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판 막걸리 반공법(?)과 법무장관 팔머

2023-02-10     김평호 미국 톺아보기
김평호 저술가 · 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반공'이라면 대한민국의 전매특허로 여길 수도 있지만, 미국은 그 이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1950년대, 맥카시즘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던 시대에 미국은 반공광풍에 휩쓸렸다. 1차대전 직후에도 그에 못지않은 반공과 애국의 거센 바람이 불었다.

애국반공의 광풍은 ‘빨갱이 공포(Red Scare)’와 함께 한다. 합리적 사고와 판단은 그 앞에서 멈춘다. 그런 곳에서는 엽기적이면서도 한편 우습고 한편 처참한, 우리 식으로 말하면 막걸리 반공법(?) 같은 일도 생긴다. 애국반공의 광풍 앞에 흔들렸던 미국 사회도 그랬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막걸리 반공법?

1919년 2월 인디애나주에서 살인사건 재판이 열렸다. 피고는 ‘미국은 무너져야 합니다!’라고 외친 한 이민자에 격분, 살해한 범인이었다. 배심원단은 피고를 석방토록 평결했다. 평결에 걸린 시간은 단 2분이었다. 같은 해 5월 워싱턴 DC의 한 극장에서 총성이 울렸다.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한 군인이 그에게 총을 쏘았다. 그는 비애국자를 처단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놀라운 것은 사건 현장 주변 객석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청중들은 일어나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1920년 초 코네티컷주 의류판매점 직원이 재판을 받았다. 그가 법정에 선 이유는 ‘레닌은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정치인 중 한 사람’이라고 손님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판사는 그에게 6개월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 무렵 한 우파단체는 국기 선양 운동을 벌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좀 이상했다. 잘 알다시피 흰색 바탕에 13개의 붉은 가로줄과 푸른색 사각형 안의 흰색 별. 미국기의 기본 디자인이다. 그런데 이 단체는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색을 국기에서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트럭 운전사는 같은 이유를 대면서 대형화물 경고용으로 붉은 깃발 대신 국기를 달았다. 경찰은 국기를 모독하는 행동이라며 그를 체포했다. 법원은 운전사의 애국심에는 관심을 주지 않은 채 벌금형을 선고했다.

한편 출판업체들은 미국의 영웅들 시리즈를 출간했다. 정치인, 카우보이, 서부 개척자들이 주인공들이었다. 헐리우드에서는 건국의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었다. 보통 사람들은 - 이민자든, 시민권자든 - 자기들이 경험한 미국의 좋은 점을 담은 자전적 간증서(?)를 펴냈다. 국무성에서는 미국 헌법의 원문 기록물 전시행사를 열고 그것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각급 자치단체에 배포했다. 여성, 재향군인, 변호사 단체 등 여러 사회기관에서도 건국 관련 자료를 팸플렛으로 제작, 보급했다. 한 안보단체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미국’을 가르치는 1000개의 학습모임을 조직했다며 기염을 토했다.

위기 부채질하기

배심원, 군인, 관객, 판사, 운전사, 출판사, 사회단체, 정부 등이 보여준 이같이 엽기적이고 비정상적인 행태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들이 표출한 분노, 공포, 혐오 등은 무엇에 대한 것이었을까?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1919년 봄에서 여름까지 미국에서는 과격분자들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10여 건의 폭탄테러 사건이 터졌다. 급진적 사상을 담은 유인물이나 잡지도 널리 유통되었다. 밖으로는 1917년 소련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했고 그 다음해가 되어서야 1차대전은 끝났다. 전후에는 경기불황과 계속되는 스페인 독감에 시달렸다. 실업률은 19%까지 치솟았고, 전전 대비 물가는 무려 4배나 올랐으며, 스페인 독감으로 80만 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다. 크고 작은 노동자들의 파업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관료와 정치인들은 위기 발언을 이어갔다. ‘미국은 지금 혁명 전야의 위기에 빠져 있다’(R. 랜싱 국무장관). ‘실제로 정부가 무너질 수도 있다’(M. 포인텍스터 워싱턴주 상원의원). ‘국가가 화산폭발 직전의 위기를 맞고 있다’(C. 토마스 콜로라도주 상원의원).

