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2.28 사건과 조선인 희생자 박순종
한국과 타이완, 같지만 다른 식민지 경험의 교착점
2023년 6월 타이완의 수도 타이베이에 있는 2.28 국가기념관에 제주4.3 관련 강연을 하러 갔는데요. 전시실에서 2.28 ‘수난자’ 가운데 34세의 박순종(朴順宗)이라는 한국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원이었던 그가 왜 타이완의 지룽(基隆)에서 2.28 시기에 목숨을 잃게 되었는지 알아보았어요.
박순종은 1913년 전남 여수의 거문도에서 태어나, 1942년 일자리를 찾아 타이완의 항구 도시 지룽에 정착했어요. 동향 출신의 여성과 혼인하여 3남 1녀를 두었습니다. 그가 지룽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선원으로 근무하던 회사가 시모노세키에서 창업된 후 기타큐슈를 거쳐 지룽으로 옮겨 왔기 때문이었어요. 그에게 지룽은 기회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지룽에 잔류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국민당 정부는 수산업을 지속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종전 이후에도 일본인과 조선인들을 잔류시켰습니다. 그런데 타이완에 남아 있던 조선인 243명 중에서 195명이 지룽에 살고 있었어요. 제주도를 포함한 전남의 섬 지역 출신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2.28 사태 속 지룽에서 실종된 박순종
1947년 2월 28일 타이베이에서 발생한 우발적 사건으로 타이완 현지인들과 중국 본토에서 온 국민당 권력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곧바로 타이완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 사태를 국민당이 무력으로 가혹하게 진압했는데, 특히 3월 8일 지룽으로 많은 군대가 상륙하면서 무차별 학살이 벌어졌어요.
그들은 타이완인들을 같은 중국인이라기보다 적으로 간주하여, 지룽에서만 2천여 명이 학살되었습니다. 군인들은 기관총을 난사하며 진격해서, 항구에서 짐을 기다리던 시민들까지 희생되었어요. “마치 전장에서 적을 살육하듯 눈앞의 모든 사람을 사살했다. 당시 지룽의 어디에도 시체가 묻히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박순종은 1947년 3월 11일 아침, 아들의 생일에 쓸 생선을 사기 위해 항구로 나갔다가 실종됐어요. 그의 아내는 타이완 한교협회의 간부들과 군부대를 찾아다니며 수소문해 보았지만 끝내 남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협회원들도 중국어를 할 줄 몰랐고, 자신들의 목숨도 위태로운 실정이어서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되지요.
자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순종도 역시 외국어로는 일본어만 할 줄 알았고, 타이완어는 물론 대륙에서 온 국민당 군대가 사용하는 베이징어를 몰랐다고 해요. 그래서 국민당 군인들이 수상하게 보았고, 소지품 검사에서 선원들이 가지고 다니던 칼이 주머니에서 나오자 ‘폭도’로 오인해서 아버지를 끌고 가 버린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장을 잃은 유가족의 고단했던 삶
아버지가 실종된 후, 장남 박성태(朴性泰)가 아버지의 배에서 하던 일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겨우 14세에 불과했지만, 세 동생이 아직 어려서 집안의 생계를 혼자서 책임져야 했어요. 그럼에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소학교를 졸업했으며, 배 위에서 선배 선원들에게서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성경에 흥미를 느끼고 있던 중, 17세 되던 1950년에 패배한 국민당을 따라 상해에서 건너온 정성원 전도사를 알게 되었어요. ‘타이완 한국교회의 어머니’로 불리는 그녀의 보살핌을 통해 타이베이와 타이난(臺南)에서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1965년에 졸업한 이후 가오슝(高雄) 한국교회의 초대 목사를 지내다가 나중에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하는데요.
박순종의 일찍 사망한 둘째 아들을 제외한, 딸과 교사가 된 막내아들이 타이완에 살고 있답니다. 유족들은 1992년 천안 '망향의 동산'에 부모의 묘비를 조성했는데요. 시신을 찾지 못한 아버지의 묘비문에는 ‘1947년 3월 11일 졸(卒)’로 새겼다고 합니다. 나중에 타이완 정부로부터 받은 배상금은 세 남매가 3등분하여 나누었다네요.
“개가 가더니 돼지가 왔다”(狗去猪來)
2·28은 우발적인 사건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1947년 2월 27일 전매국 직원이 밀수 담배를 단속하다가, 거리에서 담배를 판매하던 여성을 구타하고 담배를 몰수했어요. 주변의 사람들이 항의하자 경찰이 과도하게 반응하여 행인에게 총을 쏴 숨지게 했는데, 이 일로 타이완 민중의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2월 28일 시위 군중이 행정장관 집무실 앞에 몰려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으나,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인들의 저항을 ‘일본의 노예화 교육에 물든 폭도들의 난동’으로 간주했어요. 3월 9일 타이베이와 지룽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벌였습니다. 타이완 전역에 걸쳐 사망자가 1만 8천~2만 8천 명에 이를 만큼, 커다란 상처를 남겼어요.
1949년 말 국공 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정부를 옮겼습니다. 그 후에 38년이 넘게 이어진 계엄령 체제와 백색테러로 인해 사상자가 속출했지요. 이 시기에 처형된 숫자는 3천-8천명 행방불명자도 12만 6,875명으로, 피해자 전체는 약 20만 명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물론 2⋅28은 폭동으로 규정되고, 탄압의 대상이 되었어요.
1987년의 계엄령 해제를 계기로 타이완 사회가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2.28에 대한 공적 인식도 변화를 맞게 됩니다. 1995년 ‘2.28 사건 기념 기금회’가 발족되면서 사건이 남긴 부정적 유산을 청산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되었어요. 그동안 지급된 보상금 총액은 타이완 달러로 약 72억에 달합니다.
