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정의를 실천하는 지식인

2023-03-24     김 영 인하대 명예교수
김 영 인하대 명예교수

4년 전인 2019년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 되는 해여서 파리의 한국문화원에서도 이를 기념하는 전시회가 열렸다. 1870~1950년의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간략한 해설, 3.1절 독립선언서, 한말 조선의 외교사절단, 당시 파리에서 활동한 한인 독립운동가와 유학생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되었다. 그해 여름 방학을 맞아 파리의 딸네집에 머물던 나는 주프랑스 한국대사와 한국문화원장과 인사를 나누고 파리의 동포 지인과 함께 이 전시회를 둘러보는데, 대학생 때 철학 강의를 들었던 정석해(1899~1996) 선생의 청년 시절 모습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정석해 선생은 1919년 연희전문 재학시 숭례문 앞에서 만세시위를 하다가 쫓겨 상해로 망명을 갔다. 상해임시정부 인사들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청년들은 공부를 하며 미래를 준비하라는 권유를 듣고 상해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 남부 항구 마르세이유에 도착해서 파리로 가서 유학생활을 했다. 100여년 전에 찍은 이 사진에는 당시 상해임시정부의 훈령에 따라 외교 활동과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과 유학생들이 정장을 하고 있었다. 아래 사진의 앞줄 맨 오른쪽이 정석해 선생이다. 

 

1945년 해방이 된 뒤 정석해 선생은 연희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철학과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그러다가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해산하고 야당과 민중의 민주독립국가의 열망을 배신하며 부정선거를 통해 장기독재를 꿈꾸자, 당시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대해 규탄을 하고 이승만의 독재체제에 저항한다. 1960년 2월 28일에는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였고, 4월 18일에는 ‘3·15부정선거’ 무효를 외치며 시위하던 고려대 학생들이 데모를 벌이고 돌아가다가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자 4월 19일 서울의 각 대학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더욱 분노해서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 검거된 학생을 석방하라. 악질 경관 처벌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도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용퇴를 밝히지 않고 미봉책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이때 각 대학의 양심적인 교수들이 학생들의 희생과 국민들의 고통과 좌절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4·25 교수단 데모를 하게 된다. 연희전문 시절 학생으로 3·1만세운동에 참여한 바 있는 정석해 선생은 이제 해방된 나라의 민주주의가 위협당하자 교수로서 또다시 역사의 현장으로 나오게 된다. 

정석해 선생은 독재자로부터 자유와 민권을 되찾기 위해 피를 흘리며 희생하는 학생들을 보고 선생 노릇을 하면서 가만히 있는 것이 부끄러워, 고려대 이상은 교수, 서울대 이희승 최재희 교수를 비롯한 뜻 있는 교수들과 함께 4월 25일 궐기 대회를 하기로 하였다. 정석해 선생은 서울대 교수회관인 함춘원에서 열린 교수궐기대회의 의장을 맡아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동국대 김영달 교수의 제의로 가두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때 교수단이 들고 있던 플래카드에는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글구가 쓰여져 있었는데, 이 글씨는 내가 지곡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임창순 선생이 쓴 것이었다. 

그런데 필자는 과분하게도 이 4·19 교수단 데모에 참가하신 두 분 선생으로부터 직접 배울 기회를 가졌다. 학부시절에는 정석해 선생께서 이미 정년을 하셨지만 여전히 철학과의 강사로 나오셔서 ‘인식론’을 강의하였는데 그 강의를 들었고, 임창순 선생으로부터는 대학원 시절에 태동고전연구소와 지곡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는 행운을 누렸다. 요즘 이 두 스승이 새삼스레 생각나는 것은 지금의 시국이 매우 엄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가 잘못 뽑은 대통령 때문에 위기에 처해 있다. 내정은 국민들의 경제적 안정과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검찰독재 시대로 퇴행하고 있고, 외교는 국익수호와 자주적인 주권 행사와는 거리가 먼 시대착오적인 친일 행각을 서슴지 않고 벌이면서도 후안무치한 변명만을 늘어놓고 있다. 미국의 패권전략을 일방적으로 추종하다 보니 그동안 흑자를 보던 중국 수출은 반토막이 나고 무역수지가 엄청난 적자를 기록하고 물가는 폭등하고 있다. 여기에다 일본 방문외교를 서두르다 보니 일제 강제징용자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배상하라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무시하고, 가해자 일본의 사과나 전범기업의 보상이 아니라 피해국인 국내 기업의 출연을 받아 보상을 하겠다는 반인륜적이고 굴욕적인 보상방안을 내놓고 이것을 해결책이라고 뻔뻔스럽게 주장하고 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민주시민들이 다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고, 현실에 대한 발언을 잘 하지 않던 교수와 종교인들이 성명서를 잇달아 내놓고 경종을 울리고 있다. 지난 14일에는 서울대 민주화교수협의회에서 윤 정권의 일제강제동원 판결관련자에 대한 국내 기업 기금 출연 해법에 대한 비판 성명이 나왔고, 어제는 고려대 교수 84명도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배상안에 대해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민주화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역할을 해왔던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도 지난 월요일 순교자들이 피를 흘린 전주의 풍남문 광장에서 매국매판 굴욕굴종 검찰독재를 일삼는 윤석열 정권의 퇴진을 선언하는 시국미사를 집전하고, 앞으로 윤석열이 퇴진할 때까지 계속 시국미사와 집회를 이어가기로 결의했다. 

전주 풍남문 광장에서 있었던 시국미사와 촛불집회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영식 대표 신부와 매주말 민주시민들의 촛불집회를 개최하고 있는 촛불행동의 김민웅 대표와의 포옹은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최근 연이어 발표된 서울대 교수와 고려대 교수를 비롯한 전국 교수 단체들의 성명서 발표는 윤석열 검찰독재 정권의 빈민주 반인권적 행태와 친일 매국적 외교행각에 대한 준엄한 심판으로, 윤 정권의 몰락을 재촉할 것이다. 나라가 국내외적으로 위기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올바른 지식인과  정의로운 종교인들이 침묵을 깨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인권, 자주독립과 평화유지를 위해서 역사적 결단을 한 것이다. 이제 우리 민주시민은 다함께 1960년에 이승만 독재정권을 몰아냈던 선배 지성인들의 행동을 본받고, 우리 시대의 양심적인 지식인 종교인들과 함께 윤석열 퇴진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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