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어준이 미디어다
지난번 칼럼에서 함석헌 선생을 통해 요즘 독립언론(인)에 관한 얘기를 했었는데, 그때 미처 하지 못한 얘기가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함 선생이 살아온 삶처럼 그가 쓴 글도 일관되었다는 점이다. 20, 30대 때 썼던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 역사’와 70,80대 때 쓴 ‘씨ᄋᆞᆯ의 소리’에 실린 글의 문제의식과 힘은 놀라울 만큼 변함이 없다. 시작부터 이런 얘기를 꺼낸 까닭은, 우리 사회에서 젊은 시절엔 정의를 앞세워 부당한 권력을 향해 제법 날카로운 비판을 하던 지식인들 가운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마치 세상을 달관한 듯 선문답 같은 얘기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서다. 그중 최악인 것은, 비판의 화살을 엉뚱한 데로 겨냥하고 정의의 사도인 양 보기 민망할 정도로 과도하게 열을 내는 경우다.
김어준을 극찬했던 강준만이...
여기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인물이 강준만 교수다. 강 교수는 언론학자로서 통찰력 있게 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조선일보’로 압축되어 있다고 봤다. 그래서 마치 함석헌 선생이 ‘씨ᄋᆞᆯ의 소리’에서 했던 것처럼 젊은 시절 그는 1인 저널룩 ‘인물과 사상’을 매달 펴내며 패기롭게 ‘조선일보’와 맞짱을 벌여 마침내 ‘안티조선 운동’을 낳은 장본인이 아니던가. 그러던 그가 언제부턴가 부당한 권력이 세상을 뒤흔들 만큼 문제가 되어도 소프트한 주제를 들고 나와 이현령비현령 같은 주장을 늘어놓기 일쑤다. 게다가 그러한 권력에 대한 비판은 한두 마디로 간단히 접거나 모른 체하고, 대신에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아주 호되게 질타하는 경우가 부쩍 눈에 띈다. 요즘 특히 강 교수가 지독하다 싶을 만큼 조롱하고 증오하는 대상이 김어준 씨다.
가장 최근의 사례 한 가지만 들어보자. 강 교수가 연재하는 ‘신동아’에 2022년 9월호, 10월호, 11월호 무려 세 번에 걸쳐 연달아 ‘김어준’을 주제로 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대단한 분석이나 새로운 통찰을 주기는커녕 시종일관 김어준 씨에 대한 증오와 혐오 일색이다. 그는 또 다른 김어준 혐오자 진중권 씨의 조롱 섞인 주장을 촌철살인이라며 수시로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김어준 씨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진중권 씨와 같은 증오와 혐오 수준이라는 걸 말하는 듯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글의 요점이 “김어준은 민주당의 총사령관”으로서 대중을 선동하여 “혐오와 증오 본능에 불붙인 방화범”이라는 것인데, 자신은 김어준 씨를 실컷 비난하고, 조롱하고, 증오하면서 정작 상대방에게 ‘혐오와 증오’를 탓하고 있다. 그러는 강준만 교수가 사실은 과거 ‘인물과 사상’ 1999년 4월호에서 김어준 씨와 ‘딴지일보’를 극찬했었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대표적으로 강준만 교수를 거명해서 그렇지, 김어준이라는 인물이 지식인 사회에서 뜨거운 감자처럼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말이 논쟁이지 대체로 일방적인 비난 내지는 혐오의 대상이라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것도 진보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더 야멸차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공개된 자리에선 김어준 씨를 좋게 말하는 경우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어쩌다 주변에서 세상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얼마 전 김어준 씨가 ‘뉴스공장’에서 했던 주장과 매우 흡사하다는 걸 자주 발견하게 된다. ‘뉴스공장’이 5년째(20분기) 청취율 1위를 해왔다는 건 대다수 사람들이 김어준을 신뢰하고 좋아한다는 얘기 아닌가. 그런데 유독 지식인들만 위선적으로 아닌 척하고 있을 뿐이다.
