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인정 않는데 용서부터 하자? 기괴한 화해론

한덕수 "4·3 정신은 화합 상생" "미래로 나가자"

용서를 구하는 이가 없는데 누구를 용서하나

전 서울대 총장의 '하해와 같은 관용' 궤변도 파문

2025-04-03     이명재 에디터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3일 제주특별자치도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77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묵념하고 있다. 왼쪽부터 한 권한대행, 김창범 제주 4.3 희생자 유족회장, 우원식 국회의장. 2025.4.3 연합뉴스

한덕수 대통령권한대행이 4·3 정신은 “용서와 화해”라고 말했다. 그는 3일 제주 4·3희생자 추념식에 와서는 제주 4·3 정신에 대해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화합과 상생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면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다시 일어선 4·3의 숨결로 대한민국을 하나로 모으고 미래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 전날인 2일에는 전 서울대 총장이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용서하자”는 칼럼을 일간신문에 쓴 것이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헌법학자이기도 한 성낙인 전 총장은 이 글에서 대통합의 길을 제시한다면서 내란 우두머리 대통령 윤석열에 대해 '용서'와 '아량'을 베풀자고 했다.

이틀간 연달아 나온 용서와 화해의 주장은 77년의 세월의 간극이 있지만 계엄과 국가폭력이라는 유사한 상황에 대한 빗나간 용서론을 펴고 있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용서와 화해의 이름으로 오히려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가로막는 인식이며 발언이다. 

무엇보다 이 두 사람의 용서론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용서할 대상부터가 없다는 것이다. 용서는 잘못에 대해, 잘못한 사람에 대해 하는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이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한 용서를 하래야 할 수가 없다. 한 총리와 성 전 총장의 용서론이 허공을 향한 용서에 머물고 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윤석열 계엄 문건은 4.3 사건을 ‘제주 폭동’으로 표현하고 있다. ‘폭동’이니 군경이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을 잘못이었다고 생각할 리가 없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을 '부산 소요사태'로 표현한 것도 마찬가지다. 지난 2014년에 다른 정부도 아닌 같은 보수 계열의 박근혜 정부 때 4.3 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지만 운석열 정권의 4.3에 대한 시각에는 여전히 불순분자들의 폭동이라는 인식이 완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 들어서 4.3에 대한 모독이 끊임없이 벌어졌던 것도 그같은 인식을 토양으로 하고 있다.  2023년 2월 태영호 당시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4.3 사건이 남로당 지부가 일으킨 단독 행동이 아니라 김일성이 주도해 발생했다는 북한 지령설을 주장했다. 같은 해 4·3 추념일에는 제주도민들과 유족들을 더더욱이 몸서리치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자칭 서북청년단 구국결사대가 75주년 추념식이 거행된 제주4·3평화공원에 나타나 훼방을 놓은 것이다. 해방 후부터 특히 제주에서 숱한 학살과 테러를 저질렀던 서북청년단이 4·3추념식장에 나타난 것에 윤석열 정권의 거친 폭주와 무관했다고 할 수는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공개 회의에서 종종 서청단의 배후 중 하나로 지목되는 이승만에 대해 “역사적으로 너무 저평가돼 있다”고 말한 것이나 국가보훈처가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던 것이나 서청단의 발호와 결코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4·3 사건의 추념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적지 않다. 실종자 확인, 유해발굴, 재심재판, 합당한 보상 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개정으로 3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출범이 요청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한 총리는 이날 추념식에서 이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이 단지 용서와 화해만을 얘기했다.

그는 이날 “과거는 우리가 바꿀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실은 과거는 그를 포함한 윤석열 정권에 의해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 국가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정리된 과거가 부정 당하고 모욕 당해 왔다. 

한 총리는 과거에 대해서는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자면서 그보다는 미래를 생각하자고 했다. ‘다시 일어선 4·3의 숨결’로 대한민국을 하나로 모으고 미래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한 총리가 알지 못했던 것,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4·3의 희생자들은 70여 년간 그 몸을 제대로 눕히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일어서는 것은 일단 몸을 눕히고 나서의 일이다.

성낙인 전 총장의 글은 용서를 바라야 할 이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니 다른 데서 '죄인'을 찾고 있다. ‘잦은 탄핵소추 발의로 국정운영 발목을 잡았다’고 해서 야당이 12·3 비상계엄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니 대통령에 대해 정상 참작을 하자는 것인가.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에 대통령은 즉각 응하였다. 그런 점에서 내란은 미수에 그친 셈이다. 그러니 탄핵 기각 또는 각하도 얼마든지 논리 전개가 가능하다”고 했다. 대통령이 국회의 계엄해제 요구에 헌정 사상 처음으로 응한 '업적'을 남겼다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내란 수괴에 대해서는 ‘하해’와 같은 관대함을 보여준 성 전 총장은 그러나 내란을 막으려 하는 측에 대해서는 혹독하다. 야당에 대해서는 “국가를 나락으로 내몬 정치인들은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고 준엄하게 꾸짖고 있다.

한 총리와 성 전 총장의 말과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해'와 같은 관용이 필요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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