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총리 독도 언급에 윤 대통령 대꾸없이 넘어간듯
일본 정부 대변인 일방적 발표, 쟁점화 시도
박진 외교·대통령실 "논의되지 않았다" 에둘러
야당 "입도 뻥긋 못한 상황…굴욕적" 질타
지난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독도 영유권과 일본군 위안부 합의 이행 문제를 언급한 것은 이 문제를 궤도에 올려 쟁점화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일본에 빌미만 제공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독도 문제를 국제 분쟁으로 끌고가고 싶어하는 일본의 입장에서 윤 대통령의 무대응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될 수 있다.
대통령실이 독도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 "논의되지 않았다" "두 정상이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를 했는지는 공개할 수 없다"고 부인하면서 국내 언론들은 한일 간 '진실공방' 문제로 끌고가고 있지만, 사태의 본질은 대통령과 대통령실, 외교부의 저자세 외교, 무기력한 대응이다.
아무 말 하지 않은 대통령, 반박 못 하는 대통령실
독도와 위안부 언급 문제는 일본의 일방적인 발표에서 비롯됐다.
앞서 기하라 세이지 일본 관방 부장관은 지난 16일 정상회담 직후 자국 기자들을 만나 독도, 위안부 등과 관련해 의견 교환이 있었냐는 질문에 "다케시마(독도를 일컫는 일본식 표현) 문제가 포함됐고, 위안부 합의에 대해 착실한 이행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관방 부장관은 일본 정부 대변인 격으로, 일본 정부가 회담에서 독도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고 공식 발표한 셈이다. 일본 공영방송 <NHK> 등이 이를 인용해 앞다퉈 보도하면서 관련 내용이 국내에도 전해졌다.
정상 간의 대화를 회담 직후 공식발표하는 것은 외교적 갈등으로 비화될 수 있는 사안인 만큼 상대국 동의 없이 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가 이를 일방적으로 공개한 것은 독도와 위안부 문제를 분쟁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언론 플레이'로 해석된다.
특히 이 같은 언론 플레이가 가능한 것은 윤석열 대통령과 대통령실이 빌미를 제공한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윤 대통령이 무조건적인 '저자세'로 일본에 굴종 외교를 펴고 있는 상황에서 기시다 총리의 발언을 적극적으로 반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이 막무가내로 나온다는 분석이다.
만약 윤 대통령이 독도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논쟁이 됐다면 일본 정부가 일방적으로 발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대통령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면, 일본 총리의 주장만 공표하는 자체가 부담될 것은 없다. 향후 국제 분쟁을 염두에 두는 일본 입장에서 이를 부각할 필요도 있다.
윤 대통령이 빌미를 내준 정황은 대통령실의 대응에서도 엿볼 수 있다. 대통령실은 일본의 언론 플레이에 "논의되지 않았다" "두 정상이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를 했는지는 공개할 수 없다" 등의 입장을 내고 있지만, 대통령이 회담에서 반박했다거나, 사실이 아니라고 일본 정부에 적극 항의하지 않고 있다.
통상적인 외교라면 일본이 독도 문제와 같이 영토와 관련한 민감한 문제를 가지고 나올 경우 회담장에서 거세게 발언을 제지하고 반박 의견을 내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라도 이번처럼 발언이 공개되면 사실 여부를 떠나 외교채널은 물론이고 공개적인 성명 발표나 대사 초치 등으로 항의를 해야 하지만 전혀 이뤄지는 것은 없다.
대통령실은 여전히 국내 언론 브리핑을 통해 "전혀 근거가 없거나 왜곡된 보도"라면서도 "우리 외교 당국이 (일본 측에) 유감을 표시하고 재발 방지를 당부한 것으로 안다"고 자신의 소관이 아닌듯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이 적극 반박하지 않아 일본 정부에 제대로 항의도 못한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논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응하지 않았다는 것"
기시다 총리의 언급에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않은 정황은 전날(21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도 확인됐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기시다 총리의 독도와 위안부 문제 언급과 관련해 야당 의원들이 묻자 시종일관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바 없다" "정상회담 의제로 다뤄진 적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다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의원의 질문에 미묘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의원은 "(장관이) 독도, 위안부 문제가 '논의된 적 없다'라고 이야기했는데, '논의'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문제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말하며 토의한다는 것"이라며 "윤 대통령은 아무 말도 안 했지만, 기시다 총리는 관련된 이야기를 꺼낸 적 있는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이어 "해서는 안 될 말을 기시다 총리가 언급을 했는데 '윤석열 대통령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고 물었고, 박 장관은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바 없다"고 답했다. 이 의원이 재차 "아까 논의라는 사전적 의미 말씀드렸죠. 서로 토의한 바 없다, 거기까지는 맞죠?"라고 추궁하자, 박 장관은 "저도 '사전적 의미'로 말씀드린 것"이라고 답했다.