‘음모론자’ 김어준
김어준 씨를 비난하는 쪽에서 그에게 붙인 낙인이 ‘음모론자’다. 근거 없이 소설 쓰듯이 꾸며내서 사람을 곤경에 빠뜨린다는 얘기인데, 별명치고는 상당히 고약하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치고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음모를 꾸민 얘기라는 것인지 증거를 똑 부러지게 대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더욱이 음모론의 근거로 꼽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이라든가 ‘대통령선거 개표조작설’은 아직도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은 사건이다. 고작 검찰의 수사결과나 정부의 조사결과를 거론하면서 반박하는데, 이것은 김어준 씨가 의혹을 품는 당사자들의 주장을 증거로 내미는 꼴이 아닌가. 그나마 다른 언론사의 검증보도가 있기는 하나 이것 또한 결정적인 반대입증을 한 건 아니다.
사람인 이상 김 씨에게도 오류 가능성은 있겠지만 그것은 그 반대 측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사항이다. 그가 어떤 새로운 주장을 내놓는 과정을 보면 과학적 검증을 기반으로 상당히 치밀하고 논리적이다. 말하자면 누가 봐도 타당한 검증절차를 거쳐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대담한 가설을 내놓는 것과 같다. 학계에서는 그런 걸 권장하고 높게 평가하는 지식인들이 김어준 씨에게만 유독 가혹하다. 그가 수많은 팬덤을 거느리는 공인이기에 높은 책임을 요구한다지만, 그것은 미사여구일 뿐이다.
더군다나 그동안 권력에게 김어준은 어떤 인물이었던가를 상기해보라. 그에게 공인의 무게감을 요구하지 않아도 그 스스로 살피고 또 살펴서 주장했을 것이고, 그래도 문제가 있었다면 진작 감옥에 들어갔을 것이다. 오히려 그럼에도 권력에게 불편한 주장을 과감하게 내놓는 그의 용기를 더 높이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김 씨는 그의 공적 헌신에 비해 엘리트층으로부터 매우 박한 인정을 받고 있는 셈인데, 그럼에도 그는 지금껏 이런 것에 대한 서운함을 기미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에게 그토록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는 사람들에게 단 한 번도 불쾌감을 드러낸 적이 없다.
그는 오직 세상과 대화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힘들여 세상에 대한 자신의 인식지도를 내놨는데, 세상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쿨하게 접고 다시 다른 인식지도를 준비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듯 보인다. 그것이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세상에 기여하는 자기만의 방식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간혹 인기에 취해 해찰할 법도 한데 그는 지금껏 자신의 공적 작업 이외에는 어디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언뜻 보면 굉장히 즉흥적이고 감정에 치우쳐 덜렁거릴 것 같지만, 그것은 겉만 보고 잘못 판단한 것이다. 그처럼 열정을 차가운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무엇보다도 지배적 상징질서에 굴하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나아가는 ‘위버맨쉬(초인)’ 같은 그의 당당함이 사회 엘리트들에겐 늘 질투심과 경원의 대상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엘리트들에게 똥침을 날리다
김어준 씨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층이 갖고 있는 그러한 위선적 이중성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의도적으로 그들과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이미지를 컨셉으로 잡고 “똥꼬 깊숙이 똥침을 날리”며 비웃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내걸었던 간판들만 봐도 철저히 반엘리트적 풍자가 다분히 묻어난다. ‘딴지일보’ ‘나꼼수’ ‘뉴욕타임즈’ ‘다스뵈이다’ ‘뉴스공장’ 등은 그의 단정치 못한 외모와 비속어 섞인 말투가 오버랩되며 엘리트층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렇다고 김어준 씨는 요즘 흔한 말로 반지성주의자 내지는 무지성인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는 자신에게 인문학적 소양이 있음을 무척 자랑스러워하며 공학도답게 IT기술에 관한 한 전문가 수준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다방면의 전문가들 심지어 철학자나 과학자와의 대담에서도 전혀 꿇리지 않고 예의 그의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그는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직접 찾아 나서기도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엘리트 그룹의 허명을 깨부수고 진짜 실력자가 제대로 대접받게 하겠다는 것으로 읽힌다. 그러자면 우리 사회의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병목에 해당하는 언론의 ‘말길’을 제대로 내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인 것 같다.
