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실, 결핵과 싸워온 120년 인류애의 역사

1904년 덴마크 한 우체국 직원 아이디어로 탄생

한국, 의료선교사 셔우드 홀이 1932년 처음 발행

해방 후 문창모 주도…결핵협회 창립 후 정상 궤도

OECD 회원국 중 결핵 발생률 1위, 사망률 3위

2024-12-21     이희용 줌렌즈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중년 이후 세대라면 크리스마스카드를 우편으로 보낼 때 봉투에 우표와 함께 붙이던 크리스마스실(Christmas Seal)을 기억할 것이다. 결핵 퇴치 기금 마련을 위해 1904년 덴마크에서 처음 등장했으니 올해로 120주년을 맞았다.

결핵은 공기를 통해 전파되는 특성 때문에 산업혁명 이후 유럽 각 도시에 인구가 밀집하자 빠르게 번져나갔다. 20세기 초 덴마크에서도 결핵이 창궐해 노약자를 중심으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코펜하겐의 우체국 직원 아이나르 홀뵐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산더미처럼 쌓이는 카드와 선물 소포를 정리하다가 우편물에 우표와 함께 동전 한 닢짜리 실을 붙여 보내는 캠페인을 벌이면 손쉽게 기금을 모을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국왕 크리스찬 9세의 지원을 받아 1904년 12월 10일 세계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덴마크뿐 아니라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불과 20~30년 만에 거의 모든 나라가 발행할 정도로 확산됐다.

 

세계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한 덴마크의 아이나르 홀뵐

붉은색 복십자는 결핵 퇴치 운동의 상징 마크

크리스마스실에 찍힌 붉은색 복십자 문양은 항(抗)결핵운동의 상징 마크다. 1902년 10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1회 국제결핵예방회의에서 프랑스 대표가 제안해 채택됐다. 복십자는 11세기 제1차 십자군전쟁 당시 프랑스 로렌공이 방패에 그려 넣은 문장(紋章)이어서 로렌 십자가로도 불린다. 인류 공동의 적인 결핵과 싸워 이기자는 뜻을 담았다. 미국결핵협회가 1907년 처음 크리스마스실에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통용됐다.

 

1932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행된 크리스마스실. (대한결핵협회 제공)

필리핀은 1910년, 일본은 1925년 크리스마스실을 도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32년 셔우드 홀이 처음 발행했다. 그는 1928년 황해도 해주에 한국 최초의 결핵 전문병원인 해주구세요양원을 세운 인물이다. 어린 시절 사업가를 꿈꾸다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가 결핵으로 숨지는 것을 보고 의사가 돼 한국인을 결핵의 위협에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어머니는 1890년 국내 최초의 여성전문병원 보구녀관(普救女館)의 2대 관장으로 부임한 미국의 의료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이다. 1년 뒤 입국한 캐나다 출신의 의료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과 1892년 국내 최초로 서양식 결혼식을 올렸다. 셔우드는 1893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이듬해 아버지가 발진티푸스로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로제타 셔우드 홀(가운데) 가족이 박에스더(왼쪽) 부부와 함께 촬영한 사진. 홀 여사 품에 안긴 아기가 딸 이디스이고 왼쪽이 아들 셔우드다. (이화의료원 제공)

로제타는 한국에서 자신의 통역을 맡았다가 의료보조훈련반에서 공부한 박에스더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박에스더의 본명은 김점동이었으나 세례명을 따 에스더로 개명한 데 이어 박여선과 결혼한 뒤 서양식으로 남편 성을 따랐다.

로제타는 1897년 다시 내한해 평양과 인천에 병원을 세우고 맹아학교도 설립했다. 한국 여성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 박에스더도 1900년 서재필에 이어 두 번째이자 한국인 여성 의사 1호가 된 뒤 돌아와 진료에 헌신했다. 그러나 과로에 폐결핵이 겹쳐 1910년 4월 13일 3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제가 거북선 도안 불허하자 남대문으로 대체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셔우드는 자신이 이모나 누나처럼 따르던 박에스더가 숨졌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진로까지 바꿨다. 토론토의과대를 졸업하고 뉴욕 결핵요양소에서 전문의로 활동하다가 1926년 부인 메리언 버텀리와 함께 한국으로 왔다. 해주구세병원 원장과 운산금광 담당의사를 맡아 환자들을 진료하는 한편 의창학교 교장도 겸했다.

 

홀(가운데)이 두 자녀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왼쪽이 부인 메리언, 오른쪽이 어머니 로제타이다.

