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바 밀어낸 일본 자민당 '도로 아베당'으로?
차기 총재(=총리) 유력 후보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누가 되든 별로 바뀌지 않을 자민당과 일본정치
선거 연패는 이시바가 아닌 자민당 주류 탓
이시바 퇴진 압박이 커질수록 더 올라간 지지율
자민 최대문제 실패한 아베노믹스 ‘잃어버린 30년’
이시바 시게루 일본총리가 7일 결국 퇴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지난해 10월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이겨 총리가 된 지 약 1년만에 물러나는 것이다. <아사히신문>의 마쓰다 교헤이 정치부장 얘기대로 그는 “선거에서 졌기 때문이 아니라 당내 권력투쟁에서 졌기 때문에” 밀려났다.
이제 자민당은 10월 상순에 실시될 당 총재선거를 향해 달려갈 것이다. 지난해 10월 중의원 선거와 올해 7월의 참의원 선거, 그 전 6월의 도쿄도 의회 선거에서 모조리 연패해 중참 양원 소수 여당이 된 자민당 총재가 된다고 해서 바로 총리가 된다는 보장은 없으나, 지리멸렬한 야당에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자민당은 공명당을 비롯한 야당들과 연립해 정권을 유지할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 따라서 자민당 총재가 차기 총리가 될 가능성 또한 높다.
차기 총재(=총리) 유력 후보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차기 자민당 총재 및 총리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은 고이즈미 신지로(44) 농림수산상과 다카이치 사나에(64) 전 경제안전보장상 두 사람이다. 이들 외에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전보장상 등도 출마할 가능성이 있으나 지금 자민당 내 여론은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두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 두 사람 중에서도 고이즈미 쪽이 더 유력해 보인다. 참의원 선거 패배 뒤 50일 가까이 지나도록 이시바 퇴진과 그의 ‘속투’(續投, 계속 집권) 사이에서 갈등을 겪어 온 당 내분상태를 막판에 종식시키는 모양새를 만든 것은 고이즈미다. 그와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가 이시바 총리를 찾아가 사임을 건의하고 이시바가 이를 수용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시바는 얼마 전에 고이즈미의 아버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도 만났다.
고이즈미는 자민당 내 20, 30대 젊은 의원과 당원들로부터 60%의 지지를 받고 있다. ‘펀쿨색좌’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말 실수와 얕은 정치이력, 미덥지 못한 경륜 등으로 당 중노년층의 신임을 받진 못하고 있으나, 1년 전 총재선에서 3위를 했고, 최근 일본 ‘쌀 파동’ 때 농림수산상에 기용돼 문제 해소에 기여함으로써 지지기반을 상당히 회복했다. 다음 총선에서 자신들의 당락에 영향을 끼칠 쇄신 이미지의 ‘당의 얼굴’이 뽑히기를 바라는 젊은층은 고이즈미를 선호할 것이다.
다카이치는 지난 총재 선거 때 1차 투표에서 1위를 했으나 결선투표에서 이시바에게 졌을 정도로 자민당 내에 탄탄한 지지가반을 갖고 있다. ‘아베의 적자’로 불릴 정도로 자민당 내 보수우익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는 그의 정치성향은 ‘극우’에 가깝다. 여전히 자민당 주류파의 중심인 옛 아베 파벌과 아소 다로 파벌 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다카이치는 자민당이 불법 정치자금 문제 등 부패비리와 무능으로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진 상황에서 그 강점이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일본총리가 사실상 제1당의 당내 경선으로 결정되지 않고 일반 유권자들의 직접선거로 뽑는 체제라면 '위험한 극우' 이미지의 다카이치는 결선 무대에 올라가기 힙들 것이다. 그런 직선 구조라면, 지금 여론으로 봐서는 이시바가 압도적 다수로 당선될 것이다. 최근 일반여론 조사에서 이시바는 '차기 총리감'으로 다른 2위군 경쟁자들과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지지를 받았다.
일부 평론가들이 지적하듯이 자민당의 ‘암반 지지층’의 실체가 ‘우익 보수’가 아니라 ‘온건 보수’라면, 다카이치는 그 국수주의적 강경우익 면모 때문에 총재 선거에서 이기기 어려울 수 있다. 게다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의 선봉장 노릇을 하고 있는 다카이치가 자민당 총재가 되고 총리가 될 경우 입헌민주당 등 주요 야당은 물론 한국 중국 등 주변국과의 관계가 순조롭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고이즈미 역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왔지만, 총재, 총리가 된다면 직접 참배는 중단할 가능성이 있지만, 야스쿠니 참배가 자신의 정체성 및 정치지향, 당내 지지기반과 밀착돼 있는 다카이치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누가 되든 별로 바뀌지 않을 자민당과 일본정치
하지만 두 사람 중에 누가 총재, 총리가 되든 자민당과 일본정치는 거의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다수 일본 정치평론가들의 생각이다. 이번에도 유력 후보가 될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두 사람은 이미 1년 전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에게 패한 사람들이다.
당시 아베 신조에서 스가 요시히데, 기시다 후미오로 총재 얼굴을 바꾸면서 정권을 유지해 오던 자민당은 이베 생전에 터진 아베 파벌의 불법 정치자금 문제와 통일교와의 유착, 그리고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30년’으로 상징되는 대규모 금융완화와 제로금리 정책의 ‘아베노믹스’ 실패로 지지기반이 급속히 무너지고 있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자민당 주류세력은 비주류 소수파였던 이시바의 ‘쇄신’ 이미지를 활용하기 위해 그를 총재로 세워 총리자리도 고수했다.
