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커크와 혐오 권하는 사회
조선일보 김대중, '한국 보수의 모델'로 극찬
편견 분노 자극하는 선동가라는 사실은 쏙 빼
민주주의 위해 있는 언론이 민주주의 위협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오멘(Omen, 전조).
뭔가 매우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징조 또는 조짐을 말한다. 재난 영화에서 쓰나미가 오기 전에 바다에 사는 새들이 떼를 지어 육지 쪽으로 이동하거나 지진을 앞두고 쥐 떼가 밖으로 몰려나오는 장면을 보면 관객들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바짝 긴장하게 된다.
찰리 커크라는 32세의 미국 청년이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논란의 인물이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이라는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미국에선 2030 세대에 영향력이 막강한 미디어 스타이고, MAGA(미국을 위대하게)를 지지하는 보수 풀뿌리 지지층의 심리를 읽어내는 정치 감각이 탁월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BBC는 ‘찰리 커크는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보수 성향 운동가이자 미디어 스타 중 한 명으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전적인 신뢰를 받는 정치적 동지’라고 평가했다.
반면에 ‘매년 총기로 인해 얼마간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건 감수할 만한 일’이리며 총기 규제에 강하게 반대했고, ‘여성은 본인의 오르가슴에 책임져야 한다’며 낙태에 반대했고, 트럼프가 2020년 대선을 도둑맞았다는 ‘부정선거’ 주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며, ‘사형은 공개적이고 신속하게 집행하고 TV로 중계되어야 한다’며 사형제를 지지했고, 백인 경찰의 폭력적 체포로 질식사한 흑인 청년 조지 플로이드를 ‘인간쓰레기’라고 폄훼하는 등 성 소수자, 이민자, 여성에 대한 혐오 발언으로 격렬한 논란을 몰고 다니는 인물이기도 했다.
이처럼 찰리 커크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전자의 시각으로 보면 커크는 보수 진영의 젊은 영웅이지만 후자의 시각으로 보면 편견과 혐오를 퍼뜨리는 선동가이다. 살아서 ‘논란의 인물’로 미국의 여론을 양극화하는 데 일조한 그의 죽음은 미국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영국에서는 대규모 반이민 집회가 열렸는데 커크의 죽음이 반이민 결집의 촉매제가 되었고, 유럽의회에서는 커크에 대한 묵념 여부를 놓고 각국 대표들이 찬반으로 갈려 책상을 치고 고성을 지르고 야유를 하는 볼썽사나운 장면이 연출되었다고 한다.
이 글을 쓰는 건 찰리 커크라는 ‘논란의 인물’을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총기 규제를 극렬하게 반대했던 찰리 커크는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전직 보안관이고 어릴 때부터 총기를 다뤘다는 열 살 아래인 청년의 저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커크를 살해한 22살 청년은 180미터 거리에서 단 한 방으로 그를 쓰러뜨린 명사수였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게 아니다. 적어도 민주주의가 성숙한 국가에선 그렇다. 민주주의는 상대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토양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갈등을 해소하고, 관용과 포용으로 공존을 도모하며, 논리와 이성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성숙함을 양분으로 유지된다. 그런데 미국도 한국도 어떠한가. 대화와 타협은 적대와 배척으로 대체되고, 관용과 포용은 혐오와 증오에 밀려나고, 논리와 이성은 억지와 궤변을 당해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가끔 생각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면 차라리 면벽 수도를 하며 인내심을 키우는 게 낫겠다는 결론에 다다를 때도 있다. 여론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그런 경우가 많아질 것이다. 한국은 총기 소유가 금지된 나라여서 다행이지만, 미국에선 이번처럼 대화 대신 총을 들이대는 일이 더 빈번해지지 않을까. 찰리 커크 살해가 그런 오멘(전조)이 아닐까 하여 오싹하다.
내가 찰리 커크라는 미국 청년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조선일보에 실린 ‘김대중 칼럼’ 때문이다. 지난 9월 8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투쟁’만으로는 선거를 이길 수 없다’는 칼럼에서 김대중 전 주필은 지금 국힘당에 절실한 건 ‘싸울 줄 아는 독한 야당’을 내세우며 전의를 불태우는 장동혁 대표 같은 투사가 아니라 제갈공명 같은 책사라며 찰리 커크를 예로 들었다.
김대중 전 주필에 의하면, 민주국가에선 모든 것이 선거로 결정되고 선거는 국민의 마음을 사느냐 못 사느냐로 귀결되는데, ‘분노만으로 유권자를 움직일 수 없고, 맹목적인 팬덤 정치만으로도 선거를 이기지 못하며, 유권자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미국 공화당의 젊은 기수’인 찰리 커크의 제언이 한국의 보수 세력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단다. 대통령 윤석열은 좌파에게 계엄이라는 먹이를 제공하여 정권을 뺏겼는데, 분노만 가지고 악에 받쳐서 대들기만 해선 안 되고 선거에 이겨 다시 정권을 잡으려면 찰리 커크의 제언대로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에 어떻게 다가갈 것인지 공부해야 한단다.
