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배타적 민족주의와 반일을 정치에 이용하나?
한일관계 수렁에 빠뜨린 건 일본
그런 일본정부 요구 수용한 정부
기괴한 오카쿠라 덴신 인용 옹호
한일관계는 여전히 제로섬 게임
다시 확인된 미국의 각본 연출
같은 말이라도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의미가 천차만별로 달라지고 심지어 정반대로 뒤집히기도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21일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국무회의 머리발언에서 “전임(문재인) 정부는 수렁에 빠진 한일관계를 그대로 방치했다”며 “작금의 엄중한 국제정세를 뒤로하고, 저마저 적대적 민족주의와 반일감정을 자극해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 한다면, 대통령으로서 책무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 “우리 사회에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반일을 외치면서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한다”며 회담 결과를 비판하는 이들을 겨냥해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일관계 누가 수렁에 빠뜨렸나
악화된 관계를 누가 ‘방치’했는지 얘기하기 전에 먼저 한일관계를 수렁에 빠지게 만든 게 누구냐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전후 사상최악’이라고 했던 아베 신조 정부, 문재인 정부 시절의 한일관계 악화의 핵심적 요인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12월에 맺은 한일간 ‘위안부 합의’(12·28 합의)의 사실상 파기. 또 하나는 2012년에 이어 2018년 10월에 최종 확정판결이 나온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청구소송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 그리고 이에 대한 일본정부의 외교관계 단절에 가까운 강력한 반발조치와 철회요구다.
12·28합의는 합의 당시 피해 당사자들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양국 정부간 절충으로 10억 엔(약 100억 원)을 일본 쪽에서 출연해 만든 재단으로 위로금을 지불하게 함으로써 그 문제를 ‘불가역적,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일본의 과거 침략·식민지배와 전쟁범죄가 당시 국제법적으로 합법이라는 전제 위에, ‘반성과 사죄’를 표명하면서 배상금이 아닌 위로금을 지불하기로 한 그 합의는 거센 반발을 샀다. 박 대통령이 시민 촛불시위로 탄핵당한 뒤 무효화 여론이 거세지자 문재인 정부가 재단 해체 등으로 사실상 파기했다.
아베 정권이 이를 국제법 위반이라며 문제삼는 것은 형식논리상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파기에 대다수가 동의한 한국민의 의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피해 당사자나 국민여론의 동의 없이 정권간 절충이나 강압, 또는 담합, 합의에 의해 체결된 전쟁범죄 배상 관련 협정이나 조약을 일단 체결된 이상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득을 보는 자는 누구이고 피해자는 누구일까? 한일협정이 근거로 삼았다고 밝힌 1951년 9월 체결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한국은 참가조차 거부당했다. 한국이 참가도 서명도 하지 못한 국제법을 한국이 무조건 받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문재인 정부는 방치한 게 아니라 법대로 했다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강제노역을 시키고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은 가해기업들에 대해 제기한 민사소송에 일본정부가 끼어들어 배상 절대불가 방침을 강제하는 바람에 생겨난 문제다. 2012년 대법원 배상판결 뒤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 등 가해기업들은 판결대로 배상하기로 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일본정부가 이를 막았다.
일본정부의 배상반대 논리는 1965년 청구권협정 제2조의 규정대로 청구권문제는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기 때문에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청구권협정을 포함한 한일협정의 기본조약 제2조에 명기된 과거 체결된 모든 조약이나 협정이 ‘이미’ 무효라는 구절의 일본쪽 해석에 따라, 일본은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는 당시의 국제법상으로는 합법이었으므로 배상할 이유가 없다는 자세를 고수한다. 그러면서 한국정부 쪽에 대법원 판결을 사실상 번복하거나 무효화할 것을 요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국에 수출규제라는 보복조치까지 감행했다.
이것이 윤석열 대통령이 지적한 “수렁에 빠진 한일관계”의 원인이요 시작점이다. 윤 대통령은 전임정부가 이를 “방치”했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지적이다. 문재인 정부는 ‘방치’한 것이 아니라 일본정부의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국민여론의 압박 속에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파기했고, 대법원 판결에 따라 가해기업들의 국내자산 압류·처분을 통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절차를 법 절차대로 진행하고 있었다. 일본정부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 주지 않은 것을 ‘방치’라고 주장한다면, 방치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일본정부의 요구대로 해줬어야 한다는 얘긴가.
