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KBS 가슴팍에 새겨진 주홍글씨 '파우치'

5공 '땡전뉴스' 못잖게 치욕 안겨주고 있어

중대 시기에 '대표 공영방송'이 공론장에서 소외

2025-10-21     손관수 전 KBS 보도본부장

청교도들의 미국 개척 시절, 인간의 죄와 위선에 대한 통찰력을 잘 표현한 것으로 유명한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씨>는 ‘고전 읽기’가 유행하던 시절 인기 있던 소설이었다. 앞가슴 상의에 간음(Adultery)을 뜻하는 'A'를 주홍색 글씨로 새기고 살아야 했던 주인공의 처지는 그의 삶을 얽매는 평생의 ‘굴레’였다. 주홍 글씨는 이후 “수치스럽기 그지없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널리 사용된다.

내란 재판에서 공개된 CCTV를 통해 확인된, ‘대통령이 주도한 친위쿠데타’라는 전대미문의 폭거가 자행된 날 밤의 심야 국무회의 모습에서도 우리는 대한민국의 총리와 장관들, 고위 지도자들, 지식인들의 거짓과 위선을 처절하게 목격하였다. 비록 목소리는 없었지만, 그들의 행동과 표정 하나하나만으로도 “계엄에 반대했었노라. 문건은 알지도 못했노라”라던 그간의 여러 증언과 주장이 거짓이었음이 명확히 드러난 것이다. 그들의 가슴에도 권력과 내통했다는, ‘내란 동조범’이라는 주홍 글씨 ‘A’가 좀 더 선명하게 새겨지고 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낙인보다 더 먼저, 더욱 선명한 “주홍 글씨”가 이미 새겨진 곳이 있다. 바로 공영방송 KBS이다. “파우치!” “Pouch!” 공영방송 KBS의 가슴에 아로새겨진 이 주홍 글씨는, 1980년대 전두환 폭압 정권 하에서 조롱받던 “땡전 뉴스”에 못지않게 KBS에 치욕을 안기고 있다. 더구나 KBS는 이 굴레를 스스로 뒤집어썼다. 그리고 그 대가로 누군가는 권력의 하해와 같은 ‘은총’을 받았다.

 

‘특별대담 대통령실을 가다’ 진행자로 나서 윤석열 대통령과 인터뷰 도중 김 씨의 명품백 수수 의혹에 관해 질문하며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에서 만든 조그마한 백”이라고 하는 박장범 앵커. KBS 화면 갈무리.  

권력에 대한 ‘용비어천가’가 되어버린 지난해 2월 ‘대통령과의 특별 대담’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제작 과정에서부터 확인된다.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과의 대담, 인터뷰는 회사의 모든 역량이 결집돼 제작되는 게 상식이다. 특히 질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프로그램의 성패가 갈리기 때문에, 정국 현안 취재를 계속해 온 정치부를 중심으로 한 보도 부문의 기획과 준비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지난 대통령 대담에서 이 핵심 과정은 완전히 별도로 진행되었다. 주체가 되어야 할 보도본부는 완전히 배제된 채, 사회자를 비롯한 일부 인사와 외주사가 질문지를 비롯한 모든 것을 준비한 것이다. 그 외주사가 어디인지 내부에서도 알지 못한다.

인터뷰 과정을 보자. ‘KBS 9시뉴스’ 앵커였던 사회자는 시작 전부터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국무회의실을 소개하면서 “한번 앉아 보라”는 대통령의 권유에 그 자리에 앉은 것이다. 그리고는 “개인적으로 영광입니다”라며 감사함을 표했는데, 그의 등 뒤에서 흐뭇하게 웃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에서, 나는 모멸감을 느꼈다. 권력의 ‘은총’에 더없는 ‘따뜻함’을 느낀 언론으로부터 권력에 대한 비판적 인터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른바 파우치, 외국회사의 그 뭐 쪼만한 빽”이란 표현은 이런 과정을 통해 나온 ‘보은’의 언어였다. 애초부터 마음의 자세가 이러했으니, 그런 ‘파우치’마저 “김건희 여사가 왜 받았는지?”가 아니라, “어떤 방문자가 그 앞에 놓고 갔고”, “더구나 몰래카메라까지 착용”했는데, “이것은 의전과 경호에 심각한 문제”가 있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죠?”라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니 “박절하게 대하기 참 어렵다”는 너무나 ‘인간적인’ 답변만을 끌어내고 더 이상의 추가 질문이 필요 없었던 것 아니겠나?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을 인터뷰한 것인가? 아니면 힘세고, 금실 좋은 동네 아저씨를 인터뷰한 것인가? “파우치”라는 주홍 글씨는 이렇게 탄생되었다.

이후 “파우치 박”, “파우치 KBS”라는 조롱과 비난이 굴레처럼 KBS를 옭아매고 있다. KBS가 어떤 정책을 추진한다 해도, 박장범 사장이 어떤 의욕적인 계획을 발표한다 해도 사람들은 KBS와 사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파우치”라는 냉소와 조롱으로 무시하는 게 현실이다. 이미 Pouch의 커다란 “P”자가 KBS의 가슴에 새겨진 것이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방송법이 개정되고 방통위가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로 개편되는 등 방송의 제도적 환경이 결정적으로 변하는 중대한 시기에 “대표 공영방송”이라는 KBS가 사회적 논의의 장, 공영방송의 미래에 대한 공론의 장에서 더욱 소외되고, KBS 스스로도 극도로 위축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9월 국회에서 열린 ‘공영방송 공공성 확립 방안’ 토론회에선 ‘독일 공영방송의 공공성·공정성 강화방안’과 ‘영국 BBC의 적절한 불편부당성 개념과 실천’에 대한 주제 발표와 토론이 있었는데, KBS 관계자는 발제는 물론이고, 토론 참석조차 없었다. 지난 13일 MBC가 주관한 세미나에선 ‘공영방송 협약제도 도입’, ‘공영방송재정위원회 설립’, ‘시청각미디어기여금’ 등 새로운 공적 재원 확보 방안이 제기되는 등 방송3법 개정 이후의 후속 개편에 대한 논의가 가속화 되고 있는데 KBS는 불쑥 제기했던 수신료 인상안을 철회한 후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그야말로 ‘업보’이다. ‘파우치의 저주’이다. 리더십이 이처럼 코마 상태에서 어떻게 ‘방송법에 의해 임명된 정당한 사장’이라는 형식 논리만 고집할 것인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국민을 총칼로 짓밟아 독재 권력을 구축하려 했던 윤석열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를 정말 ‘호수 위의 달 그림자’ 보듯이 할 수 있는가? 그런 권력을 비호하고, 아부하여 사장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엄연한 역사가 날이 밝아오면 흔적 없이 사라지는 ‘호수 위의 달 그림자’가 될 것이라고 믿는가?

“The BUCK STOPS here!”, “책임은 내가 진다.” 박장범 사장! 대통령과의 대담 당시 두 사람이 글귀가 쓰인 명패까지 들어 보이며 얘기하던 걸 기억한다. 트루먼 대통령의 자세를 얘기하며 바이든에게 선물 받았다는 리더의 자질에 관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을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지만, 그대가 그때 봤던 이 글귀, 이 명패는 그대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법과 제도가 변하고, KBS의 주인인 ‘국민’과 ‘시청자’들이 외면하는 이 엄중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심각하게 본다면 이제 그만 내려오시라. 스스로 결자해지 하시라. 그래야 KBS의 가슴팍에 새겨진 “파우치”라는 모멸적인 “주홍 글씨”가 지워질 수 있다. 그것이 '저널리스트' 박장범 기자의 마지막 봉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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