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는 왜 안중근 아들을 처형하려 했을까
영화 ‘하얼빈’이 담지 못한 안중근 후손들 이야기
안중근 조카는 김구 며느리… 동생도 김구 그림자 수행
아들 준생은 이토 아들에게 아버지 대신해 사죄
일제, 억지 화해극 꾸며 ‘내선일체’ 식민 정책 홍보
김구 “호랑이 아버지에 개자식이 나오다니” 격분
국가와 민족 배신자의 역사 법정에 시효는 없다
지난 연말 개봉한 현빈 주연의 영화 ‘하얼빈’이 계엄·탄핵 정국과 여객기 참사라는 대형 악재 속에서도 29일 간 흥행 1위를 질주하며 500만 관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안중근을 주인공으로 한 김훈의 소설과 제목을 같이 쓴 이 영화는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가 일제 국권 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역에서 처단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둠은 짙어오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올 것이다. 불을 밝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불을 들고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가야 한다”라는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은 최근의 국가 위기 상황과 맞물려 더욱 큰 울림을 준다.
영화의 마무리 대목에서는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1위로 꼽히는 김구 선생의 이름이 등장한다. 짧은 장면이지만 일제가 얼마나 집요하게 친일파를 만들어내고 밀정들을 침투시켜 독립운동을 멸살하려고 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김구 “안중근 집안이라면 더 물을 것도 없다”
우리나라 항일투쟁 역사의 두 거두인 안중근과 김구는 황해도 해주 동향 출신이자 곁사돈이면서 젊은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막역한 사이다. 김구는 18살 때인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뛰어들어 아기접주로 활약했다가 관군의 추적을 피해 이듬해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의 집에 몸을 숨겨 목숨을 부지했다. 그는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에서 안중근을 이렇게 회고했다.
“맏아들 중근은 열여섯에 상투를 틀었고 자색 명주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돔방총을 메고 노인당과 신상동으로 날마다 사냥을 다녔다. 중근은 영기가 넘치고 여러 군인들 중에서 사격술이 제일이어서 나는 새와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으로 맞히는 재주가 있었다.”
안중근 동생 안정근의 차녀인 안미생은 김구의 장남 김인과 혼인했다. 안미생에게는 시아버지가 김구이고 안중근이 큰아버지다.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의 대한독립군 감독관인 아들이 중국 주재 영국대사관에서 근무하던 3살 연상의 여성과 충칭(重慶)에서 만나 교제하자 “안중근 집안이라면 더 물을 것도 없다”며 흔쾌히 결혼을 허락했다.
안중근 가문에서는 자신과 두 동생을 비롯해 15명이나 건국훈장을 받았고, 김구도 어머니와 아들 부부를 포함해 독립유공자 5명을 배출한 명문 집안이다. 안중근의 둘째 동생 공근은 김구의 신임을 받아 한인애국단과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을 운영했고, 황포군관학교 교관 출신인 사촌 경근은 김구를 측근에서 그림자처럼 보좌했다.
일제 침략 정당화 작업의 목표가 된 안중근의 핏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는 안중근의 차남인 준생을 민족 반역자로 지목하고 중국 관헌에게 “체포해 교수형에 처하라”고 부탁했다. 중국 국민당 주석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안중근 아들이 일본에 항복해 아편 매매 등 여러 가지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있으니 붙잡아 처벌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안준생은 과연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것일까.
안준생은 1907년 3월 2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이미 집을 떠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위로 누나 현생과 형 문생(분도)이 있었는데, 문생은 6살 때 낯선 사람이 준 과자를 먹고 숨지고 말았다.
어머니를 따라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등을 떠돌다가 중국 상하이(上海) 조계에 거주하며 항저우(杭州)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1939년 상하이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중 일제로부터 황당한 제안을 받았다. 아버지가 처단한 이토 히로부미의 영전에 아버지 대신 무릎 꿇고 참회한 뒤 그의 아들 이토 분키치(伊藤文吉)를 만나 사과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민족 입장에서는 독립운동의 대의에 먹칠하는 치욕적인 일이었으나 일제로서는 침략의 흔적을 지우고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사기극의 상징으로 마침맞은 이벤트였다. 끈질긴 회유와 거센 압박이 따랐고 안준생은 이를 거부하지 못했다.
장충단에 세워진 이토 히로부미 사찰 찾은 안준생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으로 상하이는 일본군에 점령된 상태였다. 안중근의 동생들은 대피했지만 준생은 어머니 김아려, 누나 안현생과 남았다. 안준생과 안현생의 남편 황일청은 친일파 이갑녕을 단장으로 한 상하이조선인회 만선(滿鮮)시찰단 일원으로 1939년 10월 7일 조선을 찾아 9일 경성(서울)에서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과 면담했다.