누가 민족주의와 반일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나
이에 대해 아베 정권 등 일본 자민당 역대정권은 이른바 한국의 ‘좌파’ 정권과의 외교관계를 사실상 단절하다시피 하고 수출규제와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제외, 조난당한 북한어선 구조작업을 하던 한국 해군함정에 대한 해상자위대의 대잠 초계기 근접 위협비행, 독도 영유권 주장 강화 등으로 한일관계를 악화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 자민당 정부가 주장한 전후 사상최악의 한일관계 악화의 원인을 제공하고 심화시킨 주역은 일본정부였다.
이런 상태가 “수렁에 빠진 한일관계”라면, 그렇게 만든 원인을 아베 정권이 아니라 문재인 정권 탓으로 돌리는 것이야말로 이를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 한다는 의심을 살 만하지 않은가. 이를 문재인 정권이 ‘방치’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해결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 더 악화시켰다는 의미로 한 말일 텐데, 그런 맥락에서 방치하지 않으려면 일본정부의 부당한 요구를 철회시키거나 일본정부 요구대로 들어주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윤석열 정부는 후자 쪽을 택해 ‘방치’ 문제를 해결한 셈이 된다.
그리고 대통령이 말한 “적대적 민족주의와 반일감정”, “배타적 민족주의와 반일”을 국내 정치에 활용해 온 쪽은 아베 정권 등 일본 자민당 정권이다. 위안부 문제나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배상 요구는 민족주의나 반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보편적 인권 문제이고 전쟁범죄 처벌 및 배상문제다. 법률적 절차에 따라 인권유린과 재산강탈 등 불법적인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과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이다. 판결대로 처리하면 되는 일이다.
이를 범죄행위에 대한 사실 규명과 행위자에 대한 처벌과 배상을 요구하는 합법적이고도 정당한 행위가 아니라 일본 전체에 대한 반감과 보복을 추구하는 맹목적이고 적대적이며 배타적인 민족주의 감정의 발로로 몰아붙이면서, 자국내의 반한·혐한 감정을 부추김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이를 민족주의 문제, 반일 문제로 뒤틀어 국내정치에 활용해 온 쪽이 바로 일본 역대 자민당 정권들이다.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를 북한과 내통하는 ‘좌파’ 정권으로 몰아붙이면서 위안부 문제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를 부추겨 국내정치에 활용해 온 아베 정권 등 일본 자민당 정권들과 보수우익 주류세력의 한국정부에 대한 부당한 비판논리, 국내정치용 반한 캠페인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자국내 정치적 반대세력 공격에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전임정부 등 정치적 반대세력을 비판하며 몰아붙이는 윤석열 정부의 논리는 일본 자민당이 이른바 ‘좌파’ ‘종북’ 따위의 딱지를 붙여 문재인 정권을 몰아붙일 때 동원한 논리와 실제로 별로 다를 게 없다.
오카쿠라 덴신은 안중근같은 아시아주의자?
정치적으로 오용되는 이런 말 비틀기는 대통령이 게이오대학 강연에서 인용한 오카쿠라 덴신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그 선명한 예를 볼 수 있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 ‘선각자’로 지금도 일본인들의 숭모대상인 미학자 오카쿠라 덴신은 조선사람들을 미개인으로 깎아 내려 일본의 조선지배를 정당화한 대표적인 국수주의 사상가의 한 사람이다. <무사도>를 써서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정부 관리들을 ‘감동’시키고, 결국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지배를 상호보장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 니토베 이나조(5000엔권 지폐에 새겨졌던 인물)와 함께 조선과 조선인을 극도로 비하하면서 일본과 일본인을 추켜세운, 근대일본의 제국주의 침략과 팽창주의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한 인물들이다. 지금 1만 엔권 지폐에 들어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도 그런 점에선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모두 일본인들에겐 지금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위인’들이지만 조선사람들에겐 한민족을 멸망으로 이끌어간 ‘악인’들이다.
일본을 찾아간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7일 게이오대학 강연에서 하필 그 오카쿠라 덴신의 “용기는 생명의 열쇠”라는, 별 신통할 것도 없는 말을 인용했다가 구설수에 올랐다. 각료나 측근들 중에 오카쿠라 덴신을 흠모한 누군가가 추천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인용은 당연히 많은 반감을 샀다. 그래선지 사흘 뒤인 20일 <조선일보>가 ‘尹이 인용 오카쿠라… 학계 “침략론자 아닌 아시아론자가 맞아”’라는 제목으로 오카쿠라와 인용자를 옹호하는 듯한 기사를 내보냈다.
