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전후 김정은-트럼프 만날 가능성 높은 이유들
김정은 중국 방문, 트럼프와의 회담 준비일 수 있어
트럼프, 북한과 관계 개선 필요한 전략적 이유 많아
지난 9월 3일 중국의 전승절 기념식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깜짝 등장했다. 이전에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이 기념식에 직접 참석한 것은 1959년 김일성이 마지막이었다. 실로 66년 만에 이뤄진 이 참석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변화를 가늠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김정은은 왜 전격적으로 참석했을까? 일부에서는 중국의 경제적 도움이 필요해서일 것이라고 본다. 러-우 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은 러시아에 파병을 하고, 무기를 지원했다. 그 대가로 돈을 받았을 터이지만 러-우 전쟁이 머지않아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냥 러시아에 의존하기만 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므로, 이참에 중국과 경제협력을 가속화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풀이하는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과 시진핑의 회담에서 구체적 경제협력 계획이 논의됐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에서는 북한이 중국, 러시아와 연대해 미국에 대항하는 지정학적 블록을 만들려는 행보를 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번 기념식에서 김정은, 시진핑, 푸틴 3자간의 공동회담도 없었고, 반미 혹은 비서방 블록화를 지향한다는 선언도 없었다. 애초에 전승절 기념식은 다자외교 무대도 아니고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자리일 뿐이었다. 더구나 북한이 그런 블록 내에 갇히는 게 과연 이익인지 여부도 불확실하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그 어느 때보다 북한과 외교적 관계를 맺겠다고 나서고 있는데 굳이 미국에 대항하겠다는 메시지를 발신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는 아닐 것이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앞둔 5월29일 김정일 중국 방문
오히려 김정은의 이번 중국 방문은 트럼프와의 회담을 준비하는 사전 행보일 가능성이 높다. 과거 북한의 역사를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된다. 1992년 한중 수교는 북한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중국의 최대 배신행위였다. 그 후 북중관계는 사실상 파탄이었고, 고위급 인사 교류도 끊겼다. 그런데 집권 후 한 번도 중국을 방문한 적이 없던 김정일은 2000년 5월 29일 중국을 전격적으로 방문한다. 공교롭게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과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바로 앞둔 시점이었다. 그 해 10월 9일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에게 김정일의 친서를 전달했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2000년 10월23일 평양에 도착해 김정일과 회담했다. 북한은 껄끄러웠던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한국, 미국과 활발한 외교를 벌였던 것이다.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 앞둔 3월 김정은 중국방문, 6월엔 북미 정상회담
김정은 시대에도 역사는 반복됐다. 2012년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된 시진핑은 5년 동안 김정은을 한 번도 초청하지도 않고, 북한을 방문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을 초청하고, 한국을 방문했다.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되면 북한과 먼저 정상회담을 하던 관행을 무시한 것인데, 북중 간의 관계가 얼마나 나빴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김정은이 돌연 집권 후 처음으로 2018년 3월 25일 중국을 방문한다. 그리고 며칠 후인 3월 31일 북미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미 CIA 국장 마이크 폼페이오가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한다. 다음 달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을 한 김정은은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트럼프와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을 갖는다. 그러니까 김정은도 극도로 얼어붙었던 중국과의 관계를 얼마간 발전시킨 후 한국, 미국과 적극적 대화를 시작했던 것이다. 김정일, 김정은 두 북한 지도자의 행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국이나 미국과 관계개선을 시도하는 북한의 의도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중국과 적대적 긴장이 계속되는 상태에서 북한이 적극적으로 대외전략을 펼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김정은의 이번 전승절 기념식 참석은 특히 우선 미국과 대화를 하기 위한 사전준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부터 김정은 위원장과의 대화에 대해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일관되게 대화의지를 밝혀왔던 트럼프는 지난 8월 25일 이재명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도 다시 한번 그 의지를 뚜렷이 확인해줬다. 도대체 트럼프는 왜 이렇게 북한과의 대화에 집착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가 한반도 평화를 촉진해 노벨상을 받고 싶어서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강대국 대통령이 노벨상 때문에 중차대한 전략적 변화를 시도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트럼프와 미국에게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으로 얻을 전략적 이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트럼프가 김정은을 만나야 할 전략적 이유
첫째,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을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미 약 50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추가로 약 40개를 더 만들 수 있는 핵물질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100개 가까운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북한에 대한 외교적 관여를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할 경우 북한은 계속해서 핵무기를 늘릴 것이고 그 숫자가 약 300개 정도에 달하면 더 이상 북한에 대한 억제력이 작동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가능한 신속히 북핵 개발을 동결하는 것이 우리는 물론이고 미국에게도 이익이다. 더구나 북한은 이미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ICBM을 가지고 있다. 중국, 러시아에 이어 북한은 이미 미국에 대한 현실적 위협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적대적 대결을 지속한다면 미국에게도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 닥칠 수 있다. 이 점을 주목한 미국의 안보전문가들은 최근 북한에 대한 관여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둘째, 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의 지정학적 구상이다. 트럼프 제1기 정부 때나 바이든 정부 때 발표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에 의하면 중국은 사실상 미국의 유일한 전략적 경쟁국이다. 중국과의 경쟁에 이기는 것을 전략적 목표로 설정한 미국은 그 목표달성에 도움이 되는 국가들과는 우호적 관계를 맺으려 한다. 미국은 1차 냉전 시 주된 경쟁국이던 소련의 견제에 관해서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8년 싱가포르 회담 후 미국 전문가들은 북중 관계를 심층적으로 살펴 본 후 양국 간에 전략적 균열이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했다. 그래서 이들은 이 중대한 균열을 미국과 동맹국들이 중국을 견제하는 데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미 정부와 의회에 제안한다. 트럼프도 이 점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셋째, 미국은 그 동안 북한을 억제하는 데 투입된 군사력을 중국을 억제하는 데 활용하고 싶어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으로 더 이상 북한을 억제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지정학적 이유들로 인해서 트럼프는 김정은과 협상을 하고 싶어한다. 철저히 현실주의적 접근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가장 난관이던 북한의 비핵화 문제에 대해서도 트럼프 정부는 보다 현실적이고 유연한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트럼프는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임을 암시하는 발언을 했다. 비핵화 문제에 대해 미국과 북한이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한다면, 북미 정상회담의 가능성은 아주 높아진다. 북한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경제이다. 국제적으로 고립돼 여러 나라들과 정상적 경제관계를 맺지 못해왔던 북한은 미국과의 회담에서 제재완화 등 경제적 이익을 얻고 싶어 할 것이다.
지난 8월 25일 트럼프는 금년에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마침 그 만남이 성사될 기회가 다가 온다. 바로 올해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담이다. 트럼프가 경주에 오는 것은 거의 확실하므로 경우에 따라 트럼프는 APEC 회담 직전 혹은 직후에 평양 혹은 원산을 전격적으로 방문할 수도 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세계 언론의 주목을 집중하게 할 이 방문을 트럼프라면 감행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되면 한반도에는 한국 전쟁 정전 후 최대의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냉전적 대결 구도가 근본적으로 무너질 것이다.
북미관계와 한반도의 극적인 변화가 가능할지 여부는 두고 봐야 한다. 하지만 지정학적 현실을 바탕으로 전략적 이익을 도모하는 국제관계의 철칙을 고려하면, 한반도의 거대한 전환을 상상하는 것아 마냥 근거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거침없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필자 김동기는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무엇을 원하는가>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