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조업 부활 막는 건 달러 패권과 기술자 부족"
프랑스 역사인구학자 에마뉘엘 토드 지적
안팎 원인 구분 못하는 건 제국붕괴의 전형
냉전붕괴를 미국 승리라고 본 것부터가 잘못
‘서양의 패배’ 뒤엔 프로테스탄티즘의 쇠퇴
“일본이 분쟁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핵무장해야”
프랑스의 역사인구학자 에마뉘엘 토드(74)는 미국 트럼프 정권이 제조업 부활을 외치고 있지만 ‘달러 패권’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파괴 욕구를 수반한 니힐리즘(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미국의 “폭력적인 쇠퇴”를 점쳤다.
인구동태와 가족구성에 관한 지식에 입각한 문명론과 지정학적 사고로 명성을 얻은 토드는 소련 붕괴를 예언한 <최후의 몰락>(1976)을 비롯한 국제적인 베스트셀러들을 썼다. 2001년에는 <제국 이후>로 미국의 쇠퇴를 예고했고, 2024년에는 <서양의 패배>를 썼다. 우크라이나전쟁에서 서방이 러시아에 질 것이라는 주장으로 ‘친러시아’ 인물이라는 딱지가 붙기도 했으나, 서방 지식인들의 반러시아 감정을 두고 한쪽 방향으로 헤엄쳐 가는 작은 물고기떼라고 비판한 그의 주장은 나름의 근거가 있다.
1일 <일본경제신문>(닛케이)과의 인터뷰에서 토드는 미국의 ‘폭력적 쇠퇴’ 가능성을 ‘예언’하면서 종교의 소멸, 개인의 공허감, 교육과 산업, 민주주의의 퇴조 역학을 통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지(知)의 거인’이란 칭송과 함께 때로 ‘헛소리’ 발설자로 비판받기도 하는 토드는 정권이 나라 안과 밖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제국 붕괴의 전형적인 현상이라며 그럴 때 지배와 착취가 강화될 가능성이 있으니 미국을 조심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일본이 분쟁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핵무장을 하라며, 그것이 “평화로 가는 유일하고 현명한 투자”라고 했는데,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분쟁에 뛰어들기 위한 핵무장이 아니라 분쟁에 말려들어가지 않기 위해 핵을 가져야 한다는 역설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만큼 이미 현실은 복합적 중층적으로 뒤얽혀 있다.
토드가 말한 ‘폭력적 쇠퇴’을 두고 다나카 미치아키 일본공업대 대학원 교수는 경제 붕괴나 정치위기가 아니라 종교적 윤리→교육적 지성→사회적 이성이라는 ‘믿음의 연쇄’가 끊어진 문명의 자기붕괴로 이해해야 한다는 논평을 달았다. 다나카 교수는 토드를 “역사인구학과 가족인류학을 기반으로 문명의 변화를 출생률·식자율·가족제도·종교규범·교육 등의 사회기초변수를 통해 읽어내는 연구자”로 정의했다.
미국 제조업 쇠퇴의 주요 원인은 기술자 감소
트럼프 대통령 재선 이후 혼돈이 깊어가고 있는 미국의 무역적자를 해소하려는 트럼프의 정책에 대해 토드는 니힐리즘에 사로잡혀 “진실을 공격하고, 과학을 부정하며, 종교를 왜곡하고, 거짓과 변절을 떠받드는 히틀러적 외교를 전개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트럼프의 미국 제조업 부활 주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 미국이 배출하는 기술자는 인구가 미국 절반도 안 되는 러시아보다 적다. 기술자 감소가 미국 제조업 쇠퇴의 배경에 있으며, 교육과 종교의 붕괴와도 얽혀 있다.”
하지만 미국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달러 패권”이라고 했다. “성공을 추구하는 우수한 젊은이들은 자동차나 항공기 산업이 아니라 달러가 흘러넘치는 마법의 샘에 가까운 금융이나 법률 분야에서 일한다. 당연히 기술자는 부족하고 제조업은 계속 쇠퇴한다. 문제는 미국 산업이 외국산업이 아니라 자국의 달러와 다투고 있는 점이다.”
한국사회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토드는 달러의 (특수한) 지위 때문에 트럼프의 경제정책이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 “관세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미국이 산업 시스템과 금융패권의 상극에서 빠져 나오기에는 늦었다. 산업기반과 기술자가 부족한데, 달러 패권을 포기하면 제품을 수입하는 힘을 잃게 돼 국민의 생활이 곤궁해진다.”
통화(달러) 패권이 미국 제조업을 파괴하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는 것인가?
토드는 “직감적으로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본다”면서, 설사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최강국으로서의 만능감(萬能感) 때문에” 명백한 문제나 그 해결책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냉전붕괴는 미국 승리 아닌 소련이 먼저 무너진 것
동서냉전 붕괴를 미국의 승리로 본 것부터 잘못됐다고 했다.
“소련의 붕괴도 서방의 승리라고 오해했다. 사실은 붕괴하고 있던 두 체제 중에서 소련이 먼저 붕괴했을 뿐이다. 하지만 당시 승승장구했던 미국은 2001년에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영입하는 자살행위를 저질렀다.”
