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영국을 뒤흔든 존 로크의 위험한 생각들

왕권신수설에 정면 도전하는 사회계약론 주창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에게 "당신은 해고야"

교육혁신 이끈 '빈 서판론'…종교 관용론 주장

노동 통해 얻은 재산은 정당하다는 노동가치설

민주주의·인권·종교·사유재산권…현재 진행형

2025-08-10     김성수 시민기자

1632년 영국 서머셋주의 한적한 시골에서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라는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만약 당시 사람들이 이 평범해 보이는 아이가 훗날 영국사회를 뿌리째 흔들어놓을 '위험한' 생각들을 퍼뜨릴 인물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어땠을까? 왕들은 밤잠을 설쳤을 것이고, 귀족들은 재산정리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런던 국립 초상화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존 로크의 초상화(왼쪽)와 런던대학교에 있는 조각상. (위키피디아)

빈 서판론, "아, 우리가 바보였구나!"

로크의 첫 번째 폭탄은 바로 '빈 서판론(Tabula Rasa)'이었다. 이는 라틴어로 '백지상태'를 의미하며, 존 로크가 1689년에 출간한 〈인간 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로크는 인간의 마음이 태어날 때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빈 서판'과 같다고 주장했다. '빈 서판론'은 영어로는 'Blank Slate Theory' 또는 'Clean Slate Theory'라고도 부른다. 로크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피나 천한 혈통을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깨끗한 백지상태로 세상에 온다고 생각했다.

"잠깐, 그럼 우리 귀족들이 평민보다 우월한 건 하늘이 정해준 게 아니라고?"

당시 귀족들의 당황스러운 표정이 눈에 선하다. 수백 년간 "우리는 태생부터 다르다"며 으스대던 그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로크는 웃으며 말했을 것이다.

"네, 맞습니다. 여러분도 태어날 때는 그냥 울기만 하는 아기였어요."

이 이론은 영국 교육계에 혁신을 가져왔다. 더 이상 '넌 태생이 그러니까'라는 말로 아이들의 가능성을 짓밟을 수 없게 됐다. 물론 일부 고집 센 교사들은 여전히 "이 아이는 원래 머리가 나쁘다"고 중얼거렸지만, 그런 말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갔다.

사회계약론, 왕도 월급쟁이다?

로크의 두 번째 폭탄은 더욱 강력했다. 정부는 국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고용한' 기관이라는 주장이다. 즉, 왕이나 정부 관리들은 국민이 세금으로 월급을 주는 '공무원'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뭐라고? 신이 내려주신 왕권이 사실은 국민들의 세금 받아가는 월급쟁이 자리였다고?"

찰스 2세(1630~1685)와 제임스 2세(1633~1701)는 이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특히 제임스 2세는 로크의 이론이 현실이 되는 것을 몸소 체험해야 했다. 1688년 명예혁명 때 국민들은 "당신 해고요!"라며 그를 쫓아냈다. 로크의 주장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였던 셈이다.

 

존 로크의 정치에 관한 명저인 '정부론 2권'의 표지. (위키피디아)

종교관용론, "믿음도 자유시장 경제?"

로크는 종교문제에서도 혁신적이었다. "종교도 자유선택의 영역"이라며 관용을 주장했다. 당시 영국은 가톨릭이냐 개신교냐를 두고 피 터지게 싸우던 시절이었는데, 로크는 "믿고 싶은 거 믿으면 되지, 뭘 그렇게 싸우냐"는 식으로 접근했다.

물론 그도 완전히 관대하지는 않았다. 가톨릭 신자들과 무신론자들은 여전히 견제대상이었다. "아, 그래도 선은 그어야지"라는 17세기식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생각이었다.

소유권 이론, "내가 땀 흘린 만큼은 내 거!"

로크는 재산권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노동을 통해 얻은 것은 정당한 소유라는 '노동가치설'이었다. 이는 "땅은 원래 왕 것"이라던 기존관념을 뒤집어버렸다.

"잠깐, 그럼 내가 개간한 땅은 내 것이라고?"

농민들의 눈이 반짝였을 것이다. 물론 로크도 '적당히 하라'는 단서를 달았다. 썩힐 만큼 독점하지 말고, 다른 사람 몫도 남겨두라고 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혼자 다 먹으면 안 된다'는 얘기다.

로크의 유산, 영국을 바꾼 '위험한' 사상들

로크의 사상은 영국사회 곳곳에 스며들었다. 1688년 명예혁명은 그의 이론을 실현한 역사적 사건이었고, 이후 영국은 입헌군주제의 모범사례가 되었다. 왕은 여전히 있지만 이제는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마치 회사의 명예회장 같은 역할이다.

교육 분야에서도 로크의 영향은 컸다. '모든 아이는 가능성이 있다'는 그의 주장은 공교육 확산의 이론적 바탕이 됐다. 물론 여전히 계급사회였지만, 적어도 '노력하면 된다'는 희망은 생겼다. 종교관용 정신이 점차 확산되면서 영국은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종교갈등이 적은 나라가 됐다. 물론 아일랜드 문제 같은 예외는 있었다.

21세기에서 바라본 로크, 여전히 현재진행형

300년이 지난 지금, 로크의 생각들은 어떨까? 놀랍게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민주주의, 인권, 종교의 자유, 사유재산권 같은 개념들은 모두 로크의 DNA를 가지고 있다.

물론 그의 이론에도 한계는 있었다. 여성과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 식민지정책에 대한 정당화 등은 당시의 한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던진 '권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정부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옥스퍼드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Christ Church) 대성당 바닥에 설치된 존 로크 기념 명판과 본인의 서명. (위키피디아)

시골의사의 아들이 세상을 바꾸다

결국 존 로크는 17세기 영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 중 하나였다. 기존질서를 의심하고,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것들에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의 책들이 금서가 되고, 본인이 해외로 망명을 가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가 꿈꾸던 사회, 즉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고, 정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며, 능력에 따라 성공할 수 있는 사회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실현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 - 선거권, 사유재산권, 종교의 자유, 교육받을 권리 등등 - 이 모든 것의 뿌리에는 300년 전 한 시골의사의 아들이 던진 '위험한' 질문들이 있었다.

그러니 가끔 당연한 것들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어쩌면 그 사람이 이 시대의 존 로크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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