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소야대 정국에서도 대통령은 제왕적인가?
제왕적 대통령제를 떠받치는 '아홉 개의 기둥'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3일 취임 30일 기념 첫 기자회견에서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용어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여소야대 국회를 만나면 대통령이 힘이 없지 않냐”고 반문하며 이 용어가 현실에 들어맞는 표현이 아닐 수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대통령이 권력을 남용하지 않으면 지금의 대통령제도 특별히 제왕적이지 않고 여소야대 정국에서는 그나마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드러낸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대통령의 권력이 견제 받지 않는 제왕적 권력인지, 나아가서 그 권력이 국회의 여대야소나 여소야대 구조에 따라 본질적으로 달라지는지, 아니면 그 이면에 더 깊은 구조적 토대가 있는지 성찰할 필요를 느낀다.
대통령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이 단순히 수사적 비판인지, 아니면 우리 헌정체제에 깊이 뿌리내린 구조적 현실인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권력이 과연 어디서 나오는지, 그 막강한 권력을 떠받치는 기둥들은 무엇인지 해부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대통령제는 최소 아홉 개의 구조적 기둥 위에 세워진 견고한 제국의 성채와 같다.
첫 번째 기둥은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과도한 고유 권한이다. 한국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과 달리 직접 법률안을 제출하고 법률과 같은 효력을 갖는 비상재정경제명령을 내릴 수 있다. 또한 내각과 행정기관의 고위직 대부분을 국회의 동의 없이, 심지어는 인사청문회도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임명하는 막강한 인사권을 갖는다. 미국 대통령과 달리 감사원도 대통령 소속으로 거느린다.
두 번째 기둥은 대통령을 정치적 책임의 전선에서 보호하는 국무총리라는 방패의 존재다. 국정실패의 책임은 총리가 대신 지고 야당의 날 선 비판에 답변하는 것도 총리의 몫이다. 의전, 대독, 방탄 총리의 존재는 대통령을 제왕적 지위로 격상시키는 헌법장치 중 하나다.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통해 국정을 장악하면서도 의전과 권위의 장막 뒤에서 마치 초당파적 존재인 양 머무를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대통령의 영향력은 위의 강력한 권한을 바탕으로 국가의 핵심기구들로 뻗어나간다. 세 번째 기둥은 군, 검찰, 경찰, 국정원 등 이른바 권력기관에 대한 독점적 통제권이다. 대통령이 이 기관들의 수장을 자신의 충성스러운 인물로 임명함으로써 국가의 물리력과 정보력은 정권의 사유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다. 권력기관장 임명에 국회의 동의가 요구되지 않고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외부견제기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기둥은 사법부에 대한 실질적 영향력이다.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발탁해서 임명하는데 대법원장은 대법관과 법원장 등 모든 법관의 인사권을 보유한다는 점에서 세계에 유례없는 제왕적 대법원장이다. 이는 정권의 명운이 걸린 사건에서 사법부 전체가 대법원장의 의중을 살피게 만드는 구조적 압력으로 작용하며 저울추가 대법원장 배후의 대통령으로 기울게 만든다. 뒤에서 보겠지만 대통령의 영향력은 헌법재판소 구성도 좌우한다.
다섯 번째 기둥은 입법부의 내부로부터 약체화다. 대통령은 여당의 수석당원이자 최고지도자로서 여당정치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다. 인기 있는 대통령은 본인과 친소관계에 따라 국회의원이나 지자체장의 공천과 재선 여부를 결정한다. 게다가 대통령은 국회법에 따라 현역 국회의원을 국무위원(장관)으로 임명할 수 있다. 이는 삼권분립의 근간을 흔들며 제왕적 대통령으로 치닫게 하는 아주 교묘한 장치다. 장관직을 꿈꾸는 여당 중진의원들은 대통령에게 쓴 소리를 하기는커녕 충성을 경쟁하게 되고 국민의 대표여야 할 입법부는 행정부의 하부기관처럼 길들여진다.