뭔가 터질 듯한 초조함과 불안의 시간이었다. 이즈음 법무장관 A. 팔머가 의회에 출석, ‘조만간 급진분자들이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고 공개했다. 그러자 언론이 나섰다. ‘미국을 다시 만들자.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의무화하자. 불평분자를 몰아내고 깨끗한 국가를 만들자’는 요지의 논설을 실었다. 교회와 기업들도 나서서 위기를 강조하며 비미국적, 비애국적 불순분자를 억압하거나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국반공의 바람이 불고 사람들은 빨갱이 색출에 앞장섰다. 노동운동 단체,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이 가장 먼저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팔머와 후버의 공안몰이

법무장관 팔머가 위기극복(?)에 앞장섰다. 당시 법무부 수사국(훗날 FBI)의 정보부 부장이었던 후버와 함께 경찰을 지휘, 불순분자 체포에 나섰다. 1919년 11월과 1920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 검거선풍이 불었다. 이른바 ‘팔머 공안몰이(Palmer Raids)’다.

1차로 12개 도시의 러시아 이주민 노동조합을 급습, 250명을 체포했다. 2차는 35개 도시, 만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혐의로 체포했다. 그 과정은 거의 무법천지였다. 수업 중에 난입해 교사를 끌고 가거나, 지갑을 뒤져 돈을 빼앗아 가기도 했으며, 사무실도 마구 부쉈다. 각목이 동원되고 사람이 죽어 나갔다. 영장도 없이 체포가 이뤄지거나 체포이유도 모르고 변호사 접견도 거부당한 채 다섯 달 동안이나 구금된 사례도 있었다. 수감자들에게 음식을 주지 않거나 창문조차 없는 감방에 가둬놓기도 했다. 심지어는 혐의자가 보는 앞에서 가족을 소환, 폭행하는 식의 고문도 저질렀다.

초기에는 여론의 지지가 제법 높았다. 그러나 공안몰이의 위법성, 폭력성이 알려지면서 비난이 쇄도했고 여론이 나빠졌다. 정부 내에서조차 그의 전횡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팔머와 후버는 사상의 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논란을 피하려고 간첩법 대신 이민법을 적용했다. 재판 없이도 추방이 가능한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체포된 사람들 대부분은 결국 석방되었고, 노동부에서는 추방 사례들을 재점검, 무고한 추방조치를 취소했다. 그러자 팔머는 노동부 차관이 ‘소련 혁명분자’라고 악을 썼다. 또 정보부장 후버와 함께 메이데이에 공산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겁박했다. 정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나빠진 여론과 함께 그들이 주도한 공안몰이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졌다.

사실 당시의 대대적 검거선풍은 여론을 극대화하기 위한 과시용 연출(?)이었다. 이미 정보부장 후버는 노동운동이 신뢰도 약하고 지도부의 역량도 빈곤하다는 것, 공산주의 운동 역시 무기력하고 노동자들과 거의 연관이 없으며 소련과의 관계도 미미하다는 것, 급진적 무정부주의자들은 극소수의 고립된 조직과 끈을 맺고 있는 수준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팔머와 함께 대규모 체포사태를 벌인 것이다.

본래부터 대통령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팔머는 1920년 4월 직을 그만두고 그 해 민주당 대통령 예비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자신이 법과 질서의 선도자이며 구국의 일념으로 가득 찬 100% 미국주의자라고 내세웠다. 물론 낙선했다. 애국반공의 바람은 주춤하는 듯했다. 그러나 1950년대 맥카시와 함께 광풍으로 부활했고 그 사이 후버는 FBI 국장으로 승승장구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면서 미국에 반러시아주의가 되돌아왔다. 주류매체의 보도와 해설은 거의 예외 없이 반러시아 일색이다. 전쟁 비판의 목소리에는 ‘비애국적 푸틴 추종자’라는 비난이 쇄도한다. 이젠 중국도 함께 적으로 취급한다. 지난 2일, 의회는 뜬금없이 ‘사회주의 규탄, 사회주의 정책 반대’ 주제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민주당 의원 중 절반이 넘는 109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신종 매카시즘의 공포에 사로잡혀 외눈박이가 된 미국의 모습은 전과 그리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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