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역사적 데탕트는 '셰셰'에서 움튼다
이재명 발언에 대한 후보 토론회 비난은 부당
감사 인사도 정책 제안도 아닌 고도의 외교술
미·중 데탕트도 닉슨-마오 간의 덕담으로 시작
닉슨에게 철학자 칭송 들은 마오 과도한 화답
외교에는 '땡큐' '스파시바' '아리가토'도 필요
70, 80년대를 풍미한 홍콩 쿵후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자주 나왔다. 폭포수 아래서 무술을 연마해 온 검객이 하산해 마을의 한 반점(飯店)을 찾는다. 식탁에 앉아 말없이 독주 한 잔을 들이켠다. 그때 동네 왈짜패가 소란을 피우며 처음 보는 검객에게 시비를 건다. 검객은 순식간에 이들을 제압한다. 대개는 칼을 뽑을 만한 상대가 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칼 대신 식탁의 젓가락만으로 한 무리를 쓰러뜨린다.
양아치들이 도망가거나 땅에 나뒹굴면 그동안 한이 맺혔던 반점 주인과 종업원들이 숨어 있다가 뛰어나와 눈물을 글썽이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두 손을 모으고 고개 또 허리를 거듭 숙이면서 셰셰를 연발한다. 이때 셰셰는 강한 자가 베푼 은혜에 대한 약한 자의 감사 표시이다.
셰셰가 이번 대선 정국에서 외교, 안보 논쟁을 불러왔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를 친중주의자로 도색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그는 2024년 3월 이렇게 말했다. “왜 중국을 집적거려요. 그냥 셰셰, 대만에도 셰셰, 이러면 되지. 중국과 대만 국내 문제가 어떻게 되든 우리가 뭔 상관 있어요?”
중국에 과도하게 시비를 걸어서 불쾌한 상황을 만들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극도로 민감한 양안 문제이니만큼 '기존 질서를 존중한다'는 외교적 수사로 '우아하게 한마디 하고 넘어가면 된다'는 제안이다. 이재명 후보의 발언에 대해 친중 편향, 굴종 외교, 안보 위협 등의 비난이 제기됐지만, 그는 사과나 수정을 하지 않았다.
이재명 후보의 경쟁 상대들은 지난 18일 열린 첫 티브이 토론에서 셰셰 발언을 문제 삼았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는 “이재명 후보께서 중국과 대만에 관여하지 말고 모두 셰셰 하면 된다고 해서 비난을 받았는데 너무 친중국적 입장 아니냐”며 공격했다. 그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과 북한이 싸우면 어떠냐’는 식으로 나오면 곤란한 게 아니냐”며 이재명 후보의 과거 발언이 안보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도 비슷한 공격을 했다. 이 후보의 셰셰 발언을 한미 동맹 약화와 동일시했다. 비유하자면 중국에 'Thank You'를 외치다 미국으로부터 한국은 'No Thank You'라는 반응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다.
외교사의 관점에서 이재명 후보의 셰셰 발언은 새로운 정책 제안이 아니다. 무술 영화에 나오는 눈물 젖은, 시혜에 대한 감사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50년 전 이미 문서화된 양안(兩岸) 문제에 대한 국제 사회의 원칙이다. 외교사에서는 이를 '우아하게' 데탕트(Détente)라 부른다. 공존이란 뜻이다. 대척, 대립, 대결 구도 안에서도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익의 접합점을 찾는 고도의 외교술이다.
데탕트의 가장 상징적 장면은 1972년 2월 21일에 있었던 중국의 마오쩌둥과 미국의 리처드 닉슨이 나눈 악수다. 두 나라는 한국 전쟁에서 원수였다. 한국전의 미군 전사자는 3600여 명. 부상자가 10만 명에 실종자는 8000명이다. 대다수가 중국의 개입으로 전쟁이 길어지면서 발생한 피해다. 중국 피해는 공식적으로 사상자와 실종자를 합쳐 39만 명이다. 하지만 중국 밖의 전문가들은 중국군 피해를 10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두 나라는 당시 진행 중이던 베트남 전쟁에서도 원수였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은 중국의 지원에 의존해 전쟁을 이어갔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직접 총을 들고 싸웠다. 베트남 전쟁 확전의 주역 린든 비 존슨 대통령은 중국을 막기 위해 베트남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닉슨과 마오쩌둥이 손을 맞잡았을 즈음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 전사자 수는 4만 5000명을 넘었다.
이런 원수의 나라 최고 지도자들이 만나 웃고 덕담을 주고받았다. 믿기 어려운 대화가 오갔다. 지금 읽어도 비상식의 극치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닉슨과 그의 안보 보좌관 헨리 키신저의 발언들을 소개한다. 이들은 데탕트가 무엇인지 알게 해 준다.
