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의 고향으로 나를 보내 달라"

[활동가를 만나다] 비전향 장기수 안학섭 선생

신념 지키며 전향거부로 43년간 비참한 옥살이

휴전 직전 붙잡혀 전쟁포로였지만 간첩으로 둔갑

박정희 '비전향자 없게 하라' 지시에 고문 시달려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전향공작, 동료죄수 동원까지

95세, "죽어서라도 가고 싶다" 제3국 통해 북송요청도

2025-10-20     이득신 시민기자

양심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가치와 도덕의 마음가짐이다. 사전에서 양심의 자유는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 이라고 푼다. 헌법재판소는 양심이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가치가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절박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라고 판시한 바 있다. 이 점이 중요한데, 양심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판단 기준이라는 것, 헌법은 제 19조에서 이를 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상의 자유, 신념의 자유가 포함된다. 자신의 정치적 사상적 신념을 지키며 평생을 살아온 비전향 장기수 안학섭 선생은 '신념의 고향'인 북으로 보내달라고 호소한다.   

 

지난 추석 연휴 기간중 김포에서 필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안학섭 선생

내가 안학섭 선생을 만난 건 이적(본명, 이만적) 목사를 통해서였다. 지난 4월 삼청교육대피해자연합 이적 이사장을 인터뷰하면서 이 목사가 통일 운동을 병행하며 민통선평화교회 대표 목사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안학섭 선생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도 전해들었다. 나는 몇 차례 선생을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지만 정작 인터뷰를 위한 만남에서 인사를 건넸을 땐 나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집회와 기자회견 현장에서, 그리고 뒤풀이 자리에서 짧은 인사만 나누고 나의 일정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 들어 그는 통일운동가들과 함께 북송을 원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등 수많은 활동가를 접하고 있으니 어쩌면 나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인터뷰는 추석 연휴 중 김포의 어느 식당에서 이루어졌다. 선생은 인터뷰 중 눈물을 훔치기도 했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90대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의 끄집어낸 기억은 잔인하지만 선명했고 정신은 또렷했으며 특정한 장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분위기까지 묘사했다.

선생이 태어난 곳은 지금 남한 지역인 강화군 화점면이다. 휴전선 이북을 자신의 물리적 고향이 아닌 '신념의 고향'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그는 1930년 4월 생으로, 일제 강점기 시절 그가 다니던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조선인 교사의 말 “조선 사람이 조선말도 모르면서 일본말을 배우느냐”라는 호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부터 그는 민족의식을 키우기 시작했다. 1950년 개성공립고등중학교 3학년 재학 중 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 941부대에 입대했다. 일제강점기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거의 매일 군사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별도의 군사교육이 필요 없었다. 선생은 한국전쟁을 '조미전쟁'이라고 표현했다. 한국전쟁 또는 6.25전쟁이 공식명칭이라고 해도 그에게 남쪽은 미국이 점령한 '괴뢰정부'였고 조선과 미국이 싸운 전쟁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미군 추방 북송 추진 기자회견에 함께하고 있는 안학섭 선생. 사진 중앙

당시 강원도당은 “전투하지 말고 목적지에 가라”는 명령을 선생에게 하달했다. 그는 연락병 신분이었으며 “부대를 조직해 가라”는 지시에 의해 1952년 7월 강원도로 보내졌다. 1953년 4월 중순 포로가 된다. 그때 수감돼 1995년 8월 15일에서야 풀려났으니 무려 43년을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체포 당시 그는 인민군 장교 복장을 한 정규군 신분이었는데도 전쟁포로가 아닌 간첩 혐의가 적용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전쟁포로의 국제 기준은 1949년 제네바 협약에 명시되어 있다. 여기에는 인도적 대우를 받아야 하고 억류국이 이를 준수해야 한다는 원칙이 담겨 있다. 이 협약에 따라 전쟁포로는 인간 존엄성을 존중받아야 하며, 고문이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 또한, 전쟁포로는 군사적 정보를 강요받거나 정치적·종교적 세뇌를 당하지 않아야 하며, 종전 후에는 본국으로 송환되어야 한다. 전쟁포로의 범위에는 교전당사자, 기관원 및 지방의 조직적항거자(빨치산)가 포함한다. 하지만 당시 이승만 정권을 비롯해 줄줄이 이어진 군사독재 정권은 전쟁포로를 간첩으로 몰아 평생을 감옥생활하게 만든 것이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포로교환이 이루어진 것을 볼 때 전쟁포로를 간첩으로 둔갑시켜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한 것은 매우 부당한 처사이다.

