하지만 표준계약서는 법적 강제력이 없는 권고안이었고, 신인 작가와 출판사가 이미 맺은 불공정 계약을 시정할 장치는 마련되지 않았다. 구름빵 사태와 관련한 저작권 보호법안이 국회에서 몇 차례 발의됐지만 관련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하는 등 흐지부지돼 버렸다.
백 작가는 저작권을 찾기 위한 소송에 나섰지만 2020년 끝내 패소했다. 대법원은 2심까지 패소한 백 작가의 상고를 기각했다.
소송이 진행되던 와중에 백 작가는 세계 최고 권위의 아동문학상 중 하나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문학상’을 수상했다. 동화 ‘말괄량이 삐삐’로 유명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을 추모하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을 받았지만 정작 자기 대표작을 자기 것이라고 부를 수 없는 백 작가의 처지에는 변화가 없었다.
구름빵 사태에 대해 한 만화가는 “한류로 세계를 휩쓰는 한국 문화산업의 민낯”이라며 “힘없는 신인 작가의 재능만 착취하고 버리는 천민자본주의의 전형이다”라고 비판했다.
작가들 “이번에는 불공정 시정해야”
이우영 작가의 검정고무신은 1992년~2007년 만화책 소년 챔프에 연재돼 인기를 끌었다. 2000년에는 TV애니메이션 시리즈로 만들어져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어린이들은 1960년대를 배경으로 기영이 가족의 유쾌한 소동극을 보며 부모 세대를 이해했다. 어른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이 작가가 2007년 애니메이션 제작업체 형설앤과 체결한 계약에서 ‘검정고무신’ 사업권 전체를 양도한 뒤 문제가 불거졌다. 업체는 지난 15년간 ‘검정고무신’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등 다양한 사업을 벌였지만, 그 기간에 이 작가에게 주어진 돈은 1200만 원이 전부다. 게다가 이 작가는 ‘검정고무신’ 캐릭터를 부모가 운영하는 농장에서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이유로 업체로부터 1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당했다. 자기 창작물을 맘대로 못 쓰는 데다가 법적 조치까지 당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문제는 10년 전 ‘구름빵 사태’를 겪고도 당국이 제대로 조치를 마련하지 못한 점이다. 당국은 ‘검정고무신’ 사태가 터지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체부는 이 작가와 업체 사이의 계약이 예술인권리보장법을 위반했는지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신인 작가를 위한 법과 제도를 보완하고 예술인을 상대로 저작권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도 지난달 ‘문화산업의 공정한 유통환경 조성에 관한 법률 제정안(문화산업 공정 유통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지식재산권 양도 강제 행위 등 문화산업 분야에서 빈번한 10가지 불공정행위를 금지한다. 위반하면 2년 이하 징역 또는 1억 5000만 원 이하 벌금을 받도록 했다.
하지만 이는 10년 전 구름빵 사태가 벌어졌을 당시에 나왔던 조치들에서 진전된 게 별로 없다. 그래서 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는 “이번에도 생색만 내고 실질적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냉소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로 방송통신위원회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문화산업 공정 유통법에 반대 의사를 내비쳤다. 방통위는 이 법의 금지행위가 자신들의 소관 기관에 적용돼 중복 규제 우려가 있고, 방송국 외주 제작사 등에 대해 많은 금지 유형이 새롭게 포함돼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과기부도 중복 규제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출판업체들과 콘텐츠 업계는 투자 위축을 내세워 반대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이 2020년 발의한 ‘매절계약 금지’ 법안은 올해 2월에야 공청회가 열렸다.
작가들 사이에서는 이번에는 창작자의 저작권을 보호하는 조치들이 나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 만화가는 “저작권을 통한 수익 분배는 창작의 고통에 대한 정당한 대가다”라며 “이런 보장이 없다면 재능있는 젊은 이 중 누가 문화산업에 뛰어들겠는가”라고 말했다.
‘검정고무신’ 사태에서 이 작가 쪽을 변호해 온 범유경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 변호사는 “작가가 협상력이 크지 않은 상태에서 계약을 마주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문제”라며 “저작자가 (불공정 계약 이후에도) 정당한 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법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