일반적으로 선거에서 패배하면 정권이 교체되지만, 자민당 장기 일당지배가 계속되고 있는 일본에서는 정권이 자민당 내 이 파벌에서 저 파벌로 옮겨갈 뿐 자민당 집권은 계속된다. 일본이 변하지 않는 핵심 이유 중의 하나다.
선거 연패는 이시바가 아닌 자민당 주류 탓
그렇게 해서 일단 급한 위기는 모면했으나 총리 취임 8일 만에 중의원을 해산하고 치른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대패해, 하타 쓰토무 정권 이후 약 30년 만에 소수 여당으로 전락했다. 그 패배는 이시바의 자질이나 정책 때문이 아니라 자민당이 그를 앞세워 피해가려고 했던 불법 정치자금, 통일교와의 유착, 잃어버린 30년 등 자민당 보수주류의 실패 논란 때문이었다.
올해 7월 참의원 선거에서도 자민당은 대패했다. 자민당이 중참 양원에서 과반수 의석에 못 미치는 소수 여당으로 전락한 것은 1955년 자민당 창당 이래 처음이었다. 1993년에도 호소카와 모리히로 비자민당 연립내각에 정권을 넘겨 준 적이 있고, 2009년엔 민주당에게 정권을 빼앗긴 적이 있지만 양원 모두 과반 의석 아래로 내려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시바 탓이 아니다. 물론 이시바에게도 연패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고, '아베 이후'의 새로운 비전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한 한계도 있지만, 이시바를 당의 ‘새 얼굴’로 내세워 분위기를 바꾸고 장치경제적 쟁점을 흐려 정권을 유지하는 전략을 구사해 온 자민당 주류 다수파의 계산이 이시바란 새 얼굴로도 먹혀들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이시바 퇴진 압박이 커질수록 더 올라간 지지율
이시바 총리에 대한 지지율은 기묘하게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한 뒤 오히려 점점 높아졌다. 이시바 총리에 대한 지지율은 잠시 이시바에게 총재자리를 내줬던 자민당 주류파가 다시 그 자리를 되찾아 가기 위해 이시바 퇴진을 압박하면서 올라갔다. 압박 강도가 커지면 커질수록 점점 더 올라갔다. 8월 말 일본언론들의 여론조사에서 일반 유권자들의 63%가 이시바 속투 지지, 즉 총리 그만두면 안 된다고 응답했고, 특히 자민당 지지자들은 80% 이상이 이시바 퇴진에 반대했다. 유권자들과 자민당 지지자들 절대 다수가 일본 정치경제의 심각한 부진과 자민당 부패 무능이 이시바 때문이 아니라 이시바를 내쫓고 총재, 총리 자리를 탈환하려는 자민당 보수우익 주류 탓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권자들은 이시바를 밀어내고 그들이 다시 권좌를 차지할 경우 자민당은 ‘도로 아베당’이 되고 ‘잃어버린 30년’이 40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걱정하고 거부했다. 그럼에도 자민당 당내정치를 좌우하는 주류는 이시바 퇴진 공작을 밀어붙여 결국 그를 밀어냈다.
자민당 최대 문제는 실패한 아베노믹스 ‘잃어버린 30년’
예컨대 정치평론가 이토 아쓰오는 예전 아베파 실세 하기우다 고이치 전 정조회장의 경우 불법 정치자금 문제로 기소까지 된 사람인데 중참 양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연패하자 기다렸다는 듯 이시바 내쫓기에 앞장섰다며 비판했다. 하기우다는 자신의 블로그에다 “정치가의 진퇴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우리가 선배들로부터 이어받은 자민당의 긍지와 전통은 총리도 공유하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는 글을 올려 이시바 퇴진을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이토는 하기우다야말로 그런 말을 들어야 할 당사자인데 그럴 자격이 있느냐고 질타했다. 그는 유권자들이 자민당을 버리는 것은 바로 자민당 주류파들의 그런 자세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자민당은 (총재라는) 표지를 바꾸는 것 정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기적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자민당의 최대 문제는 ‘잃어버린 30년’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30년 간 자민당은 국민생활을 조금이라도 개선해 주려는 정책을 펼친 적이 있나? 그런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 아닌가? 세계 각국의 임금은 올라가는데 일본은 물가는 올라가지만 임금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해 실질임금은 내려가고 있다. 지금까지 디플레였음에도 어떻게든 어영부영 속여왔으나 급격한 물가인상으로 ‘일본이 이토록 살기 어려운 나라가 됐구나’하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고 본다.”
자민당이 선거에서 계속 지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인데, 옛 아베파를 중심으로 한 자민당 주류는 스스로를 바꾸려고 하기는커녕 자신들이 내세웠던 이시바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용도폐기한 뒤 총재와 총리 자리를 되찾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고, 그런 자민당에 유권자들 다수는 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수의 평론가들은 앞으로 등장할 자민당 총재와 총리들은 점점 더 열화(劣化. 수준이 떨어짐)하면서 짧은 임기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질 것이고, 그렇게 해서 몇 년만 더 지나면 자민당이 창당 이래 세 번째로 정권을 잃는 사태가 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자민당뿐만 아니라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 등 기성정당에게 문제해결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유권자들의 자각은 지난 참의원 선거에서 의석수를 크게 늘린 참정당과 국민민주당 등 극우 또는 우익성향의 정당 쪽으로 표가 크게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현상을 두고 독일 이탈리아를 비롯해 극우정당들이 선거에서 약진하거나 집권당이 되는 유럽과 같은 변화를 일본도 따라갈 것이라는 평론가들도 있다.
고이즈미가 되든 다카이치가 되든 일본정치, 나아가 ‘일본문제’를 지금의 자민당 체제로는 풀기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