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 선동하는 가짜뉴스도 처벌 안 한다면…
70대 기자, 민주축제장과 흑색선전 현장을 가다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핫팩 하나가 전해준 연대의 감정
한미리스쿨을 이전하기 위한 펜션 매입이 늦어지는 바람에 임시 주거지로 이삿짐을 옮겨놓고 한동안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생활을 하게 됐다. ‘주거 불안’ 대신 얻은 이점은 서울에서 열리는 ‘윤석열 파면 광화문 범시민대행진’ 등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제주의 각종 집회에는 참석했지만 범시민대행진의 모태가 된 서울 촛불행동 집회와 시위에는 참가하지 않아 민주시민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미안함이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참석한 범시민대행진에서 우리 부부는 오히려 큰 위로를 받았다. 그동안 계층내 작은 불공정에 주목하고 계층간 큰 불평등은 외면하는 청년들에 실망해 ‘청년들은 왜 거대한 불공정에 분노하지 않는가’라며 분개하는 글들을 써왔는데, 내가 청년들을 잘못 본 거였나? 아래는 4년 전 <경향신문>에 쓴 칼럼인데 청년층은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왔던 거였다.
‘우리가 진정 분노해야 할 대상은 무엇인가? 기득권층을 재생산하는 교육제도, 자산격차를 무한 확대하는 부동산제도, 지지부진한 검찰개혁, 출발도 못한 언론개혁, 기득권 옹호센터가 된 일부 개신교단, 불법승계에 ‘올인’해온 삼성재벌…. 이 무참한 현실에 왜 분노하지 않는가?’
기성세대가 만든 능력지상주의와 지독한 경쟁사회의 포로가 되어 거리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을 뿐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자 일제히 국회로, 광화문으로 쏟아져 나왔다. ‘내신 망한 고딩 연합’이란 깃발을 든 앳된 고교생들은 입시제도를 풍자하는 듯했다.
2030 젊은 여성이 주축인 참가자들은 연대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동십자각 앞 주무대를 바라보며 청년들 사이에 서있는데 장갑도 없이 종이 피켓을 들어올리고 구호를 외치는 우리 두 노인이 ‘기특해’ 보였는지 20대 여성이 마누라에게 핫팩 하나를 건네는 게 아닌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축제장
윤수일의 <아파트>,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 김수철의 <젊은 그대>가 흘러나오면 열심히 따라 불렀지만,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로제의 <아파트> 등은 ‘아파트 아파트’ 같은 후렴만 따라 부를 뿐 도통 가사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2030 여성들은 6070의 노래들을 모두 열창하는 거였다. 다가가지 않은 건 청년들이 아니라 노인들이었다.
그러나 표정만은 노인∙청년 할 것 없이 모두가 밝았고 행사장은 그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축제장이었다. 비장하면서도 즐거웠다. 주무대가 있는 동십자각에서 광화문 앞을 지나 정부서울청사 북쪽 서십자각에 이르기까지 인파로 뒤덮였다. 광화문 앞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휘게 하고 월대를 복원했을 때 ‘시민불편을 고려하지 않은 복고주의가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게 집회하기 좋은 광장이 됐다. 광장에 어둠이 깃들자 아이돌 응원봉이 형형색색의 불빛쇼를 연출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6070 농민과 2030 여성의 감동적 연대
청년들과 노년층의 극적인 만남은 남태령에서 이루어졌다. 전국농민회총연맹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 짠 ‘세상을 바꾸는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 대행진이 남태령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광화문 집회와 행진을 마친 시민 등이 현장에 나타난 것이다.
2015년 겨울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숨진 이후 농민 시위에 일반시민, 특히 2030 여성들이 이토록 굳게 연대한 적은 없었다. 농업과 농촌에 관한 그릇된 인식은 언론에 의해 확대재생산 되어왔다. 농업에 ‘사양산업’이라는 딱지가 붙고, 농업은 공산품 수출을 위해 희생돼도 좋은 부문이고, 농업투자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인식이 일반화했다.
이번에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양곡관리법 등 농업4법에 거리낌없이 거부권을 행사한 것도 이런 잘못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속 20km로 달리는 트랙터를 몰고 6일간 상경투쟁을 벌인 것은 농민들의 분노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남태령에 가지 못한 시민들은 따뜻한 식음료, 핫팩, 담요, 장갑, 생리대 등을 대거 대치 현장으로 보냈고, 난방버스를 대절해 잠시 몸을 녹일 공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끝으로 해산했지만 1박2일간 남태령과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 집회 현장은 대동세상 그 자체였다.
