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빚 1인당 1억인데…빚 더 내라 부추기는 당국
1인당 가계대출 사상 최초로 9500만원 돌파
한국은행, 경기를 살리겠다며 금리 인하 시사
금감원장, 가계대출 원활히 해주겠다고 공언
빚더미 위에 빚을 내 경기 부양하겠다는 건가
국내 가계대출 차주의 1인당 평균 대출 잔액이 올해 3분기 말 사상 최초로 9500만 원을 돌파했다. 가계대출의 폭증은 경제 주체 중 하나인 가계를 질식시키는 주된 요인이다. 놀라운 건 가계대출의 증가세를 엄격히 관리해야 할 한국은행이 경기부양을 이유로 내년 초 기준금리 인하를 공언했다는 사실이다. 이복현 금감원장 역시 가계대출을 원활하게 해주겠다고 호언했다. 금리를 낮추고 대출을 쉽게 해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건 마약을 투여해 원기를 회복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금융당국이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고 있다.
가파르게 늘어난 가계부채, 비은행 연체율도 급증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박성훈 의원이 한국은행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3분기 말 기준 가계대출 차주의 1인당 평균 대출 잔액은 9505만 원으로 집계됐다. 지난 2021년 1분기 말 9054만 원으로 처음 9000만 원을 넘은 뒤 3년 6개월 만에 500만 원가량 대출 잔액이 증가한 것이다.
충격적인 사실은 이 기간 기준금리는 0.5%에서 3.5%로 수직 상승했으나 가계대출 증가세는 꺾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지난해 2분기 말 9332만 원을 기록한 뒤 올해 3분기 말까지 5분기 연속 증가하는 등 최근 들어 증가세가 유독 두드러졌다.
전체 가계대출 차주 수는 3분기 말 1974만 명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3분기 말 1983만 명에서 4분기 1979만 명, 올해 1분기 1973만 명, 2분기 1972만 명 등으로 점차 감소하다가 4분기 만에 증가세로 전환했다.
연체율 상승세도 심상치 않다. 한 달 이상 원리금 연체 기준 가계대출 연체율은 올해 3분기 말 0.95%로, 2분기 말보다 0.01%포인트 상승했다. 은행의 가계대출 연체율은 2분기와 3분기 0.36%로 같은 수준을 유지했지만, 비은행 연체율은 2.12%에서 2.18%로 0.06%포인트 높아졌다. 비은행 가계대출 연체율은 지난 2015년 3분기(2.33%) 이후 9년 만에 최고 수준이었다. 비은행은 상호저축은행, 상호금융조합, 여신전문금융회사(여전사), 보험사(보험 약관 대출금 제외) 등을 포함한 개념이다.
가계빚 폭발직전인데 금리 내리겠다는 한국은행
가계부채가 폭발 직전인데 한국은행은 내년 경기 위험 등을 고려해 기준금리를 더 낮추겠다고 예고한 바 있다. 한은은 지난 25일 공개한 '2025년 통화신용정책 운영 방향' 보고서에서 "물가 상승률 안정세를 이어가고 성장의 하방 압력을 완화하는 동시에 금융 안정 리스크(위험)에도 유의하면서 기준금리를 추가로 인하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물가 상승률이 안정된 흐름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정치 불확실성 증대와 주력 업종의 글로벌 경쟁 심화, 통상환경 변화 등으로 경기의 하방 리스크가 커진 점을 고려하겠다"고 강조했다.
쉽게 말해서 경기부양을 위해 기준금리를 추가로 인하하겠다는 것인데, 이미 임계점을 돌파한 가계부채에 기름을 부어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발상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가계부채 원활하게 해주겠다는 이복현 금감원장
한국은행만 문제가 아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20일 "내년 초부터는 가계대출 관련 실수요자에 자금 공급을 더욱 원활히 하고, 특히 지방 부동산 가계대출 관련해서는 수요자가 더욱 여유를 느끼게 하겠다"고 밝혔다. 가계대출을 쉽게 해주겠다고 기염(?)을 토한 것이다. 이 원장의 말에 호응하는 것인지 은행들도 조금 당겼던 가계대출 고삐를 늦출 채비를 하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은행은 내년 1월부터 현재 적용 중인 가계대출 규제 가운데 일부를 없애거나 완화할 예정이다. 내부적으로 현재 1억 원으로 묶인 주택담보 생활안정자금 대출의 한도를 늘리거나 폐지하는 방안, 지난 8월 중단한 신규 주택담보대출의 모기지보험(MCI·MCG) 적용을 부활하는 방안 등이 검토되고 있다.
MCI·MCG는 주택담보대출과 동시에 가입하는 보험으로, 이 보험이 없으면 소액임차보증금을 뺀 금액만 대출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상 대출 한도가 축소되는 것과 같다. 반대로 보험 적용이 다시 이뤄지면 서울 지역의 경우 5000만 원 이상 대출 한도가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
NH농협은행도 이달 30일부터 비대면 직장인 신용대출 4개 상품(NH직장인대출V·올원 직장인대출·올원 마이너스대출·NH씬파일러대출)의 판매를 재개하고, 새해 1월 2일부터 임대인 소유권 이전 등의 조건부 전세자금대출도 다시 허용하기로 했다. 기업은행 역시 생활안정자금 주택담보대출, 전세자금대출 등 주로 실수요 성격이 강한 대출부터 푸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앞서 신한은행은 이미 17일부터 생활안정자금 목적 주택담보대출의 한도를 1억 원에서 2억 원으로 상향 조정했고, MCI와 대출 모집인을 통한 대출도 다시 취급하기 시작했다. 미등기된 신규 분양 물건과 1주택 보유자에 대한 전세자금대출도 재개됐다. 다만 현재 대출 신청은 받더라도 내년 실행되는 대출부터 완화된 규정이 적용된다. 아울러 내년에 신한은행은 현재 '연 소득 100% 이내'로 제한된 신용대출 한도와 비대면 대출도 풀 방침이다.
하나은행도 지난 12일부터 내년 대출 실행 건에 한해 비대면 주택담보·전세자금대출 판매를 재개한다고 밝혔고, 우리은행도 비대면 가계대출 중단 조치를 오는 23일 해제할 예정이다. 가계대출 억제 조치는 지난 7∼8월 수도권 주택 거래 급증과 함께 가계대출도 크게 뛰자 금융당국이 "증가 속도를 늦춰달라"고 은행권을 압박하면서 시작된 바 있다.
체력을 키워야지 마약으로 원기 회복은 곤란
한국은행과 금감원은 그럴싸한 명분을 대고 있지만 기준금리를 낮추고 조였던 가계대출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건 폭발 직전의 가계부채에 기름을 붓더라도 단기간에 경기만 회복하면 된다는 노림수에 불과하다. 빚더미 위에 있는 가계에게 빚을 더 내게 해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건 기초체력은 키우지 않고 단기간에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마약을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과도한 부채를 견디지 못하고 가계가 파산하는 경우 그 가계가 재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가계부채 관리를 푸는 건 절대 금기다. 게다가 원화가치가 휴지가 되는 마당에 기준금리까지 내리면 원화 가치는 더 떨어지고 해외자금의 이탈과 수입물가의 상승 등 치명적인 부작용만 낳을 것이 자명하다. 이쯤되면 한국은행과 금감원의 협업이 정말 대한민국 경제를 나락으로 몰고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