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70년대생의 고백…민주주의, 또 한 번 빚을 졌다
60년대생에 대한 오해와 다시 끄집어낸 고마움
진실을 오롯이 마주하고 있는 치열한 2030세대
세대 간 화해 속에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밝다
이 글은 특정 정치인을 찬양하기 위함이 아니다. 계엄군을 막아선 시민사회의 힘과 헌신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계엄 선포에서 탄핵소추안 가결에 이르기까지 짧지만 강렬했던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평가를 지켜보면서 빠진 부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진실의 한 조각을 기록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늦기 전에, 논공행상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아직 끝나지 않은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또 한 번 민주주의를 지켜낸 이들의 이야기 말이다. 지난날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든 아니든 그들은 모두 1960년대생이다.
1960년대생 조국이 ‘잠시’ 떠나게 됐다. 김민석과 이재명, 박선원, 정청래는 비장했다. 이승환은 ‘노구’를 이끌고 거리의 연단에 섰다. 그리고 이들을 지켜본 유시민은 울었다.
우리 1970년대생의 오해
나는 1970년대생이다. 그동안 ‘우리’ 70년대생은 60년대생이나 지금의 2030세대에 비해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했다. 물론 우리도 한때는 ‘X세대’라 해서 신문의 사회면에서 1990년대의 아이코닉한 존재로 다루어지기는 했다. 다만 그 상징성은 ‘오렌지족’ ‘정치적 무관심’ ‘개성’으로 포장된 개인주의 등 부정적이랄 것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별종’과 맞닿아 있다. ‘IMF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것도 70년대생이다. 그래서 우리는 앞선 민주화 세대와는 다른 종류의 연대감을 공유한다. 굳이 말하자면 ‘낀 세대’ 정도가 아닐까 한다.
‘낀 세대’는 형언하기 어려운 일종의 피해 의식에서 비롯된 자조적인 말이다. 우리는 1980년 광주에서 시작해서 1987년 헌법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여정에 함께하지 못한 ‘원죄’에 더해 민주화를 ‘당연’한 것으로서 그 과실을 향유만 한 무임승차자라는 오명을 부정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부채 의식’이라고 부를 테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다소 가혹한 형벌과도 같았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없었다는 소심한 항변은 오히려 우리 스스로를 위축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화 세대로부터 스스로 ‘격리’되는 길을 택했다. 선배님들의 헌신에는 고맙지만 미안함은 없다고, 새로운 시대에 선배님들이 고수하는 이념과 방식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낡고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하다고, 우리는 다르다고 말이다.
그 후로 우리가 목격한 것은 민주화 운동의 여진 속에서 방황하는 선배들과 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유명한’ 선배님들이 하나둘씩 진보든 보수든 정치인이 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운동권’이라는 꼬리표가 어느새 권력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으로 바뀌었다고 우리는 받아들였다. 그것이 60년대생에 대한 오해가 시작된 지점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히 보상을 받지 않았냐고, 더는 우리에게 영웅담을 들이밀지 말라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오해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87체제’가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민주화 운동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12.3 내란’은 그러한 우리의 착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너무 쉽게 한국 민주주의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다른 세대와 달리 우리 70년대생에게는 그 모든 오해에 대한 처벌처럼 느껴졌다.
70년대생 한동훈의 미숙함
고백한다. 그래서 우리의 대응은 60년대생의 ‘경험’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만큼 미숙했다. 함께했지만 그들을 따랐을 뿐이다. 그것마저도 무의식 속으로 욱여넣었던 민주화 세대에 대한 고마움을 끄집어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의 참여는 그들의 오래 묵은 아픔과 분노, 그리고 집단 트라우마에 기댄 것에 불과했다.
70년대생 한동훈. 그가 우리를 대표하지는 않지만 그의 미숙함이 해묵은 우리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우리 대다수가 이번 사태로 60년대생에 대한 고마움을 끄집어내어 오해를 풀었던 것처럼 그도 그러한 반성과 화해의 과정을 거쳤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꽤 오랫동안 그 길 위에서 방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 세대 간 화해에서 시작되었다
생뚱맞지만, 최근 7년 만에 화려하게 컴백한 가수 지드래곤에 대해 2030세대의 누군가가 남긴 말을 소개하고자 한다. “찬란하게 발전해 왔고 빛나지만 치열하게 경쟁하고 속은 썩어가면서도 꺾이지 않기 위해 또 희망을 꿈꾸는 우리 세대. 지디는 그 한가운데서 가장 예술적으로 고뇌하며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통하는 거지.”
불과 얼마 전까지 기성세대가 백안시했던 2030세대는 이렇게 갖은 오해로 아파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희망이 민주주의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 기성세대는 알지 못했다. 그들은 민주주의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오롯이 마주하고 있었다. 60년대생이 2024년에도 통한 것처럼 치열하게 사는 2030세대 또한 먼 훗날에도 통할 것이다.
이것으로써 60년대생에 대한 70년대생의 오해가, 2030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오해가 풀린 것은 아닐까 희망해 본다. 그래서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밝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