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기념사 보도, 한국언론의 '산케이화'
대통령 기념사, 비판 없이 찬사 일색
일본 극우매체의 논조와 다를 게 없어
정부-언론, 상식과 합의 깨뜨리는 2중창
1일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를 의심케 하는 것이었다. 역사 청산과 반성에 대한 얘기는 일절 없이 일본과 '가치를 공유하는 협력 파트너'라는 기념사는 이날이 과연 3·1절인지, 한국의 대통령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게 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2일 아침 조간신문에 실린 기사들은 보는 사람들의 눈을 의심케 했다. 비판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오히려 이를 한일간의 새로운 미래로의 문을 여는 ‘결단’인 양 평가했다.
윤 정부의 일본에 대한 저자세나 그를 통해 드러나는 빈곤한 역사관은 이미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 문제, 독도 분쟁, 일본과의 이른바 군사협력 등의 사안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노출돼 왔다. 그러나 다른 날도 아닌 3·1절의 기념사라는 점에서 그 충격은 더욱 컸다. 나라의 자주독립 의지를 천명한 3·1 정신의 의미를 오늘에 되살리고 현재적 과제를 제시하는 국가기념일에 대통령이 내놓은 말들은 일본에 대한 굴종과 새로운 예속의 노선을 확고한 방침으로 천명하는 선포와도 같았다.
대통령의 말이 첫 번째 충격이었다면 다음날 이를 보도하는 주요 신문들의 기사는 두 번째 충격이었다. “우리가 세계사 변화에 준비를 못해 국권을 상실했다”며 일제 식민지 침략을 우리 책임으로 돌리는 발언이나 일본을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다”고 한 것 등에 대한 비판과 지적은 없었다. 비판 대신 미래로의 돌파구, 한일간 협력시대로의 전환 돌파구 등의 찬사와 긍정이 지면을 도배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 ‘한국, 이제 과거사 싸움 해야 하는 수준의 나라는 넘어선 나라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과거사 문제로 일본을 비판하거나 반성 사죄를 요구하지 않은” 것을 ‘미래에 방점을 찍은 것’으로 평가했다. 과거 대통령들이 취임 후 첫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에 과거사 반성을 하라고 한 것을 ‘날을 세운 것’이라고 하고는, “이런 연설 뒤 한일 관계가 서먹해지고 과거사 문제도 더 꼬이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며 역대 정부의 3·1절 기념사를 비판했다.
중앙일보도 사설에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치 현실을 직시하면 지금은 가치를 공유하는 이웃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할 때란 지적이 다수”라며 대통령의 기념사를 지지했다. 동아일보는 “윤 대통령이 일본과의 협력 의지를 드러내면서 한일 정상회담 등 관계 개선에 속도가 붙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고 해 한일관계 개선의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했다.
서울신문은 ‘말 아낀 3.1절 기념사 함의’라고 했다. 대통령의 말을 심사숙고되고 절제된 언어로 평가한 것이다. 전임 문재인 정부에 대해 “반일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은 결과 5년간 사상 최악의 한일관계였다”는 질타도 역시 빼놓지 않는다.
조선일보는 “한국은 이제 과거로 논쟁하는 나라의 수준을 넘어섰다”고 했다. 그러나 이같은 언론의 보도를 보면 과거를 놓고 논쟁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 수준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1일 세종시 한 아파트에는 태극기 대신 일장기가 걸렸다. 이미 일부 집회에선 일장기를 흔드는 이들이 보였지만 주택가에 일장기가 내걸린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일본 국기인 기미가요가 불리고, 그런 행사에 한국의 고위 외교관리가 공개적으로 참석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일본과 한일 관계에 관한 우리 사회의 오랜 성역과 금기가 깨지고 있다. 깨야 할 성역이나 금기가 아니라 한국사회가 수십 년 동안 합의하고 지켜온 보편의 상식이며 최저선의 약속이다. 정부가 선창하고 유력 언론들이 따라 부르는 이중창 속에 그 상식과 합의가 무너지고 있다.
일본 극우 매체인 산케이 신문은 한국 대통령의 입에서 들을 수 없었던 발언을 전하면서 ‘윤 씨(대통령), 반일 세론(世論)에의 영합과 결별’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산케이 신문의 반색과 환호가 보이는 제목이다. 일제 식민지배를 '조선에 은혜를 베푼' 일쯤으로 미화하고 있는 산케이 신문답게 전범국에 역사적 범죄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는 것을 '세론에 영합'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산케이는 일본 극우파의 극단적이고 몰역사적인 시각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때 찾아보는 신문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한일관계에 관한 보도들에 관한 한 산케이신문을 따로 찾아보지 않아도 될 듯하다. 한국의 유력 언론들의 지면에서 '한국 속의 산케이'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주요 언론의 산케이화’, 결코 과장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