그 기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러나 학계에선 ‘오카쿠라는 침략론자였다고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는 인물’이라고 말한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오카쿠라는 ‘아시아는 하나’라고 말했던 아시아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서양 제국주의의 압박에 맞서서 아시아의 미학을 재발견하는 역할을 했다”며 “따지고 보면 안중근도 아시아주의자였듯,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가 얘기하는 ‘학계’가 어디의 누구를 대표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컨대 한국 역사학계나 정치학계의 구성원 다수가 정말 그렇게 생각할지 지극히 회의적이다. 근대 일본의 아시아주의, 범아시아주의, 대아시아주의라는 말은 서양 열강의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경계나 거부, 저항의식을 담고 있는 대응논리의 일종이다. 하지만, 일본 우익이나 국수주의자들 또는 민족주의자들이 입에 올린 아시아주의, 대아시아주의, 범아시아주의가 결국 군국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옹호하고 정당화한 ‘대동아공영’ 구상으로 귀결된 것만 보더라도, 그들의 아시아주의를 침략론과 분리시켜 아시아주의 내지 ‘아시아는 하나’라는 구호를 일종의 무죄입증 증거자료처럼 제시하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비유럽 세계를 처참하게 유린한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 침탈도 ‘침략’을 구호처럼 내세우진 않았다. 그들은 기독교적 보편주의나 ‘문명’, 우월한 유럽이 미개와 야만을 깨우치고 구제한다는 이른바 계몽적 ‘문명사관’을 앞세웠다. 오카쿠라 덴신은 아시아주의자지 침략론자는 아니었다는 얘기는, 제국주의 서구 열강은 기독교적 보편주의나 문명사관을 설파한 것이지 침략자는 아니었다는, 말이 안 되는 얘기와 꼭같다고 할 순 없지만 무척 닮았다.
우익 단체 겐요샤(현양사)를 만든 도야마 미쓰루나 고다마 요시오, 사사카와 료이치 등 일본 우익 내지 극우들도 아시아주의, 대아시아주의, 범아시아주의를 내걸었고 쑨원 등 중국 혁명가나 조선의 개혁가 김옥균 등과 손을 잡거나 그들을 지원했다. 쑨원이 얘기한 아시아주의에도 장차 중국의 아시아 지배를 염두에 둔 자민족 우선주의가 들어 있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당시의 아시아주의나 대아시아주의, 범아시아주의는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운, 서세동점에 대한 대항의식의 혼합이었다.
일본의 아시아주의는 반동적 침략논리
일본의 아시아주의는 일본이 서구 침략자들과 같은 열강의 일원이 되고 이웃 아시아민족과 국가들 침략에 나선 순간 대동아공영권에서 보듯 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해방의 논리가 아니라 억압과 반동의 침략논리로 전락했다.
기사에서 ‘학계’의 대표자처럼 인용된 교수는 “서양 제국주의의 압박에 맞서서…따지고 보면 안중근도 아시아주의자였듯,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안중근을 불러낸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안중근은 일본의 아시아주의가 서양 제국주의의 압박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서양 제국의 침략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걸 파악하자 그 침략의 수괴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 응징하기로 결단했다. 그 시절의 시대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던 안중근의 사상적 한계가 없을 수 없지만, 그의 숭고하기까지 했던 아시아주의적 동양평화론의 대의를 침략주의 메이지 체제를 옹호했던 오카쿠라의 아시아주의와 등치시키는 건 안중근에 대한 지독한 모욕에 가깝다.
오카쿠라 덴신이 제국 일본의 침략주의에 반대하거나 반성적 고찰을 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일본의 조선침략은 고토 회복
<한겨레>의 회고록 연재물 ‘길을 찾아서’에서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재일동포 작가 정경모는 2009년 8월 24일에 게재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 일본 사람들이 메이지시대의 선각자로 숭배하는 인물인 오카쿠라 덴신과 옛 5000엔짜리 지폐에 들어 있던 니토베 이나조의 초상. 두 사람의 영문 책은 서양인들에게 일본 민족의 우수성과 한국인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일본 사람들이 숭앙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메이지(명치)시대의 ‘선각자’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오카쿠라 덴신(1862~1913)인데, 이 사람은 일본의 전통적 미술뿐 아니라 서양과는 다른 일본적인 동양사상을 유려한 영문으로 널리 외국인들에게 소개했다는 점에서 특히 존경과 숭모를 받고 있소이다. 오카쿠라가 남긴 영문으로 된 저서 중에서도 <차(茶)에 대한 책>, <동양의 이상>, <일본의 각성>은 말하자면 고전으로서 고교생들에게까지 거의 필독서로 추천되고 있는 책들인데, 이 중에서 내가 문제로 삼고자 하는 것은 1904년 러일전쟁 전야에 미국에서 출판된 <일본의 각성>이외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외다.