여섯 번째 기둥은 헌법재판소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독립적인 감시 기구의 중립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3권 분립주의에 조응하는 이른바 3부 구성주의라는 미명 아래 대통령, 국회, 대법원장이 각각 1/3씩 위원 구성권을 갖지만 현실적으로는 국회 몫 가운데 여당 몫과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 몫도 모두 대통령의 우호세력이기 때문에 이들 기관은 권력의 파수꾼이 아닌 정권의 보호자로 전락하기 쉽다. 정권편향성은 상대적으로 짧은 임기(3년)를 가진 국가인권위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일곱 번째 기둥은 방대한 대통령실을 통한 내각의 무력화 및 공공기관 인사 집중관리이고, 여덟 번째는 KBS, MBC 등 공영방송의 지배구조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비판적 목소리를 억압하는 언론 장악이다. 마지막 아홉 번째 기둥은 KT, 포스코, 국민은행 등 정부지분이 상당 수준에 달하는 민간 대기업의 경영진 구성에까지 미치는 사실상의 영향력이다. 대통령의 결심에 따라 제거할 수 있는 권력 기둥은 사실상 권력남용에 해당하는 위의 세 개밖에 없다. 나머지 6개의 기둥은 헌법과 법률로 보장된다. 개헌과 개혁입법이 없이는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막강한 권한은 이재명 대통령의 질문처럼 ‘여소야대’ 국회를 만나면 힘을 잃는가? 제왕적 대통령을 떠받치는 9개의 기둥 중 과연 몇 개가 무너지는지 살펴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야당이 다수를 점한 국회에 의해 직접적으로 약화되는 기둥은 단 하나뿐이다. 바로 여당을 입법부의 고무도장처럼 활용하여 법률안을 일사천리로 통과시키는 능력이다. 물론 국회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고 입법이 막히는 상황은 대통령에게 큰 답답함과 무력감을 안겨주는 것이 사실이다.
본인의 국정실패로 중간총선에서 패배해서 사실상 불신임을 당해도 대통령을 떠받치는 나머지 8개의 기둥은 여전히 굳건하다.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의 수장에 대한 임명권은 대통령에게 있으며, 사법부와 독립기구, 공공부문과 언론에 대한 영향력 또한 국회의 구성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적다. 전임 윤석열 대통령이 보여준 비상계엄 선포 시도에서 알 수 있듯이 대통령은 여전히 정국주도권을 쥐고 심지어 위기까지 조작해낼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여소야대 국면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의 일부를 제약하는 ‘불편한 동거’ 상태에 가깝다. 대통령은 야당의 폭주와 국정마비를 개탄하는 대신 건재한 8개의 권력 기둥을 바탕으로 강력한 정책 이니셔티브를 쥐고 국정을 주도해나갈 힘을 여전히 갖는다. 다만 야당과 조정과 타협, 일정한 양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사실이 달라질 뿐이다.
견제 받지 않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에 대한 진정한 해법은 여소야대 국회라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정치지형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국회추천 책임총리제나 4년 중임 대통령제 같은 피상적인 처방으로도 부족하다. 제왕적 권력을 떠받치는 나머지 기둥들을 외면한 채, 특히 선거제 개혁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이, 이러한 주장만 되풀이하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무책임한 구호로 보아도 무방하다.
근본적인 해법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구성하는 9개의 기둥 자체를 해체하는 구조적인 헌법 개혁에 있다. 권력기관의 장이나 중립기관의 장에 대한 대통령의 인사권을 국회의 가중다수결로 통제하고, 주권자인 국민이 정치권이 외면해온 중요한 법안을 직접 발의하고 정부여당이 통과시킨 나쁜 법을 거부하며 못된 공직자를 소환, 파면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대통령의 권력은 견고한 견제와 균형 시스템 속에서 국민으로부터 얻는 신뢰에서 나와야 한다. 그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제왕의 나라가 아닌 진정한 공화국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