미디어 혁명가, 김어준
그래서 나는 좀 다른 시각에서 김어준 씨를 바라보기를 권하고 싶다. 나는 그를 공적 마인드에 투철한 미디어 혁명가로 본다. 더 나아가 김어준 자체를 ‘미디어’로 보는 게 그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김어준 씨는 수명을 다한 기존의 미디어 시스템 자체를 바꾸고자 한다. 새로운 미디어기술이 등장하면 대개는 수익모델부터 따져보는 게 상례인데 김어준 씨는 엉뚱하게도 어떻게 하면 기존의 미디어 시스템 자체를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결합으로 손바닥 위에서 24시간 온라인 상태가 유지되는 시대가 도래하는 중이야. (…) 여기에 SNS가 결합되면서 정보 수용자가 자발적으로 그리고 손쉽게, 스스로 능동적 전파자가 될 수 있는 플랫폼이 탄생하는 중이야. 이제 콘텐츠만 좋으면 콘텐츠가 스스로 성장하는, 콘텐츠가 자기 가치를 스스로 입증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탄생하고 있는 거야. (…) 탱크로 밀어야만 혁명이 아니야. 기득의 구조가 뒤집힐 수 있으면, 다 혁명이야.” (‘닥치고 정치’ 303쪽)
국내외 비판적 언론학자들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디어의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문제 삼긴 했지만 소유권과 편집권의 분리독립 말고는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아무도 미디어 판 자체를 바꾸는 데까지는 상상력이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어준 씨는 마치 진작 예견하고 준비했던 사람처럼 과감히 실천했다. 실패가 예견된 실험이 아니라 현실에서 구현해 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성공적으로. ‘주체는 죽었다’라며 허무주의에 빠진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회변혁을 꿈꾸는 ‘주체는 살아 있음’을 제대로 보여준 성공사례인 셈이다.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를 함유한 메시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만드는 형식 자체가 이미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그는 간파한 것이다. 뉴스가 가진 자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뉴스를 당연하게 여기게 하는 뉴스생산 방식과 저널리즘 준칙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김어준 씨가 볼 때, 이것을 극복하려면 전혀 다른 뉴스 생산방식과 저널리즘 가치를 따르게 하는 새로운 뉴스공장을 설계하면 되는 일이었다. 때마침 등장한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줬다.
새로운 인터넷 뉴스공장을 세운 김어준
실제로 김어준 씨는 보수가 장악하고 있는 메시지 유통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정치는 설 자리가 없다고 봤다. 보수언론의 일방적 보도는 프레임을 설정하게 되어 아무리 정교한 논리도 그 프레임에 갇혀 사고하는 한 그 프레임을 강화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프레임 안에서 노는 진보는, 거기 등장하는 허접한 미시 논리를 깨는 데서 얻는 지적 쾌감에 도취되기 십상이지. 그런 후 자기가 엄청나게 똑똑한 일을 했다 생각하며 뿌듯하게 잠자리에 들지.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똑같은 세상이야.” 10여 년 전에 했던 그의 주장이 지금 우리 모습을 그대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매일 쏟아내는 보수언론의 가짜뉴스 프레임에 갇혀서 두더지게임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뉴스 전달자의 애티튜드가 콘텐츠이고 메시지”임을 강조하며 사실과 논리를 대중의 감성과 결합하는 ‘공감 저널리즘’이라는 새로운 보도양식을 창조해냈다. 자신이 미디어가 되고자 한 것이다(실제로 김어준 씨는 최근 ‘월간 김어준’이라는 오디오 저널을 제작하여 매달 팟캐스트로 제공하고 있다.).
암울했던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 시절 모든 언론마저 침묵하고 있을 때, 그는 홀로 ‘나는 꼼수다’와 ‘뉴스공장’이라는 대안 언론으로 골리앗에 맞서 “쫄지 않고 맞짱을 뜨며” 의로운 여론의 수로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윤석열 정권은 검찰과 보수언론을 앞세워 다시 여론지형을 어지럽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김어준의 ‘뉴스공장’이 여론 흐름의 버팀목 역할을 했었다. 이것을 단순히 진영논리로만 볼 수 없는 것은 20여 년 동안 그가 일관되게 걸어온 길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할 때마다 그것을 사회변혁과 접목시키는 '무학의 통찰'과 실제로 그것을 정의롭게 구현하려는 용기 있는 실천의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새로운 저널리즘 방식에 대중은 깊은 신뢰와 공감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 주면 ‘뉴스공장’ 시즌 2가 시작된다. 또 어떤 새로운 일이 벌어질지 무척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