시찰단은 10월 11일 평양 일정을 끝으로 해산했지만 안준생은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 박문사(博文寺)를 찾았다. 박문사는 지금의 서울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 자리에 있었는데 이곳은 을미사변 때 일제 낭인들에게 살해된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1900년 10월 세운 장충단(奬忠壇) 권역이다. 나중에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희생자까지 포함됐고 봄가을로 나라에서 추모제를 지냈다.
일제는 1908년부터 장충단 제사를 금지하고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척살된 직후 그의 추도식을 거행했다. 10년 뒤에는 순종이 황태자 시절 쓴 장충단비를 뽑아버리고 공원으로 꾸몄다.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을 딴 절을 짓고 뒷산도 그의 호를 붙여 춘묘산(春畝山)이라고 불렀다. 절의 정문 경춘문과 요사채는 각각 경희궁 정문 흥화문과 경복궁 선원전을 헐어낸 뒤 옮겨 세웠다. 원구단의 석고전도 이전해 종루로 썼다.
친일 신문들 ‘안준생 속죄’ 조작극을 미담으로 포장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 30주기를 열하루 앞둔 10월 15일, 박문사의 이토 히로부미 위패에 분향 재배한 뒤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튿날에는 조선호텔에서 이토 히로부미 아들 이토 분키치 남작(일본광업사장)을 만나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17일에는 분키치와 함께 박문사를 다시 찾아 합동 참배했다.
당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그 아버지들에 이 아들들이 있다’란 제목 아래 “한 사람은 30년 전 10월 어느 날 하얼빈 역두에서 흉탄을 맞고 쓰러진 고 이토 히로부미 공의 아들 분키치 씨요, 또 한 사람은 흉탄을 쏜 범인 고 안중근의 아들 준생 군으로 3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우연히도 이 두 아들은 감개무량한 중에 극적 회견을 한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안준생이 “어제 박문사에 참배하고 고인의 영전에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속죄하는 참회의 눈물을 흘렸더니 오늘은 훨씬 마음이 가볍습니다”라고 말하자 분키치는 “두 분은 이미 저승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들을 공양하며 서로 협력해 국가를 위해서 노력을 바치자. 이번 기회에 군은 일본의 역사를 이해하고 일본인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해 성공할 것을 바라마지 않네”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자칭 민족지들도 ‘조선 통치의 위대한 전환사’라거나 ‘부처의 은혜로 맺은 내선일체’란 제목으로 대서특필하며 일제가 꾸민 억지 화해극을 미화하기에 바빴다.
이 소식을 들은 김구는 ‘호부견자(虎父犬子)’, 즉 “호랑이 아버지에 개자식이 나왔다”면서 격분했다. 안준생을 처단해야 할 민족 반역자 명단의 가장 윗줄에 올려놓고 중국에 협조를 부탁했다. 안현생도 남편과 함께 1941년 3월 26일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 위패에 참배했다.
안중근 아들딸과 조카들의 엇갈린 행보
안준생은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상하이의 고급 주택에서 잠시나마 윤택한 생활을 누렸지만 마음은 편할 수가 없었다. 광복 후에도 귀국을 망설이다가 1946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돌아와 숨어 살다시피했다. 1951년 부산으로 피란했다가 폐결핵으로 사망해 서울 종로구 혜화동 천주교묘지에 묻혔다.
부인 정옥녀는 1남2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했다. 아들 안웅호(토니안)는 중국계 여성과 결혼했고 심장병 치료 권위자가 됐다. 손녀 안도용(토니안 주니어)이 의거 104주년을 맞아 2013년 방한했다.
안현생의 남편 황일청은 1945년 12월 4일 귀국선을 타려고 충칭에서 상하이로 가던 중 여관에서 광복군 대원의 총을 맞아 숨졌다. 이 소식을 들은 안현생은 충격을 받고 한동안 몸져누웠다가 1946년 11월 11일 남편의 유골을 갖고 두 딸과 함께 귀국했다. 대구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불문과 교수를 지내다가 1960년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들과 달리 사촌 안진생은 대한조선공사 부사장을 거쳐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콜롬비아·미얀마 대사를 역임했다. 육촌인 안춘생은 육사 교장과 국방부 차관보를 역임하고 독립기념관 초대 관장을 지냈다. 아들딸과 조카들의 엇갈린 행보를 지하에서 지켜본 안중근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오는 2월 14일은 안중근이 뤼순(旅順)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날이다. 3월 26일은 순국 115주년 기념일이다. 국가와 민족을 배신하면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 역사 법정에는 시효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