닉슨은 마오쩌둥의 시와 연설문을 읽고 나서 그가 전문적인 철학자인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I have read the Chairman's poems and speeches, and I knew he was a professional philosopher.”) 참고로, 닉슨이 지나쳤다 싶었는지 중국 측이 웃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옆에 있던 키신저는 자신이 하버드에서 강의할 때, 마오쩌둥 선집을 과제물로 사용했다며 거들었다. (“I used to assign the Chairman's collective writings to my classes at Harvard.”) 진위는 알 수 없다.
마오쩌둥이 자신의 글은 별것 아니다 (“Those writings of mine aren't anything”)라고 하자, 닉슨은 외교사에서 나올 수 없는 11개 단어로 된 화답을 했다. “주석의 글은 나라를 감동시켰고, 세상을 바꾸었다. (The Chairman's writings moved a nation and have changed the world.)” 정확한 수치가 불가능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마오쩌둥 통치 하에서 최고 5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멈출 줄 모르는 투쟁성 때문에 중국은 피를 흘렸고 세상은 소란했다'가 더 솔직하고 정확한 말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만나고 있는 순간에도 문화혁명은 진행되고 있었다.
이어 진한 농담이 오갔다. 소문난 키신저의 여성 편력이 화제가 됐다. 닉슨은 키신저가 비밀 외교의 달인이라면서 그의 행적을 몇몇 아름다운 여성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키신저는 그 아름다운 여성들은 비밀 외교의 가림막이라 했다. 닉슨이 대통령인 자신은 절대로 미모의 여성들을 앞세울 수 없다고 하자 동석한 자기 절제의 화신 저우언라이 총리가 받아쳤다. 미국의 대선 기간에는 절대 그래서 안 된다며 섹스 스캔들을 떠올리게 하는 농담을 던졌다.
농담 같은 진담도 오갔다. 좌파는 행동보다는 생각과 말이 많고, 소련 쪽으로 경도 되어 있다고, 중국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비췄다. 세계 최대 공산 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의 입에서 믿기 어려운 한마디가 나왔다. “나는 우파를 좋아한다. (I like rightists.)”
한 시간가량 이어진 닉슨-마오쩌둥 대화의 요점은 '있는 그대로 공존하면서 관계 개선과 역사 변화의 길을 찾자'였다. 닉슨이 먼저 자기 생각을 전했다.
역사가 중국과 미국을 이번에 만나게 했다. 양국이 서로 다른 생각과 이해관계를 갖고 있음에도, 현실에 발을 딛고 앞으로 두 나라는 물론 전 세계에 도움이 될 획기적인 진전을 이룰 수 있을지 세상은 주목하고 있다.
닉슨 자신은 이를 위해 주변의 불평, 반대,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왔다고 했다. 닉슨 발언의 방점은 '현실에 발을 딛고'에 찍혀 있다. 외교가 추상적 이념에 얽매이면 '진전'을 향한 방향성을 잃는다.
마오쩌둥도 미래를 위한 방향성을 강조했다.
중미 관계 개선 시도가 처음에는 실패할 수 있다. 이 경우 유일한 이유는 길을 잘못 들어서일 것이라고 했다. (“The only reason would be that we have taken the wrong road.”)
제대로 방향을 잡으려면 구체적 사안에 줄줄이 합의할 것이 아니라 상호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마오쩌둥이 닉슨에게 청을 하나 했다. 자신은 미국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다. 미국 역사와 지리를 자신에게 가르쳐줄 선생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I don't know much about the United States. I must ask you to send some teachers here, mainly teachers of history and geography.)” 진정한 공존을 위해서는 미국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데탕트의 기본은 마오쩌둥의 표현대로 '대화 (talk)'이다. '합의(agreement)'는 그 뒤에 온다. 더불어 대화 상대의 과거와 전력이 전제 조건이 아니다. 전력으로 따지면 마오쩌둥과 닉슨은 덕담과 농담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었다. 닉슨은 반공주의자로 정치적 입지를 굳힌 인물이다. 정적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힘든 선거판을 뒤집는 데 탁월했다. 그가 정치인으로 입문한 1946년 캘리포니아 제 12구 연방 하원 선거에서 정치 초년생 닉슨은 공산주의자들이 노조를 통해 상대방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냉전 초기 닉슨은 반공을 내세워 유권자에게 어필하는 데 성공했고 상대인 5선의 제리 부히스 (Jerry Voorhis) 의원은 무너졌다.