기사를 쓴답시고 남태령과 한남동에 가지 못한 미안함은 전국농민회총연맹에 소액이나마 후원금을 보내는 것으로 조금 덜었다. 사실 독일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강대국과 북유럽 복지국가들은 모두 다 공업국인 동시에 농업국이다. 농업이 공업을 뒷받침하고 농촌사회가 활력을 유지하게 된 데는 농업에 관한 언론의 애정과 정책방향 제시 등이 큰 구실을 해왔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으로 일할 때 대산농촌재단 후원으로 농촌전문기자∙피디 양성과정을 만든 것도 우리나라 농촌보도에 안타까움이 컸기 때문이다.
내란 선동하는 극우집회
광화문 탄핵 찬성 집회에 참석하는 틈틈이 동화면세점 앞 탄핵 반대 집회도 취재했다. ‘선관위 조작 선거 내용 밝혀라’, ‘선관위 해체’라는 펼침막들이 걸려 있고, 대형 화면에는 부정선거 관련 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육군 3사 구국동지회’, ‘ROTC 자유통일연대’ 같은 깃발 아래 군복을 입은 이도 꽤 있었고, 구호나 손 팻말도 살벌한 것들이 난무했다.
단상에서는 극우 성향 목사나 유튜버들이 여전히 부정선거론을 주장하거나 “계엄령은 구국의 결단”이라며 내란을 옹호했다. 실은 조금만 사실확인을 해보면 알 수 있는 사안인데도 선동과 지적 게으름이 대중을 확증편향으로 몰아가고 있다. 전광훈 목사는 “야당 192명 중 절반이 부정선거로 뽑힌 가짜 국회의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바로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탄핵 찬성 집회마저 왜곡해서 전달했다. 자기네 탄핵 반대 집회에는 200만 명이 참석했다며, 찬성 집회 쪽이 행진을 시작하자 “좌파들은 천 명이 모였다가 해산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침소봉대와 상대방 폄하는 가짜뉴스를 만드는 전형적 수법이다.
전광훈 목사가 설립한 자유통일당 관계자들은 곳곳에서 노인들에게 다가가 입당원서를 내밀거나 당비를 요구했다. 집회가 끝날 무렵 지하철을 탔을 때 한 노인은 “저쪽은 돈 받고 집회에 참석하고 우리는 돈 내고 참석한다”며 자랑스레 떠벌렸다.
대통령과 국방장관까지 빠져든 부정선거 음모론
정말 심각한 문제는 극우 유튜버들이 조작한 부정선거 음모론에 일국의 대통령과 국방장관, 군 핵심 요직에 있는 자들, 그리고 전직 대통령권한대행과 홍보수석까지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피비린내 진동하는 내란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윤석열 정부의 선관위는 물론 국정원까지 부정선거론을 일축했는데도 그들은 가짜뉴스를 믿거나 이용하려 했다.
내란 주동자와 동조자들은 내란죄로 엄중히 다스려지겠지만 우리 사회가 너무나 잘못 돌아가고 있는 점은 내란을 선동한 극우 유튜버들 처벌에 관해서는 아무런 논의가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형법 90조에는 내란을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3년 이상 유기징역이나 유기금고에 처하고 선동 또는 선전한 자도 처벌하도록 돼있다. 김경호 변호사는 소셜 미디어에 2015년 1월 22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예로 들었다. 그는 ① 헌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국가기관(선관위)의 권능을 무력화하려는 폭력적∙군사적 개입을 명시적∙반복적으로 주장하는 경우, ② 해당 발언이 다수 대중에게 퍼져, 실제 내란적 심리를 고취할 수 있는 영향력이 확인되는 경우, ③ 발언의 맥락상 단순한 비유나 비판을 넘어 사실상 불법적 폭동, 군사개입을 정당화하거나 촉구하는 명확한 메시지가 있는 경우,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민주공화국은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악용한 사례가 아니라면 내란죄 법집행에서 온정주의는 큰 부작용을 낳게 된다. 나폴레옹 이후 영국과 프랑스에 쿠데타가 불가능해진 이유는 폭정을 저지른 왕의 목을 한번씩 날렸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헌정을 유린한 대통령이 셋이나 나왔지만 박정희가 측근에게 암살됐을 뿐 전두환 등은 자연사했다. 불법 계엄문건을 작성한 기무사령관도 검찰이 무혐의 처분했다. 민주공화국은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