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의 외침 "피를 고집하는 정의, 진실일 수 없다"

프로크루스테스 신화 방불케 하는 폭력 난무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처형' 가자서 재현

이스라엘의 폭력, 나치의 만행과 다를 바 없어

베르디의 '레퀴엠' 통해 듣는 피해자의 절규

2025-06-26     한형철 시민기자 (오페라해설가)

지나가는 행인을 잡아 억지로 자신의 침대에 눕혀, 행인의 키가 길면 잘라내고 짧으면 침대에 맞추어 늘려 죽인 도적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가 그리스 신화에 나온다. 그는 자신의 억지 기준을 내세워 상대를 폭력으로 제거함으로써, 자신 위주의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이 신화는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정의의 이름을 가장한 폭력'의 상징이다. 바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전쟁이다. 이스라엘은 과거 유대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역사의 피해자였다. 아우슈비츠, 다하우, 테레지엔슈타트 등 우리는 그 모든 상처를 기억하고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왔다. 하지만 지금 이스라엘의 강경파는 과거의 고통을 새로운 폭력의 명분으로 삼고 있다.

핵시설을 매개로 한 이란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휴전에 들어갔다. 정말 다행스럽지만, 가자지구에서는 여전히 매일 수십 명의 희생자가 보고된다. 이스라엘이 자행하는 폭격과 봉쇄는 '안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지만, 그 피해는 무고한 민간인에게 돌아간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 아이들과 여성, 식량을 기다리던 평범한 사람들이 미사일에 쓰러진다.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억지로 맞춰진 것처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폭력 앞에 존엄을 잃어 가고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다수가 소수를 억누르면 안 되는 것은, 소수가 다수를 강제하면 안 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며 다수(강자)의 횡포를 경고했다. 폭력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해서,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 어떤 논리도 무고한 생명을 향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 우리는 나치의 만행을 반대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이스라엘의 폭력을 결단코 멈추게 해야 한다.

 

  ‘1808년 5월 3일의 처형’(1814), 프란시스코 고야

프란치스코 고야의 명작 '1808년 5월 3일의 처형'(1814)은 스페인에서 프랑스 군에 의해 총살당하는 민간인의 모습을 담았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인간의 의지가 서린 남자가 손을 들었고, 맨 뒤에 공포와 절망에 빠진 채 아이를 안고 그림자처럼 쭈그린 여인의 모습이 있다. 이 희미한 비탄의 모습에서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피에타’의 처연함과 흐느낌이 연상된다. 이런 장면은 오늘날 가자지구의 풍경과 너무도 닮아 있다.

부디 프로크루스테스의 칼을 내려놓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아우슈비츠의 경고 앞에 겸허하게 서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는 침묵하지 않기를. 

베르디의 《레퀴엠》 중 '진노의 날'을 통해 피해자의 절규에 더 깊이 귀 기울이자. 신의 심판이 몰아치는 날, 우리가 외면한 진실과 마주하게 되리라.

 

관련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