결핵 예방에는 충분한 영양 공급과 깨끗한 환경이 필수적이다. 결핵이 후진국병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는 세계 최다 발병 지역으로 꼽혔다. 셔우드는 결핵전문 요양병원의 설립 필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결핵 환자는 다른 나라에서는 스무 명에 한 사람 비율인데 한국에서는 다섯 명 중 한 사람꼴이다. 일단 병균이 침투하면 한국인은 나을 희망이 거의 없다고 여긴다. 결핵은 불치병으로 ‘부끄러운 일’이며, 악귀의 기분을 상하게 해 운명적으로 받는 벌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요양원은 치료뿐만 아니라 계몽과 교육 목적에서도 절실하다.”

해주구세요양원은 1928년 10월 28일 문을 열었다. 본관 1동, 기숙사 5동, 입원병동 6동, 로제타교회당, 오락실, 부속농장 등의 시설에 X선촬영기, 인공태양등, 인공기흉기, 전기치료기를 비롯한 첨단장비를 갖췄다.

그러나 기부금과 총독부 보조금만으로는 운영비를 충당하기 어려웠다. 결핵 예방 홍보와 교육, 의료보조원 양성 등에도 많은 돈이 필요했다. 기금 마련을 위해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기로 하고 일제 당국과 협의를 벌였다.

처음 만든 도안에는 병마를 퇴치하는 상징으로 거북선을 그려 넣었다. 일제 당국은 독립정신을 고취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허가하지 않았다. 대신 숭례문(남대문)이 국내 최초의 크리스마스실 주인공이 됐다. 1932년 12월 3일 서울YMCA에서 찍어냈다. 장당 1전으로 모두 3만 5000장을 발행해 350원을 모금했다.

 

셔우드 홀이 처음 구상한 크리스마스실의 거북선 도안. 영어로 이순신 장군 이름도 적어놓았으나 일제의 반대로 발행되지는 못했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대한결핵협회 제공)

결핵 낫게 하는 부적으로 착각한 사람도 있어

셔우드는 그 뒤로도 9차례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다. 한복 차림의 소년소녀들이 연날리기, 널뛰기, 팽이치기, 그네타기. 제기차기 등 전통 민속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주로 담았다. 1940년에도 금강산을 배경으로 일본 천황의 연호 대신 1940년이라는 서기 연도를 적어 인쇄했다가 일제에 의해 압수당했다. 산 크기를 작게 바꾸고 ‘9번째 발행 연도’란 뜻으로 ‘Ninth Year’로 수정해 재발행했다.

당시 성탄절에 카드를 주고받는 풍습조차 모를 정도로 크리스마스실에 관한 인식이 부족하다 보니 재미있는 일화도 많았다. 결핵 퇴치를 위해 크리스마스실을 구입하라고 하니까 그게 부적인 줄 알고 몸에 지니고 있다가 “왜 결핵이 낫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소동을 빚는가 하면, 해주구세요양원 입원권으로 잘못 알고 “얼마나 사면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생긴 모양이 비슷하다 보니 우표 대신 크리스마스실만 봉투에 붙여 보냈다가 수취인에게 배달이 되지 않는 일은 한참 뒤까지 이어졌다.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의 셔우드 별장. 김일성 별장으로도 쓰였으며 지금은 역사안보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왼쪽은 별장 외관, 오른쪽은 내부 전시 공간. (고성군 제공)

그는 독일인 건축가 베버에게 의뢰해 1938년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진포 해변 언덕에 원형 양옥으로 서양 선교사 별장을 지었다. 북위 38도선 이북에 위치해 분단 직후엔 북한 땅이었다가 6·25 전쟁 때 수복됐다. 1948년 김일성 일가가 묵은 적이 있어 김일성 별장으로 흔히 불리는데, 최근 역사안보전시관으로 꾸며졌다.

고성군은 지난해 문을 닫은 화진포 생태박물관을 ‘화진포 셔우드 홀 문화공간’으로 꾸미는 공사를 벌이고 있다. 역대 크리스마스실을 비롯해 희귀 사진자료 등 대한결핵협회가 소장한 유물 100여 점을 기증받았다. 내년 3월 정식 개관할 예정이다. 고성군은 화진포해수욕장도 ‘8월의 크리스마스 해수욕장 in 화진포’란 이름으로 단장해 내년 여름 새롭게 선보인다. 크리스마스 빅트리 광장과 크리스마스실 워크웨이를 설치하고 산타 문화탐방 열차를 운행할 예정이다. 셔우드는 일제에 미움을 사 태평양전쟁 직전인 1941년 일본 헌병대에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뒤 5000엔 벌금형을 받고 추방됐다. 1963년 은퇴할 때까지 인도에서 결핵 퇴치에 헌신했으며, 1978년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이란 제목의 자서전을 남겼다.

셔우드는 1991년 4월 5일 미국 리치먼드에서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에 묻혔다. 이곳에는 그의 부모, 여동생, 아내, 딸 등 6명이 함께 잠들어 있다. 정부는 셔우드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고 서울시도 명예시민증을 전달했다.