1948년 초선 의원 닉슨이 미국 미디어의 전면에 등장했다. 아이비리그 출신 변호사로 전형적인 미 동부 지역 엘리트 사회의 일원이었던 전 국무성 고위 관리 앨저 히스 (Alger Hiss) 등의 엘리트들이 워싱턴과 미국을 움직인다는 소리를 들었다. 히스가 공산주의자 색출과 축출에 앞장선 닉슨의 그물에 걸려들었다. 히스가 공산주의자로 과거 소련의 스파이였다는 의혹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하원 비(非)미활동 조사위원회(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위원으로 닉슨은 히스가 위증죄로 기소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유명세를 탄 닉슨은 1950년 한국전쟁 중에 치러진 캘리포니아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됐다.
그는 상대인 민주당의 여성 후보 헬렌 더글러스 (Helen Douglas) 하원의원에게 자신의 특기인 좌파 프레임을 씌웠다. 닉슨 캠페인은 기발했다. 경쟁 후보를 공산주의 동조자로 비난하는 네거티브 전단을 분홍빛 종이에 인쇄했다. 닉슨은 상원에 당선됐고, 2년 뒤 대선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공화당 후보의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60년 선거에서 존 케네디에게 패했지만, 68년 대통령에 당선되고 72년 재선에 성공한 직후 그는 베이징으로 달려왔다. 이 여정에서 닉슨은 반공 사상과 정책을 포기한 일이 없다.
이런 닉슨이 마오쩌둥에게 중국을 움직이고 세상을 변화시켰다고 했다. 말은 맞다. 마오쩌둥은 글자 몇 개로 나라와 세상을 뒤흔들고 혼란스럽게 하는 특출한 재주가 있었다. 언어의 마술사란 평도 들었다. 중국 혁명에 대한 그의 수 많은 테제도 몇 줄로 요약할 수 있다.
마오쩌둥 사상의 토대는 투쟁성이다.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槍桿子裡面出政權)'로 시작한다. 혁명은 권력을 잡기 위한 무력 투쟁이다. 정치 활동, 문화 변화, 사상 개조 등에도 혁명성이 있지만, 적을 무찔러야 한다. 그래서 총이 필요하고 총의 사용은 전략적이어야 한다. 중국 혁명과 같이 압도적 힘을 구사하는 적을 상대해야 하는 무력 투쟁에서는 나의 작은 힘의 효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이 필수이다. 적이 달려들면 나는 물러나고, 적이 정지상태면 교란작전으로 대응하고, 적이 지친 기색이면 공격하고, 후퇴하면 추격하라 했다. (敵進我退 敵駐我擾 敵疲我打 敵退我追)
이 무력 투쟁 과정에서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사상이 있다. 사상은 전략 위에 존재한다. 홍군과 인민은 고기와 물, 나눌 수 없다 (魚水不能分離). 급소를 찌르는 언어로 마오쩌둥은 공산 혁명에 성공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후 마오쩌둥의 언어의 파괴력은 늘어갔다. 조선을 도와 미국에 대항해서 집을 지키고 나라를 보위하자(抗美援朝 保家衛國)고 했다. 약 300만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투입됐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5년. 대약진운동이 시작됐다. 제일 유명한 구호는 아홉 자다. 철 생산량을 기준으로 7년 안에 영국을 초월하고,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겠다(七年超英 十五年赶美)는 마오쩌둥의 외침이 일상의 생활 패턴을 하루아침에 바꾸었다. 토법고로에서 농기구 식기구를 녹여 쓸모도 없는 철 덩어리를 만들어내고 이를 혁명적 전진이라 했다. 시간과 노동 낭비에 강요된 공동생활이 합쳐져 생산은 떨어지고 아사자가 늘어났다. 굶어 죽지 않으려고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대약진운동 때 이런 일도 있었다. 마오쩌둥이 물었다. 참새는 나쁜 새다. 없앨 수는 없는가?(麻雀是害鳥,能不能消滅它們?) 이 짧은 한마디로 중국인의 삶이 혼란 속에 빠졌다. 참새, 쥐, 모기, 파리를 박멸하자니 자연 생태계가 파괴됐다. 농사에 실패하니 기근이 계속되고 아사자가 늘어났다.
대약진 운동을 뒤따른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은 사령부를 폭파해 깨부수라(炮打司令部)고 했다. 이 다섯 글자로 당 중앙을 반혁명, 우파 세력으로 규정해 홍위병의 투쟁을 독려했고 문화혁명이 본격화됐다. 그가 직접 만들지는 않았지만, 마오쩌둥은 "모든 반항과 반란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造反有理)"는 홍위병들의 외침에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인 160만 명이 문혁의 광기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닉슨으로부터 철학자란 칭송을 듣고 난 마오쩌둥은 역시 황당하게 들리는 화답을 했다. 닉슨이 승리한 1971년 미국 대선에서 “당신에게 표를 던졌다(I voted for you)”고 했다. 우파가 득세하면 자신은 상대적으로 더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이보다 더 닉슨을 치켜세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념의 늪에 빠지지 말고 실사구시 하자는 의미로도 읽힌다.
