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여 년 군림해온 그레고리력, 도전하는 세계력
[달력과 권력에 얽힌 은밀하고 흥미로운 이야기(하)]
왜 7월·8월은 연속 큰달이고 2월은 28일일까?
동서방 교회, 2025년 희년에 부활절 일치에 나서
네티즌들은 70년 전 무산된 세계력 채택 캠페인
예로부터 천문을 관찰해 달력을 만드는 것은 최고 통치자의 독점적 권한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해마다 동지에 맞춰 중국에 사신을 파견해 황제에게 문안드리고 절기와 일식 등이 적힌 책력(冊曆)을 받아왔다.
중국 주나라 때는 동지가 들어 있는 달 초하루가 한 해의 시작을 뜻하는 원단(元旦)이었다. 한나라 무제가 음력 세 번째 달을 정월로 삼는 바람에 동짓달은 11월로 밀려났다. 이때 정한 정월 초하루가 우리가 쇠는 설이자 중국인이 가장 큰 명절로 여기는 춘제(春節)다.
7월과 8월을 자기 것으로 만든 로마의 권력자들
건국 초기 로마에서는 1년이 10개월로 이뤄진 달력을 썼다. 농사를 짓지 않는 겨울 두 달은 날짜를 아예 계산하지 않았다. 기원전 713년 2대왕 누마 폼필리우스가 야누스의 달 1월(Januarius)과 정화(淨化)의 달 2월(Februarius)을 추가해 12개월로 바꿨다. 이에 따라 이전까지 한 해의 시작이던 전쟁신 마르스의 달(Martius)이 3월이 되고 라틴어로 7번째, 8번째, 9번째, 10번째 달이란 뜻의 September, October, November, December가 각각 두 달씩 밀려나 9월, 10월, 11월, 12월이 됐다.
기원전 45년 율리우스력을 시행한 로마 최고 권력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생일이 있는 7월(Quintilis·5번째 달)을 자기 이름(Julius)으로 개명했다.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로마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도 태어난 달 8월(Sextilis·6번째 달)을 자기 이름(Augustus)으로 바꿨다. 영어 ‘July’와 ‘August’의 어원이다.
율리우스력은 당초 홀수 달은 31일, 짝수 달은 30일로 하고 2월만 29일(윤년에는 30일)로 정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달이 하루 적은 것에 불만을 품고 2월에서 하루를 더 빼와 8월을 31일로 늘렸다. 이 때문에 2월은 28일로 쪼그라들고 9월 이후 큰달과 작은 달이 뒤바뀌어 12월·1월과 7월·8월에 큰달이 이어지게 됐다.
율리우스력 쓰는 러시아는 1월 7일이 성탄절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쓰는 그레고리력은 서방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1582년 공포한 것이다. 정교회를 믿는 동유럽에서는 이를 따르지 않고 율리우스력을 오랫동안 써왔다. 이를 토대로 한 러시아력은 현재 그레고리력과 13일 차이가 난다.
러시아혁명은 그레고리력으로 1917년 3월 8일과 11월 7일에 일어났다. 그러나 러시아력으로는 각각 2월 23일과 10월 25일이어서 역사에서는 2월 혁명과 10월 혁명으로 부르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러시아를 비롯한 일부 지역 정교회는 크리스마스도 12월 25일이 아니라 1월 7일에 기념하고 있다. 최근 외신 보도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월 7일 모스크바의 승리공원 인근 교회에서 우크라이나전 참전 군인들과 함께 성탄절 예배에 참석했다.
지금은 러시아를 비롯한 슬라브어권 주민들도 일상생활에서는 그레고리력을 쓰지만 우리가 설, 추석 등의 명절은 음력으로 쇠는 것처럼 성인(聖人)의 축일 등 정교회 기념일은 율리우스력으로 지내는 전통을 지키고 있다. 한국의 일부 정교회 성당은 12월 25일 말고도 슬라브어권 신도들을 위해 1월 7일 성탄절 예배를 한 차례 더 올린다. 신정과 구정을 두 번 지내던 이중과세(二重過歲) 풍습을 떠올리게 한다.