‘외국인은 자격이 되지 않을 것’
박순종의 두 아들은 조례가 제정되기 2년 전에, ‘2.28 사건 무고수난자 수난 경과보고서’를 작성하였어요. 보고서에는 박순종의 실종 시간과 장소, 경위, 그리고 관련 증언자까지 상세히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타이완 기독장로교회의 가오쥔밍(高俊明) 목사를 통해 제출하려 했으나 ‘외국인은 자격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을 듣고 포기해야 했어요.
그런데 2014년에 타이난의 창롱(長榮)대학 타이완연구소 소속의 일본인 아마에 요시히사(天江喜久) 교수가, [박순종: 228 사건중 조선인/한교 수난자]라는 글을 타이완의 잡지에 발표했습니다. 그는 하와이 대학에서 박사를 한 정치학자로서, 가오슝에서 한인교회 선교사로 근무하는 한국인 배우자를 통해 박성태를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2016년 2월 타이완 행정법원이 류큐(琉球) 출신 일본인 아오야마 에사키(青山惠先)의 유족이 제기한 소송에서, 외국인을 ‘수난자’로 인정하지 못하는 근거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에 기금회가 항소를 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배상금이 지급되었어요. 이 소식에 박순종의 유족들은 고무되었습니다.
‘수난자’로 인정받은 박순종
1993년에 작성했던 보고서와 이 논문을 토대로 ‘2.28 사건 수난자 배상금 신청서’를 작성하고 몇 가지의 추가 자료를 첨부하여 2016년 2월에 제출했습니다. 기금회는 사실관계 여부를 확인했고, 가오쥔밍 목사를 직접 만나 유족들이 1993년에 ‘2.28 사건 무고수난자 수난경과보고서’를 작성하여 청원하려 했던 사실을 확인했어요.
증언 이외에 어떤 문헌자료도 남아 있지 않으나, 마침내 박순종의 행방불명이 2.28과 연관성이 높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28 기금회는 2017년 1월 박순종을 ‘수난자’로 발표했어요. 유족 세 자녀에게는 배상금의 최고액인 타이완화 600만 달러가 지급되었는데, 현재 환율로는 2억 6658만 원에 해당합니다.
타이완에서 2018년까지 수난자로 인정받은 건수는 사망자로 추정되는 숫자의 약 10%에 불과한 2312건에 불과한데요. 그 이유는 무엇보다 학살이 은밀하게 진행된 경우가 많아 입증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외국인 ‘수난자’의 배상을 통해 이행기 정의(轉型正義)의 국가주의적 한계는 일정 부분 개선될 수 있게 되었어요.
영화 「비정성시」 속 ‘조선루’는 일제시대 성착취의 흔적
1989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허우샤오시엔(候孝賢) 감독의 「비정성시(悲情城市:The City of Sadness)」는 바로 2.28 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국내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이 영화에 나오는 지우펀(九份)은 1920~30년대에는 금광으로 번영하던 도시였으나, 폐광된 이후로 잊혀졌다가 이 영화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이곳에는 금 채굴로 돈을 번 광부들이 드나들던 유흥가가 있었는데요. 그 중에는 영화에도 등장하는 ‘조선루(朝鮮樓)’가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에서 온 여성들이 일하던 접객업소를 말하는데요. 이곳은 성매매업이 이루어졌던 공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일하던 여성들 일부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조선루’와 별도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1942년 일본군의 요구에 의해 보르네오로 ‘위안부’ 50명이 가게 되었는데 그 중에 조선인 여성도 다수 포함되었지요. 당시 그들을 인솔하여 위안소를 운영했던 도요가와 코키치(豊川晃吉)는 ‘전라남도 제주도 한림면’ 출신으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량차오웨이(梁朝偉)는 청각장애를 가진 사진사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가 기차여행 중에 타이완 사람들이 일본어로 물어보고, 대답을 못하니 폭행하려다가 친구가 말리는 장면이 나오지요. 대륙에서 온 국민당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보복을 하려 했던 것입니다. 다시 같은 중국인이 되었지만 두 세력의 갈등을 볼 수 있는 모습이지요.
사실 타이완 사람들은 오랫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일본어는 능숙하지만 베이징어를 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태평양전쟁 기간에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협력했어요. 국민당 입장에서는 그들이 동포라기보다는 언어조차 다른 적이었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타이완인들의 저항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했던 것이지요.
같은 경험 다른 기억의 두 나라, 이행기 정의 매개로 연대 가능할까
타이완은 한국 근현대사와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는 섬나라입니다. 아시아로의 팽창을 도모하던 ‘제국 일본’이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획득한 첫 번째 해외 식민지로서, 한국과 일제 식민지배의 역사를 공유하지요. 그러나 타이완인들 가운데는 일본에 대한 기억이 우리와 현저하게 다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타이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국민당 총통이 되어 과거사 청산의 물꼬를 터준 리덩후이(李登輝)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였어요. 그는 타이완인은 ‘일본 정신’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하며, 거듭 배우고 익혀 중화사상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공사를 명확히 구분하는 무사도 정신의 기초 위에서 민주 사회를 수립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중국 공산당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패퇴한 이후, 냉전체제 하에서 타이완은 한국과 함께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반공체제의 중요한 한 축이었어요. 우리에게는 ‘자유중국’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국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유중국에는 자유가 없었고 백색테러가 난무했어요.
그런데 1992년 노태우 정권이 ‘북방외교’의 일환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는 과정에서, 사전 통보도 없이 공관을 철수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타이완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이 사태가 빚어낸 파장은 현재까지도 타이완 사회에 미묘한 감정적 앙금으로 남아 있어요. 앞으로 두 나라의 이행기 정의를 매개로 한 연대가 심화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