선생은 풀려난 이후에도 보안관찰 대상자로서 거주지 이전이나 만난 사람들을 수시로 보고해야 했으며 2년마다 재판을 받는 등의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이 때 선생은 “내가 월급 받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너희에게 보고해야 하는가”라며 자진 보고를 거부했다.

선생의 감옥생활은 혹독했다. 전향공작이 진행된 것이다. 그가 열거하는 감옥에서의 고문과 협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잔인했다. 특히 물고문이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한겨울에 감옥 바닥에 물을 뿌린 채 알몸으로 지내게 만들어 6일 만에 깨어난 적도 있었으며 눈을 가린 채 정수리에 얼음물을 뿌려댔다. 물이 정수리를 거쳐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소리가 저승길 홍수 같은 느낌이기도 했고, 물에 젖은 수건을 얼굴에 겹겹이 덮으면 숨을 쉴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죽음의 공포가 몰려왔다. 모진 고문으로 안학섭 선생은 두 번이나 중환자실에 실려 가는 등 심장질환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가 수감됐던 대전교도소를 순시한 박정희는 “비전향자가 없도록 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린다. 그는 곁에서 직접 들었다고 했다. 

독재정권의 전향공작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어느 추운 겨울날, 막 아빠가 된 어느 인민군 출신 젊은 포로는 아내가 어린 아이를 업고 면회를 오도록 한 후 아이를 동사 직전까지 한파에 세워두는 방법으로 전향을 강요당했다. 동료죄수를 통해 전향공작을 하기도 했다. 그 대가로 강도범 절도범 등을 사면해준다는 유혹에 동료 죄수들이 그를 고문했다.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으니 그들은 술을 마신 상태로 폭력을 자행했다.  심지어 감옥으로 여성을 불러들여 술과 안주를 내오며 미인계를 쓰기도 했다. 

이렇게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전향공작에 시달렸던 서승, 서준식 형제는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으로 모진 고초 뒤 1988년 석방되어 강제전향공작 사실을 일본에서 터트리며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지난 8월 통일대교를 통해 북송을 요청하는 안학섭 선생과 시민들.

이인모 선생은 김영삼 정부의 출범과 함께 휠체어 타고 북송된 첫 사례였다. 이후 김대중 정부 시절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으로 송환되었다. 고문으로 강제 전향된 이들을 제외한 송환이었다. 강제 전향 장기수였던 정순택 선생은 간첩으로 체포된 뒤 1989년까지 31년 5개월간 복역하였다. 고문에 의한 강제전향이었다는 이유로 1999년 전향 철회를 선언했지만 2000년 9월 1차 북송 대상자에는 포함되지 못한 채 암으로 84세를 일기로 서울 대방동 병원에서 숨졌다. 시신은 2005년 10월 2일 북으로 인계되었다. 정순택 선생의 경우 유일한 시신 북송의 사례로 남아 있다.

김대중 정부 때 안학섭 선생이 북송을 거부한 이유는 “남쪽에서 반미투쟁을 계속하겠다”는 것이었다. 일제 식민지를 거쳐 미국의 식민지 상태라는 변함없는 사실에 남녘의 인민들을 두고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신념의 발로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살아생전 의식이 있을 때 북으로 가고 싶다, 죽어서라도 보내 달라”는 간절한 호소를 하고 있다. “땅은 내 땅이어도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북송을 소원했다. 지난 8월에는 송환추진단과 함께 했던 북송 시위가 통일대교에서 제지당한 바 있다. 이후 수많은 기자회견과 외신 인터뷰를 통해 송환을 강력히 원하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다. 지난 10월 16일에는 제3국인 러시아나 중국을 경유해 북송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선생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공개적으로 송환을 요구한 지 벌써 세 달이 넘었다. 정부는 다양한 방안을 검토한다고 해놓고 여태껏 아무런 답변이 없다. 내가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겠나”라며 호소했다. 또한 “제3국을 통해 가는 것은 통일부 관계자들이 먼저 입으로 꺼냈던 말”이라고 주장했다.

 

송환추진단과 함께 중국 러시아 등 제3국을 통한 송환 요청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안학섭 선생.

"뿌리 깊은 사대 매국노가 득실거리는 대한민국 땅에서 박근혜 탄핵 당시의 촛불집회와 윤석열 탄핵집회에서 느낀 건 '아직 민중들의 의식은 살아 있구나'라는 것이었어요".

안 선생은 "최근에는 미국과 트럼프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 싸우고 있는 시민들을 보며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도 말했다. 

이제 양쪽 정부 모두 평생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안학섭 선생에게 응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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