프랑스대혁명 때는 1주일 10일, 하루 10시간, 한 시간이 100분
부활절은 음력과 양력의 조합이다. 1054년 동서 교회가 분열되기 전인 서기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정한 것이어서 가톨릭이나 정교회 모두 ‘춘분 후 만월(滿月)이 뜬 뒤 첫 주일(일요일)’이다. 동서 교회 모두 같은 날일 때가 많지만 역법이 달라서 한 달 넘게 차이 나는 경우도 있다.
2025년은 니케아 종교회의 1700주년이다. 올해를 희년(禧年·거룩하고 복된 해)으로 선포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방정교회를 대표하는 콘스탄티노플의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와 해마다 부활절을 일치시키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 올해는 동서 교회의 부활절이 4월 20일로 같은 날이다. 4월 12일이 음력 3월 15일이어서 다음에 오는 첫 일요일은 4월 13일이지만 실제로는 보름달이 하루 뒤인 음력 3월 16일에 뜨기 때문이다.
이념이 달력을 바꾼 적도 있었다. 프랑스대혁명으로 권력을 쥔 혁명정부는 1792년부터 1805년까지 12년여 동안 혁명력(공화력)을 사용했다. 1년 12개월을 30일로 통일해 나머지 5~6일은 축제일로 즐겼고, 공화정 선포일이자 추분인 9월 22일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았다.
시간 단위에는 기존의 60진법 대신 십진법을 적용했다. 성경 창세기에서 비롯된 주 7일이 아니라 1주일을 10일로 정하는가 하면 하루를 10시간, 1시간을 100분, 1분을 100초로 계산했다. 달의 명칭도 권력자 이름을 빼고 자연 이름을 붙여 포도달, 안개달, 서리달, 눈달, 비달, 꽃달, 풀달, 열매달 등으로 바꿨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나폴레옹이 집권한 뒤 그레고리력으로 환원했다.
이슬람력은 순수 태음력이어서 1년이 354일
중동 지역은 고대부터 19년에 윤달이 7번 들어가는 메톤주기법의 태음태양력을 써오다가 정치적·종교적 필요에 의해 권력자가 윤달을 남용하는 사례가 잦자 이슬람제국 2대 칼리프 오마르가 서기 636년에 순수 태음력을 채택했다.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가 서기 622년 근거지를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긴 헤지라(성천·聖遷)를 이슬람력 원년 1월 1일로 선포한 것이다.
해마다 11일씩 앞당겨지므로 지금은 그레고리력 서기 연도와 43년 차이가 난다. 올해는 이슬람력 1446년이며 오는 6월 27일 1447년이 시작된다. 이슬람 신도들이 해가 떠 있는 동안 금식하는 라마단은 이슬람력 9월을 가리키는데, 올해는 2월 말부터다. 최근에는 무슬림 국가들도 국제 교류가 잦아짐에 따라 불편을 줄이기 위해 그레고리력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메톤주기법을 기본으로 하되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유월절(踰越節)의 첫날이 월·수·금요일이 되지 않도록 복잡한 법칙을 적용한 유대력을 쓰고 있다. 유월절은 노예 생활을 하던 유대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한 날이다. 저녁에 3개의 별이 보이면 하루가 시작된다고 여기고, 추분 후의 음력 초하루를 새해 첫날로 삼는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재된 누루즈의 날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강역이던 발칸반도, 캅카스, 중동, 중앙아시아 일대에서는 춘분을 설날로 기념하는 ‘누루즈(Nowruz)’ 풍습이 남아 있다. 페르시아어로 ‘새롭다’는 뜻의 ‘누(now)’와 ‘날’이란 의미의 ‘루즈(ruz)’가 합쳐진 말로 봄의 첫날을 축하하고 자연의 새로움을 기뻐하는 날이다.