1972년 중미 데탕트의 화룡점정은 상하이 코뮤니케다. 이 성명에서 마오쩌둥의 선 (先)방향, 후(後)협력 또는 선철학, 후정책의 등식을 만난다. 상하이 코뮤니케가 제시하는 중미관계의 방향은 서로 다름의 인정이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는 사회체제와 대외정책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하지만 사회체제에 상관없이 “제 국가가 모든 국가의 주권·영토보전에 대한 존중, 타국에 대한 불가침, 타국 내정에의 불간섭, 평등·호혜 및 평화공존의 제 원칙에 입각하여 그들의 관계를 수행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이를 기반으로 중국과 미국은 국제 분규는 무력행사나 무력의 위협 없이 상호 관계를 형성키로 했다. 이 조항이 이재명 후보가 말한 '우아한 한마디'이다.
양안 문제도 세련되게 정리했다. “미국은 대만해협 양측에 있는 모든 중국인들이 중국은 하나밖에 없으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고 하는 주장을 인지한다. 미국은 이같은 입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미국은 중국인들 자신에 의한 대만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미국의 이해관계를 재확인한다. 이 같은 전망을 염두에 두고 미국은 대만으로부터 모든 미군 및 군사시설을 철수시키는 궁극적 목적을 긍정한다. 미국은 그러는 동안에 대만지역의 긴장이 감소되는 대로 대만에 있는 미군과 군사시선들을 점진적으로 감축시킬 것이다." (UPI동양 번역 인용) 어느 쪽에서 들어도 거북하지 않다.
협상은 'negotiation'이다. 라틴어 어원은 negare otium이다. Negare는 부정,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otium은 한가함이다. 좋은 협상을 위해서는 한 곳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바빠야 한다.
한국의 외교 안보에서 제일 게으른 태도는 한미 동맹에 얹혀사는 일이다. 미국의 외교, 군사 어젠다를 한국의 정책기조로 받아들이면 편하고 한가할 수도 있다. 큰 나무 그늘에 있으면 낮잠이 잘 온다. 그러나 한국은 안보와 관련해서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을 상대해야 한다.
이재명 후보는 외교, 안보, 군사 문제에서 한미 동맹은 '기본축'이고 '한미일 안보 협력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다른 주변국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비중'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했다. 당연히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도 관리가 필요하다. 한국의 대외 관계는 쉴 틈, 또는 늘어져 안주할 구석이 없어야 한다는 뜻도 된다.
이를 위해 데탕트의 기본인 확고한 외교, 안보, 군사적 방향성이 요구된다. 이재명 후보의 셰셰는 데탕트의 전제이다.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데 요구되는 첫 발이다. 상대에게 상처 주지 않는다는 이해 구축이 먼저이고 구체적 정책은 사안별로 나라의 이익을 고려해 추진하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마오쩌둥과 닉슨의 만남 때도 그랬다. 닉슨은 구체적으로 중국과 미국의 여러 현안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협상하려 했다. 이해 충돌이 있는 민감한 지역들을 언급했다. 한반도 문제도 나왔다. 이때 마오쩌둥이 손을 가로저었다. 철학적 대화를 하자고 했다. 이미 언급한 대로 공존의 공감대가 협력사항 앞에 와야 한다는 뜻이었다. 길을 찾고 난 다음에 동행의 조건과 목표를 정하자는 제안이었다.
닉슨은 중미 데탕트를 '교량 건설(building a bridge)'이라 했다. 두 나라를 잇는 1만 6000마일의 다리, 22년 대립의 역사를 뛰어넘는 교량의 목적은 오고감에 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서 또는 저쪽에서 이쪽으로 와서 무엇을 할 것인가는 다음 문제다. 이것을 미리 정하고 다리를 만들지 않는다. 이 때 다리 건설의 첫 삽은 셰셰였다.
1972년 중미 데탕트의 진정한 결실은 무엇인가? 닉슨이 정리했다. “이번 방문 중 성취된 수확이 양국 간 관계의 새로운 전망을 개방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다. 이 희망을 위해서 "셰셰" "땡큐” "스파시바" "아리가토" "반갑습니다" 모두를 필요에 따라 비중에 맞게 외쳐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