 

카드 주고받는 풍습 사라지며 실 유행도 퇴조

셔우드의 추방과 함께 크리스마스 실 발행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명맥을 이은 인물은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문창모였다. 그는 해주구세요양원에 근무하며 셔우드 박사를 도와 항결핵 사업을 펼친 경험이 있었다.

1949년에는 한국복십자회, 1952년에는 한국기독의사회 이름으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으나 규모는 얼마 되지 않았다. 1953년 11월 6일 대한결핵협회 창립 이후 정상 궤도에 올랐다. 문창모는 결핵협회 초대 사무총장을 맡았다.

 

해방 후 크리스마스실 발행을 주도한 문창모 박사.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제공)

그는 구세요양원이 문을 닫자 해주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다가 해방 후 월남해 인천병원장, 마산국립결핵요양소장, 세브란스병원장, 국제대 학장, 원주기독병원장 등을 역임했다. 일제 말 감리교단이 친일 노선을 따르자 반대 투쟁을 벌였으며, 보육원과 양로원 40여 개를 설립하고 지원했다. 1992년 85세 최고령으로 전국구 국회의원(통일국민당)에 당선되기도 했다.

1964년 원주에 문이비인후과의원을 개업해 2001년 3월까지 현역 의사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9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강원도문화상, 건국포장, 평화복지인물대상, 대한적십자사 광무장, 가나안농군학교 일가상, 인간상록수상 등을 받았고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크리스마스실은 1960년대 이후 크리스마스카드를 주고받는 풍습이 널리 유행하며 함께 판매량이 늘어났다. 우표 수집 취미가 확산됨에 따라 크리스마스실을 수집하는 사람도 생겼다. 초·중·고등학교를 통해 단체 판매를 실시하며 학급별로 수량을 할당해 강매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PC통신이 등장하고 2000년대 이후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급속히 보급되면서 크리스마스카드를 주고받는 풍습은 추억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고, 크리스마스실을 사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대한결핵협회는 1953년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고 있다. 민속화, 풍경화, 정물화 등이 도안으로 많이 활용됐는데 2008년 우주인 이소연, 2009년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 2011년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 캐릭터, 2021년 유재석 부캐(부캐릭터의 준말) 등도 활용됐으며 올해는 애니메이션 ‘브레드 이발소’ 캐릭터들이 주인공이다.

최근 들어서는 카카오톡 이모티콘도 제작하고 있으며 퍼즐, 금속 스티커, 책갈피, 머그컵, 열쇠고리, 배지, 에코백, 패딩담요, 노트·펜 세트, 자석 등 굿즈(상품)를 다각화해 항결핵 사업 기금을 마련하고 있다.

 

29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대한결핵협회 경기도지부에서 직원들이 2024년도 크리스마스 실(seal)을 보여주고 있다. 대한결핵협회는 브레드이발소와 함께 '2024 브레드이발소 실'을 선보이며 결핵 및 호흡기 감염병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적극적인 예방행동을 독려한다. 2024.10.29. 연합뉴스

지난해 결핵이 코로나 제치고 사망 원인 1위

결핵은 기원전 7000년 경 선사시대 유골에서도 결핵균 감염 흔적이 발견될 정도로 오랫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전염병이다. 고대 이집트와 인도에서도 발병 기록이 남아 있고 지금까지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낳은 병이다. 페스트가 온몸을 검게 만들어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뜻으로 흑사병(黑死病·Black Death)이라고 불리는 것에 빗대 결핵은 환자 낯빛을 창백하게 만든다고 해서 백사병(白死病·White Death), 혹은 백색 페스트(White Plague)란 별칭을 얻었다.

결핵균은 세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가 1882년 발견했다. 1906년 BCG 접종이 개발되고 1943년 스트렙토마이신 등 항결핵제가 나오면서 예방과 완치가 가능한 질병으로 바뀌었으나 결핵의 공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결핵균을 발견한 로베르트 코흐. '코흐의 4원칙'을 정립하고 염색법과 현미경 촬영법 등을 개발해 '세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세계보건기구(WHO)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새롭게 결핵 진단을 받은 환자 수는 820만 명에 달하고 125만 명이 결핵으로 숨졌다. 코로나19를 제치고 다시 감염병 사망 원인 1위로 올라선 것이다. 국내 결핵 환자는 2022년 기준 1만 9540명으로 인구 10만 명당 39명꼴이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결핵 발생률 1위, 사망률 3위에 올라 있다.

전 세계에서 결핵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은 것도 걱정스럽지만, 개발도상국들의 질병 퇴치를 돕는 공적개발원조(ODA)의 모범국가 한국이 아직도 후진국형 전염병에 시달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실 발행 120주년인 만큼 크리스마스실을 사지는 않더라도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며 결핵 퇴치 운동에 앞장선 인물들을 기억하는 것은 어떨까.

 

관련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