3천 년 넘게 내려온 전통이고 지금도 약 3억 명이 이날을 전후해 축제를 연다. 지역에 따라 ‘노브루즈(Novruz)’, ‘노우루즈(Nowrouz)’, ‘나브루즈(Navruz)’, ‘네브루즈(Nezruz)’ 등으로도 부른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친지끼리 선물을 주고받고, 전통음식을 만들어 먹고, 가무를 즐긴다.
유네스코는 2009년 누루즈를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했다. 유엔은 이듬해 총회에서 이란·인도·아제르바이잔·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투르크메니스탄·타지키스탄·아프가니스탄·터키·알바니아·마케도니아 등 11개국이 발의한 3월 21일을 ‘국제 누루즈의 날(International Day of Nowruz)’로 제정했다. 세대와 가족 간의 화해·선린·평화·연대의 가치를 증진하고 문화적 다양성과 공동체 사이의 우정에 기여하자는 취지다. 올해는 우리나라 춘분(3월 20일)과 하루 차이가 난다.
국내에서도 주한키르기스스탄학생회 등을 중심으로 주한 외국인들이 해마다 ‘누루즈의 날 봄맞이 축제’를 개최한다. 유목민의 이동식 전통가옥 유르트를 지어놓고 씨름, 줄다리기 등의 운동경기와 전통 공연을 펼친다.
“해마다 요일 똑같은 세계력 도입하자”
미국인 여성 부호 엘리자베스 아켈리스는 1930년 기존 달력들의 불규칙성을 보완한 세계력(世界曆·World Calendar)을 고안했다. 1년을 3개월씩 4분기로 나눈 뒤 분기 첫 달은 31일, 나머지는 30일로 하고 매 분기를 일요일로 시작하면 모든 분기가 91일이 되고 해마다 요일이 똑같아진다.
7요일에 52주를 곱하면 364일이어서 평년에는 하루가 남는다. 이날은 한 해의 마지막날인 12월 31일 세계일(World day)로 정해 만국 공통 휴일로 삼는다. 4년마다 오는 윤년에는 상반기 마지막 날인 6월 31일 세계일을 둔다. 세계일은 요일이 없어 주외일(週外日)이나 무요일(無曜日)로도 부른다.
세계력은 각종 기념일의 요일이 고정돼 달력을 교체할 필요가 없다. 2월이 비정상적으로 짧은 단점이 사라질 뿐 아니라 월평균이나 분기별 통계가 훨씬 정확해지고 달마다 근무일수도 일정해진다. 각국이 공통 휴일을 함께 즐기면 국제 친선과 평화를 도모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수백 년, 혹은 수천 년간 내려온 전통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세계일을 두면 7일마다 돌아오는 안식일이 고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세게 반발했다.
아켈리스는 세계협회를 조직해 세계력 채택에 힘썼으나 2차대전 발발 등으로 각국 대표들을 모으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1954년에 와서야 유엔에서 세계력 제정 방안을 논의했다. 아시아에서는 찬성한 반면 미국과 서유럽 기독교 국가들이 반대해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던 한국은 설문조사에서 세계력을 지지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달력은 고대 로마와 중세 유럽의 최고 권력자에 의해 완성됐으며, 근세 이후 서유럽이 세계 패권을 차지하면서 보편화했다. 권력으로 뒤틀린 달력을 바로잡기 위해서도 강력한 권력이 필요한데, 아직은 미국과 유럽이 주도권을 지닌 데다 예전처럼 강력한 권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2000년대 들어 네티즌을 중심으로 세계력 채택 캠페인이 다시 일고 있다. 공식 기구에서 논의되지는 않지만 인터넷 덕분에 각국으로 확산하고 있다. 70년 전 도입 반대에 앞장선 미국에서 그 움직임이 시작됐다는 것도 흥미롭다. 인류는 과연 400여 년 만에 또다시 달력 혁명을 이뤄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