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메두사 앞으로 노동자 밀어넣는 SPC

빵 얻으려다 빵기계에 끼어 죽는 참담함

자신의 욕망 성취 위해 타인의 희생 강요

노동자 안전 담보 삼으면 면죄부는 없다

오페라 〈 돈 조반니〉 의 경고를 들어보라

2025-05-27     한형철 시민기자(오페라해설가)

고대 세리포스의 왕 폴리덱테스는 야망에 눈이 먼 자이다. 폴리덱테스는 아름다운 다나에를 소유하려 애쓰다가 그녀의 아들 페르세우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긴다. 다른 여인과 결혼하면서 폴리덱테스는 페르세우스에게 결혼 선물로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강요해, 그를 죽음의 문으로 몰아넣으려 했다. 메두사의 눈빛에 닿는 순간 모든 이들은 돌이 되는 저주에 걸린다. 폴리덱테스는 자신의 권력으로, 젊은 청년을 그 죽음의 공포에 빠뜨렸다. 그에게 중요한 건 정의도 생명도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것뿐.

 

  ‘메두사’(1618), 페테로 파울 루벤스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타인을 공포와 죽음으로 몰아넣는 비극을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다. 2022년 이후 거의 매년, SPC 계열사의 제빵 공장에서 노동자가 잇따라 사망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반복된 기계 고장, 부실한 안전조치, 그리고 방치된 노동환경의 희생자들이다. 먹고 살기 위해 빵을 만드는 일을 하는데, 빵을 만들다가 죽어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SPC 경영진은 ‘재발 방지 약속’이라는 공허한 선언을 반복할 뿐이다. 공포의 메두사 앞에 노동자를 몰아넣는 경영진은 지금 폴리덱테스의 욕망에 빠진 것 아닌가? 

우리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윤을 추구하고, 성장을 도모하며, 세계로 뻗는 기업의 노력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의 생명, 한 노동자의 안전을 담보로 삼는다면 그 무엇도 면죄부가 될 수 없다.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1545~1554), 벤베누로 첼리니   사진=한형철 시민기자

페르세우스는 신들의 도움으로 메두사의 목을 자르고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현실 속 노동자에겐 아테나도, 헤르메스도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초월적 구원이 아니라 현실적 보호, 법과 제도, 그리고 책임 있는 기업 경영이다.

SPC 경영진에게 묻는다. 언제까지 노동자를 공포스런 메두사 눈앞에 밀어 넣을 것인가? 얼마나 더 희생되어야 그 탐욕을 멈출 것인가? 

중대재해처벌법은 노동자에게 구원의 신 아테나이자 헤르메스가 되어 주고, 진솔한 실천을 담보하여야 한다. 노동자의 삶은 빵보다 가볍지 않다. 어떤 이의 생명도 이윤의 반죽에 묻혀선 안 된다. 

이제, SPC가 그 질문에 답할 시간이다.

 

탐욕스런 기업의 무책임과 탐욕에 맞서, 정의를 수호하려는 굳건한 의지와 공감이 필요하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에서, 사랑하는 이를 위로하고자 연인을 울게 만든 자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오타비오의 아리아 ‘나의 보배여’를 같이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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