“조선의 시조 단군은 일본의 시조 아마테라스의 아우 스사노오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조선은 일본의 제14대 천황 주아이의 황후, 신공이 정벌군을 파견하여 삼한 땅을 정복했던 3세기 이후 8세기에 이르는 500년 동안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고유의 속주(original province)였다. 따라서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조선을 식민지로 재지배한다 하여도 그것은 침략이 아니라 역사적 원상복귀일 뿐이다.”
역사에 대한 이런 ‘해박한’ 지식에 덧붙여 미술의 대가인 오카쿠라는 다음과 같은 말도 하고 있소이다.
“조선의 고분에서 나오는 출토품들이 일본 고분의 출토품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는 것만 보아도, 일본이 태곳적부터 이미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 아닌가.”
이건 위사(僞史)조차도 아닌 터무니없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었으나,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역사의 필연이라는 사고를 대통령 이하 미국 정부의 수뇌부 머릿속에 심어주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논리였던 것이외다.(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81)
고작 ‘용기는 생명의 열쇠’라는 한마디를 인용하기 위해, 한국 대통령이 하필 이런 사람을 찾아 강연에 불러낼 필요가 있었나. 굳이 그를 불러내고 싶었다면, 침략주의로 귀결됐던 메이지 시대 일본 선각자들의 세계관이 지닌 시대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21세기에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서 진정한 한일 상생의 시대를 열 것인가를 주제로 학생들을 설복시켰어야 하지 않을까.
조선의 고분에서 나오는 출토품들이 일본 고분의 출토품들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는 것은, 오카쿠라가 주장한 것과는 정반대로 조선이 태곳적부터 일본에 문물을 전해주고 지배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들이다. 이 역사적 상식을 뒤집어 한일 역사를 거꾸로 해석하는 것이 식민사관이다. 일본 보수우익 주류세력은 여전히 <일본서기> 등에 담긴 가공의 설화들을 역사적 진실이라며 식민사관의 근거로 삼아 조선 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오카쿠라가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는 정경모의 지적은 일본의 선각자라는 자의 근거 없는 엉터리 주장을 조롱하는 반어적 표현이다. 하필 그런 자를 '용기' '생명' 얘기에 불러내다니.
한일관계는 제로섬 게임
오카쿠라 덴신을 일본 역사상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위인으로 여기는 일본 보수우익 주류세력을 대표하는 자민당 정권은, 2014년에 하얼빈에서 안중근 기념관이 문을 열었을 때 스가 요시히데 당시 아베 정권 관방장관이 공개 기자회견에서 말했듯이,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라는 공식입장을 지금도 견지하고 있다. 일본 자민당 정권의 이런 입장은 항일독립운동을 국가 정통성의 근간으로 여기는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자민당이 ‘안중근=테러리스트’ 입장을 고수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래야 일제의 조선 강점이 불법적인 침략·식민지배가 하니라 합법적 통치가 되기 때문이다. 안중근이 정규군 장교가 되면 이토 히로부미가 침략자요 테러리스트가 된다.
도쿄 정상회담 기자회견 때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구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라 지칭한 것도 식민지배가 합법이며, 그 합법체제에서 발동한 동원령, 징병령으로 조선사람들을 강제동원한 것은 불법이 아니다, 따라서 배상할 의무도 없다는 논리를 관철하기 위해서다. 과거사를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과거사에 속박돼 있는 일본 보수우익의 이런 편협하고 천박한 사유와 세계인식이 일본이 진짜 선진국이 되지 못하고 조락해 가는 근본원인이라는 지적들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21일 국무회의 머리발언에서 “한일관계는 한쪽이 더 얻으면 다른 쪽이 그만큼 더 잃는 제로섬 관계가 아니다. 함께 노력해 함께 더 많이 얻는 윈윈 관계가 될 수 있으며,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한다”고 말했지만, 불행하게도 현실은 그 반대다. 일본이 근대의 침략과 식민지배가 불법이었음을 공식 인정하고 배상, 사죄한 뒤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진정한 강화(평화)조약을 체결하지 않는 한, 한일관계는 한쪽이 더 얻으면 다른 쪽이 그만큼 더 잃는 불평등한 제로섬 관계에 더 가깝다. 이것을 이번 한일 정상회담이 그대로 보여 주었다. 불평등한 제로섬이 아닌 대등한 윈윈 관계가 되려면 일본도 독일처럼 과거 침략과 점령통치가 불법이었음을 인정하고 배상, 사죄함으로써 지배-피지배의 과거역사를 청산해야 한다. 일본은 아직도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번 도쿄 정상회담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그런 일본정부의 주장을 사실상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제로섬 관계를 윈윈 관계로 바꿀 수 있는 계기를 오히려 스스로 걷어차 버린 셈이 됐다.