“미국 빈곤층의 핵심은 이미 노동자들이 아니다. 생산활동도 하지 않은 채 아시아산 저가 제품을 소비하며 살아가는 뭔가 다른 존재가 됐다. 마치 고대 로마에서 이집트산 곡물을 배급받았던 평민들과 같다.”
이런 상황이 가족과 사회, 국가에 보탬이 되고 있다는 자존심과 행복감을 사람들로부터 빼앗아 자살과 약물(마약) 의존이 심각해졌다.
토드는 미국에서 아직 낙관론이 강했던 2003년에 출간한 책에서 세계는 미국이 지배하기에는 너무 넓고, 미국 경제력도 실은 강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 뒤 많은 기술이 탄생했지만 미국은 계속 쇠퇴하고 있다.
그는 “미국의 쇠퇴는 장기적 경향(추세)으로, 내 관심사는 오히려 쇠퇴가 평화롭게 진행되느냐 폭력적으로 진행되느냐는 것”이라면서 지금으로서는 “난폭한 붕괴밖에 생각할 수 없다”며 “내전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대통령이 국내 민주당계의 도시들에 군 부대를 파견하고 있다. 정권이 나라 안과 밖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제국 붕괴 때의 전형적인 현상이다. 미국이 ‘패배의 제국’이 되면 동맹국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 일본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서양의 패배’ 뒤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쇠퇴
토드는 서양의 패배 그 뿌리에는 발흥기를 떠받친 프로테스탄트(기독교 개신교)류의 가치관과 규범의 쇠퇴가 자리잡고 있다며, 그 여파가 세계의 향방을 좌우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과 같은 나라는 고통이 적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종교의 상실은 늘 문제다. (종교가) 용기와 명예, 진실 존중 등의 가치관을 사람들에게 심어 국가와 사회를 만들고 집단행동을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종교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불교와 신도, 비종교인 유교가 뒤섞여 있는 섬세한 일본도 마찬가지다.”
“프로테스탄티즘이 특별한 것은 성경을 읽기 위한 교육의 중시가 식자율을 높여 영국, 독일, 북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의 발전을 촉진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쇠퇴하면 사회가 통합력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지성도 저하한다.”
“남유럽 주류인 가톨릭은 세례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에는 누가 구원받을지는 신(하느님)이 사전에 정해 놓았다는 ‘예정설’이 있다. 영국과 그 영향을 받은 미국에서 경제격차(불평등)가 용인되기 쉬운 이유 중의 하나다. 빈곤은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의 운명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그런 의식이 남아 있는 미국사회의 불행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트럼프 지지자들에는 기독교 우파 사람들도 많다. 토드는 그들의 종교 현상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가치관은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진실의 부정, 과학에 대한 회의, 부자 예찬 등은 오히려 프로테스탄티즘(정신)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역설적이게도 지금 상황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성공에 따른 결과다. 모두가 글자를 읽는 법을 배운 것까지는 좋았으나 중등교육, 고등교육이 보급되자 근대 민주주의의 기반이었던 평등의식이 허물어졌다. 사회의 분단과 계층화로 우월감을 지닌 엘리트들이 생겨나고 그 반동으로 포퓰리즘이 들끓게 됐다.”
일본이 분쟁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핵무장해야
토드는 일본인들의 이민자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는 것을 “일본의 완벽주의” 때문이라고 했다. 에도시대의 일본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어 일탈자나 일탈행위에도 관용적이었으나, 사회가 완벽해지면서 저출산이 진행됐고, 그런 상황에서 불완전성의 극단에 있는 이민자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지금의 일본을 그는 동정했다. “하지만 경제를 유지하려면 이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문제가 없는 것처럼 하지 말고 일본에 맞는 형태로 그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소의 무질서는 세상 다반사다.”
최근 글로벌 사우스(남반구, 상대적 경제 낙후지역) 나라들에서 러시아의 소프트파워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현상에 대한 질문에 토드는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역사를 거론하며 서방 주류와 거기에 저항하는 비주류 신흥국들의 충돌로 그것을 풀이했다.
“구미는 식민지시대와 최근의 글로벌화에 따른 ‘신식민지시대’를 통해 위협적인 존재였다. 거기에 대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전쟁을 통해) 노(No)라며 세계의 주류파 압력에 저항하는 방패가 됐다. 러시아의 다극주의적인 지향도 신흥국들과 공명했다. 9월에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인도의 모디 총리가 한 자리(상하이)에 모여 사진을 찍은 것은 세계의 전환점이었다.”
“일본은 메이지시대에 신흥국으로서 처음으로 서양에 대항했다. 너무 잘 나가서 서양의 식민지주의에 물들고 큰 전쟁에 말려들었으나, 다극화한 세계에서 일본에게는 특별한 지위가 있다. 그것을 살리는 방책을 진지하게 생각할 때다.”
이웃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미국과의 강력한 관계를 끊기 어렵다는 기자의 얘기에 토드는 “인구가 급감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과도한 우려는 불필요하다”고 했다. “함께 인구가 줄고 있는 일본 중국이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어리석다. 분쟁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핵(무기) 보유가 유효하다. 평화로 가는 유일하고 현명한 투자다. 미군 중에는 그런 선택에 이해를 표시하는 간부도 있다. 중국도 (일본의 핵무장으로) 오키나와에서 미군이 철수하는 것을 환영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