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3 아니면 8대 0
오늘도 우리가 광화문에 나가야 하는 이유
저 역시 처음에는 많은, 아니 대부분의, 아니 거의 모든 민주시민들처럼, 헌법재판소가 빠른 시일 안에 내란 수괴 윤석열에 대해 8-0 파면 결정을 내릴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얼마간 시간이 지체됐지만 그다지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여덟 명 전원일치를 전제로, 몇 가지 쟁점들에 대해 의견 조율을 하고, 폭동까지 일으킬 태세인 반대자들에게 트집 잡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결정문 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법률 전문가들, 정치 평론가들의 분석을 억지로라도 믿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헌재 재판관들 여덟 명의 의견이 8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5-1-2 혹은 5-2-1 정도로 나뉘어 팽팽한 기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의로운 사람, 기회주의적인 사람, 제각각의 헌재 재판관들
왜 하필 5-1-2(5-2-1)일까? 5-3이나 6-2라면 이렇게 시간을 끌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원일치를 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시간이 이미 너무 많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의 의견이 기각이라면 그냥 6-2 혹은 7-1 인용으로 가면 됩니다. 세 사람이나 네 사람이 확고하게 기각 의견이라면 역시 시간을 질질 끌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5-3 혹은 4-4로 기각 결정을 내리면 됩니다. 제 생각에 최소 한 사람, 많으면 두 사람이 기각 의견을 내비치고,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쉽게 결정을 못 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한 양측의 심리적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상황을 이렇게 분석하는 것은 헌법재판소를 균질의 (같은 수준의 법률 지식과 인품과 경륜을 지닌) 재판관 여덟 명으로 구성된 기관으로 보지 않고, 그 반대로 각각 다른 기질과 성향의 법률가 여덟 명이 구성하고 있는 조직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들의 정치 성향이 다를 것 입니다. 누군가 “판사들도 선거 때면 투표하지 않나”라고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처럼 그들 중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중도적인 성향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헌법을 해석할 때 법리로만 하지 않고, 각자의 정치적 성향이 개입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헌재를 법률기관이 아니라 정치조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정치적 성향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기질도 다를 것입니다. 용감한 사람과 비겁한 사람, 창피를 아는 사람과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 정의심이 투철한 사람과 기회주의적인 사람, 미욱한 사람, 교활한 사람 등등. 어떤 특정 재판관이 이런 기질 중의 부정적인 면만 고루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재판관은 용감하면서도 이기주의적이고, 어떤 재판관은 고집이 세면서도 창피를 아는 식으로 제각각 다른 인간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탄핵 줄기각이 윤 파면 위한 빌드업이었다는 환상
줄기차게 8-0이라고 주장하는 분석가들을 가만히 보면, 자신의 정보력과 상황 인식에 대한 자신감 이전에, 인간의 선에 대한 의지를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갑제 정규재 김진 같은 보수 인사들에게서는 공동체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 같은 것이 엿보여 반갑기도 합니다. 이들에게서는 또 헌법재판관이나 대법관 등 최고위 판사들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양식(良識)’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헌재 재판관들은 균질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안창호 같은 이도 헌재 재판관을 지냈고 앞으로 지귀연 판사, 심우정 검사 같은 이들도 얼마든지 헌재 재판관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법률 전문가는 “이렇게 명백한 내란 증거와 증인들을 두고 어떤 법리로도 기각 판결문을 쓸 수는 없다.” 또는 “윤석열이 복귀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망한다는 얘기인데 헌재 재판관들이 그런 결정을 내릴 리 없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전문가다운 정상적인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상대는, 모든 국헌문란의 증거와 증언, 정황을 인정하면서도 “인용에 이를 정도는 아니다”라는 말로 법리와 양심을 깔아뭉개는 인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제 한덕수 총리 기각 결정을 보며 제 생각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한 총리 기각 여부를 두고 윤석열 탄핵 결정과 결부시켜 말들이 많았습니다. 한 총리가 기각이 되면 윤 파면은 틀림없다는 예측이 많았습니다. 한 총리로 하여금 국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하고 헌재는 홀가분하게 윤석열을 파면시킬 수 있을 거라는 예측이지요. 기각이 됐든 인용이 됐든 한 총리 건을 8-0으로 결정했다면, 또 한 번 속는 셈치고 그 분석에 솔깃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5-1-2였습니다. 그동안 헌재의 탄핵 줄기각이 윤 파면을 위한 빌드업이었다는 환상이 한 순간에 깨졌습니다.
흔들리는 8-0, 그러나 아직 가능성이 더 크다
아직 최종 승부는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5-3 아니면 6-2”라고 하지 않고 “5-3 아니면 8-0”이라고 한 것은, 만일 6-2가 될 분위기가 되면 두 사람 안에 있는 기회주의적인 속성이 발현해 자신들의 결정을 바꿀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한 사람을 제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8-0의 가능성을 더 크게 믿습니다. 최근 윤석열 탄핵 심판의 조속한 결정을 촉구한 유흥식 추기경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만난 이재용 삼성도 알게 모르게 큰 힘을 보태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광화문에 울려 퍼지는 ‘윤석열 파면하라’는 외침이야말로 우물쭈물하는 재판관들에게 최고의 각성제가 될 것입니다. 오늘도 광화문에 나가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