윤 대통령은 일본이 이미 “수십 차례 반성과 사과를 표했다”고도 했는데, 그것은 침략과 식민지배가 합법임을 전제로 한 통치상의 일부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 사과했다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 그의 말대로 일본은 그런 반성과 사과는 수십 번이나 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일본은 돌아서면 부정했다. 그런 식의 지겹고도 뻔한 사죄와 반성을 한국인들이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한일 정상회담 때 45분간 일 외무차관과 통화한 셔먼
도쿄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열린 16일 오전 9시부터 약 45분간 일본 외무성 모리 다케오 사무차관과 미국 국무부 웬디 셔먼 부장관이 전화로 45분간 회담을 했다. 북의 미사일 발사 문제를 다룬 외에, 셔먼 부장관은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에 관한 한국정부의 발표와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을 환영한다는 생각을 밝혔고, “한일, 한미일 제휴를 강화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한번 의견이 일치했다”고 <아사히신문>은 전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때 바로 전까지 한일 간 합의를 강력하게 압박했던 미국의 실무 대표격인 국무부 정무차관이었던 셔먼이 그해 2월에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에서 과거사와 영토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던 한중일 3국을 두고 한 얘기를 다시 한번 인용하겠다.
“한국과 중국인들이 2차 대전 이후 도쿄(일본)와 이른바 ‘위안부’ 문제로 다퉈 왔다. 역사교과서 내용이나 여러 바다(해역) 이름을 놓고 싸우고 있다. (중략) 물론 민족주의 감정은 여전히 이용될 수 있으며, 어느 나라든 정치 리더가 예전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싸구려’ 박수갈채를 받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도발은 진보가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
셔먼이 말하는 진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일본이 야기한 과거사 문제와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 문제를 둘러싼 3국 간 다툼에서 한국 중국을 나무라며 일본 편을 들고 있다. 그러면서 한중의 대응을 민족주의 감정을 이용해 정치 리더들이 싸구려 박수갈채를 받으려는 의도적인 정치 도발로 깎아 내렸다. 윤석열 정부가 정치적 반대세력이나 비판자들을 겨냥해서 적대적 민족주의나 반일감정을 부추겨 정치적으로 활용한다고 비난할 때 동원하는 표현방식이 이와 다르지 않다.
그때도 도발자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고, 댜오위다오 분쟁도 당시 극우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가 그 무인도들을 일본영토로 매입하자며 민족주의 감정을 이용한 정치캠페인을 벌이면서 시작됐다.
그때 조속히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체결 등 한미일 삼각 군사안보동맹체제로 가는 데 필수적인 장치들의 도입을 가로막는 한일관계 악화라는 장애물을 제거하라고 압박해 한일 갈등 봉합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가 셔먼이다. 그가 8년 뒤인 지금 국무부 부장관으로 다시 사상최악이라는 한일관계의 봉합을 진두지휘해 만족스런 결과를 얻어낸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이런 식의 한일갈등들이 결국 미국의 의도대로 봉합돼 온 것은 한일간의 힘의 격차 때문이었다. 미국에겐 상대적으로 강한 일본을 중심으로 한일을 엮어야 전략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에 압박은 늘 약자에게 집중됐고 한국은 약간의 보상에 만족하며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냉전과 미국의 방패,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특수를 발판으로 경제대국이 된 일본의 시대가 냉전 붕괴와 함께 기울어 가면서 상대적으로 한국과 중국이 부상했다. 이제 지난 샌프란시스코조약체제 70년 세월의 한일간 역학관계도 바뀌어 가고 있지만 미국은 여전히 한국에게 일본을 지키는 전방요새라는 과거의 역할을 강요하면서 한민족 분단선을 중국을 주적으로 한 신냉전의 진영간 대치선으로 재설정하고 있다.
셔먼이 말한 ‘진보’는 아마도 이를 토대로 한 한미일 삼각동맹, 한미일 군사안보통합체제의 완성이 아닐까. 미국의 그런 극본과 연출에 한국이 따라갈지 말지는 한국의 선택에 달렸지만, 윤석열 정부는 이미 진로를 확정해버린 듯하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와 관련해 보여준 최근의 과감한 '결단'으로 일본에게조차 놀라움과 기쁨을 안겨준 윤석열 정부의 행보는 더욱 거침없어지지 않을까. 4월의 미국방문 때 그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