그 칼럼을 읽고 커크라는 인물이 누군가 궁금하여 기사를 검색해 보니 조선일보는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과 9월 초에 극우 성향 단체가 주관하는 ‘빌드업 코리아’ 행사에 초청되어 연설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커크는 그 행사에서 ‘한국에서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목사들이 체포되고, 특검이 교회에 마구 들어가 조사를 벌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정부가 벌이고 있는 일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연설을 했고, 그의 연설이 끝나자 ‘마가’, ‘윤 어게인’, ‘스톱 더 스틸(Stop the Steal)’의 구호를 적은 옷과 모자를 착용한 청중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USA’를 연달아 외쳤고 일부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한겨레 기사 <“특검 수사 트럼프도 주시”... ‘코리아 마가’ 양성 미 극우 총출동> 참고. 2025.9.8.)
이 세상에 객관적인 보도는 없다. 객관적이려고 애쓰는 보도만 있을 뿐이다. 칼럼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전달할지 정하는 정하고, 그것과 관련된 많고 많은 사실 중에서 어떤 사실들을 선택할지 정하는 취사선택에서부터 기자나 언론사의 주관이나 의도가 개입된다. 그런 주관이나 의도를 최대한 배제하고 중요한 사실을 배척하지 않고 기사나 칼럼을 써야 언론 윤리가 말하는 사실 보도, 객관적 보도, 공정한 보도에 근접하게 된다.
그런데 김대중 전 주필의 칼럼에는 찰리 커크가 누군지 설명하는 ‘중요한 사실’들이 누락되어 있다. 한국에 온 그가 ‘분노만으로 유권자를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는데, 그의 연설을 보면 커크는 지략에 뛰어난 제갈공명이 아니라 편견과 혐오를 주입하고 분노를 자극하는 선동가에 가깝고, ‘1%의 사실에 99%의 거짓을 섞는 것이 효과적이며,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던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를 떠올리게 한다.
김 전 주필은 찰리 커크가 논란의 인물이라는 사실과 한국에 와서 부정선거 음모론과 교회 탄압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직 ‘분노만으로 유권자를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서 그 말이 보수 세력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고 썼을까? 그렇진 않았을 것이다. 의도에 맞는 사실만 취합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찰리 커크에게서 제갈공명을 보았다면, 아전인수의 ‘확증편향’이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중증이라 할 것이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펜을 놓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 하겠다.
9월 8일자 칼럼에 앞서 게재한 8월 18일자 칼럼 ‘한국 左대통령이 미국 右대통령을 만날 때’에서 김 전 주필은 트럼프 대통령은 ‘지극히 미국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극우 대통령이고, 지금 전 세계를 관세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으면서 승승장구하고 있으며, 반(反)트럼프를 조금도 견뎌내지 못하는 독불장군이자 미국 MAGA(미국제일주의)의 수령’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그것이 그의 진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 눈에는 굴욕적인 친미주의자이고 맹목적인 동맹주의자인 김 전 주필이 ‘극우’, ‘수령’ 같은 험악한 표현을 써가며 트럼프 대통령을 무시무시한 존재로 돋을새김한 것은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좌파’ 이재명 대통령이 ‘우파’ 트럼프 대통령 앞에서 ‘삼전도의 굴욕’ 같은 봉변을 당하기를 은근히 바라는 기대감 때문이었겠지만, 어제는 트럼프 대통령을 ‘마가의 수령’이라고 혹평하더니 오늘은 트럼프 당선에 ‘1등 공신’이라는 찰리 커크를 제갈공명에 비유하며 떠받드는 행태가 자기가 쓴 칼럼에 자기가 침을 뱉는 것 같아 언론계 후배로서 눈 뜨고 보기가 민망하다.
김대중 전 주필의 칼럼은 한 글자도 맞는 게 없다. 한국의 보수·우파는 국민의 마음을 사는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는데, 지금의 국힘당은 말뚝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자만에 취한 영남의 웰빙 정당이고 국힘당 의원들은 국민의 마음은 안중에 없는 기득권 웰빙족이다. 관우, 장비로는 안 되고 제갈공명이 있어야 한다는데, 제갈공명이 돈만 많이 주면 어디든 가는 ‘장사꾼’ 책사이던가. 성질 급한 장비가 공명을 모욕한다며 무덤에서 박차고 나와 장팔사모 들고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총기 규제에 극렬하게 반대했던 32살 청년이 총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22살 청년에게 총기로 살해됐다는 게 아이러니이기도 하지만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주의 작동 원리가 적개심과 증오와 분노에 밀려 설 자리를 잃고 폭력이 일상화되는 혐오 사회를 예고하는 오멘(Omen, 징조) 같아서 불길하고 섬뜩하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무늬만 혐오일 뿐 혐오를 팔아 연명하는 선동 매체들로 인하여 민주주의가 위태롭다.
찰리 커크의 죽음을 애도한다. 혐오 권하는 사회에서는 모두가 잠재적인 피해자라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