'사전적 의미'로 정상회담에서 논의하지 않았지만, 정상회담 테이블이 아닌 곳에서 독도 영유권이나 위안부 합의 이행 문제를 기시다 총리가 일방적으로 '언급'했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이에 이 의원은 "얼마나 오만한 일본이냐"며 "(일본은) 강제동원 해법을 발표하자마자 강제동원이 없었다 이야기하고,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내용(독도, 위안부)을 불쑥 꺼내서 대통령은 거기에 대해 입도 뻥끗 못한 상황이다. 이게 어떻게 굴욕적이지 않냐"고 질타했다.
기시다 총리가 독도 문제를 언급하고 윤 대통령이 이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은 정황은 민주당 우상호 의원과의 질의 응답에서도 드러났다.
우 의원은 "기시다 총리가 독도 문제를 언급했냐"고 물었고, 박 장관은 "기시다 총리가 언급한 것은 여러가지가 있다"며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순 없지만 '의제'로 논의된 것은 없다"고 했다. 독도가 '의제'가 아닌 여러가지 사안 중 하나로 언급됐을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다.
박 장관은 "정상회담을 하거나 외교부 장관 회담을 할 때, 예상하지 않았던 그런 언급(독도에 대한 언급)이 섞여서 들어오는 경우가 가끔 있지 않냐"는 우 의원의 질문에도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 장관은 기시다 총리의 독도 발언과 관련해 "대통령이 항의하고 발언을 중단시켰냐"고 우 의원이 묻자, "대통령이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 우리 정부의 입장을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했다"고 답했다. 다만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된 적이 없다"고 발언을 반복했다.
이에 우 의원은 "전체적인 전모가 보여지는 것"이라며 "기시다 총리가 굉장히 무례하게 (독도를) 꺼냈고 언론 플레이를 했는데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논의를 하지 않은 것이다. 논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응하지 않았다는 소리이고, 잘못된 것이다. 꾸짖었거나 우리 입장을 명백하게 밝혔어야 했다"고 질타했다.
산케이 전 지국장 "일본 측 주장 무시해서 지나간 것"
일본에서도 기시다 총리가 독도나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고 윤 대통령이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 <산케이> 신문 구로다 가쓰히로 전 지국장은 이날 YTN 라디오 <뉴스킹 박지훈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독도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일본 측 발표에 대해 사견을 전제로 "한국 측에서 왜 그런 것이 큰 문제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고 운을 뗐다.
이어 "오랜만에 정상회담을 했기 때문에 한일 간에 여러 현안들과 관심사가 있다"며 "거론은 됐는데 일본 측에서 원칙적인 이야기로 표현한 것이고, 그래서 주고받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 측에서 논의 안 했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구로다 전 지국장은 '논의는 아니지만 뭔가 일본 측에서 얘기를 꺼냈다는 것이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당연히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에, 현안 (논의) 때, 있었던 문제들을 여러 가지 거론했을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산케이> 신문은 후쿠시마 농수산물 수입금지 해제나 초계기 레이더 조사 갈등은 있었지만 독도나 사도광산 문제는 없었다고 보도했다는 지적에도 "여러 가지 그동안에 한일 간에 갈등의 대상이 됐었던 문제들은 다 아마 나왔을 것"이라며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 자체는 틀린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구로다 전 지국장은 "토론 장소, 의논하는 장소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간 것이다. 아마 어떻게 보면 한국 대통령 입장에서는 일본 측의 주장이 그렇게 말했다는 거니까, 쉽게 말하면 그냥 무시해서 지나간 것"이라며 "그러니까 한국 측에서는 의논을 안 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