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총구 앞에서 민주주의 수호? 착각인 이유

계엄령 사태 언론보도 진실했다는 선배들의 칭찬

사실보도 없는 한국언론에서 예외적 경우였을 뿐

다시 정쟁 정치적 공방 중계하기로 돌아가는 중

2024-12-05     이명재 에디터

“계엄군의 총구 앞에서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언론인들의 진실보도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한국의 언론, 언론인들이 모처럼만에 칭찬을 받았다.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해직 언론인들과 민주화운동에 애쓴 이들이 중심이 된 자유언론실천재단, 언론비상시국회의 등 6개 단체들이 4일 낸 성명에서 이같이 후한 평가를 받은 것이다.

언론의 보도는 과연 이 같은 평가를 받을 만큼의 제 역할을 했는가. 6개 단체 선배 언론인들의 칭찬은 언론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라기보다는 그래주기를 바라는 기대와 요청으로 해석되지만, 그럼에도 이번 계엄 사태에 대한 사실 보도에서 언론은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긴급 대국민 담화를 통해 비상계엄 해제를 선언한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민주노총과 참여연대를 포함한 여러 시민단체가 진행하는 '불법 계엄 규탄 내란죄 윤석열 퇴진 국민주권 실현을 위한 전면적 저항운동 선포 전국 비상 행동'에 취재진이 몰려 있다. 2024.12.4 연합뉴스

이번 비상계엄 사태에 대한 한국 다수 언론의 보도는 언론의 최소한이며 출발이랄 수 있는 '사실 보도’가 상당히 이뤄진 경우였다. 다만 한국의 언론들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사실 보도가 이뤄진 것이었다는 점에서 한국 언론의 예외적인 경우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의 언론에서 사실 보도는 이제 매우 보기 힘들게 됐다. 수많은 ‘사실’들에 대한 언론의 선택은 매우 차별적이고 자의적, 혹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명백한 사실들일지라도 어떤 사실들은 언론에 사실로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들의 전체가 아닌 사실의 극히 일부만이 언론에 의해 사실로 채택돼 보도되었다. 사실보도의 이름으로 절반의 사실이나, 큰 사실을 가리는 작은 사실의 보도가 되기 일쑤인 지경이다.

이번 비상계엄 사태 발생 직후부터의 언론의 보도는 그런 점에서 기본적인 사실 보도만을 하더라도 그 영향과 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 것이었다는 면에서 한국 언론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한국 언론에 이번의 비상계엄 상황이 사실 보도가 된 것은 언론에게 이것이 사태라기보다는 하나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언론은 이를 하나의 사건, 이벤트와 같은 사건의 발생과 전개로서 접근했기에 나름 충실한 사실 보도가 된 것이었다. 이를테면 현상, 현장을 따라다니는 중계보도에 가까운 것이었다.

위의 언론단체가 평가했듯 ‘계엄군의 총구 앞에서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행동에 나선 것은 언론이 아닌 시민들이었다. 언론은 다만 그 시민들의 행위를 사실로서 그대로 보도한 것이었을 뿐이다. 현실, 현상을 만들어낸 것은 시민들이었고, 언론은 다만 이를 제3자로서 관전자로서 지켜보고 그대로 쓴 것일 뿐이다.

언론이 계엄군의 총구에 맞선 것이 아니었으며 언론은 다만 '총구에 맞선 시민들의 옆'에 있었던 것뿐이다. 언론이 사실과 현장을 향해 갔다기보다 사실과 현장이 언론에게로 온 것이었다. 

이것은 언론에 대한 비판과 폄하가 아니다. 오히려 시민들의 옆에 있었다는 것, 본 것을 그대로 보도한 것에서만이라도 한국의 언론들은 오랫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는 점에서 언론에 대해 굳이 비판할 이유는 없다.

언론에 필요한 것은 먼저 ‘사실’에 충실할 것, 사실을 그대로 볼 것, 사실들의 일부만이 아닌 최대한 많은 사실들을 보는 것이다. 그 점에서 한국의 언론은 평소에 보여줬던 모습과 다르게, 이번 사태가 일으킨 흡인력에 의해 ‘사실의 옆’으로 온 것이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사실 보도의 역할을 모처럼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언론이 앞으로도 그 정도만이라도 역할을 해 주길 바란다. 그런 최소한, 기본적인 역할만이라도 한국의 언론이 수행하길 바라며, 또 그것이 한국 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극히 낮은 현실에서 언론이 일단 보여줄 수 있는 거의 최대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언론이 언론 선배들의 후한 칭찬처럼 ‘진실’보도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의 면모를 보여주길 바란다. 그러려면 이번 비상계엄을 사건이 아닌 ‘사태’로서 접근해야 한다. 그럴 때라야 사실보도가 언론 선배들이 말한 '진실'보도에로 나아갈 수 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 상상하지도 못할 일들이 왜 현실이 됐는지, 대통령의 이상행동을 과연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따져봐야 한다. 사실 뒤의 사실, 사실 너머의 맥락과 진실을 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이 사태의 요인들을 전체로서 넓게 보는 것에는 언론 자신들의 그간의 행태에 대해 돌아보는 것이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중앙일보의 4일자 사설에서 “정치권에선 윤 대통령의 판단력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고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는 대목이 불러일으키는 당혹감과 제대로 마주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이 사설은 말하자면 ‘윤석열 제정신인가’라고 묻고 있는 것인데, 중앙일보가 여태 그 '사실', 최소한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을 전혀 몰랐다면 중앙일보는 자기 자신이 제정신이었는지를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5일자 조선일보의 주필 칼럼 <정말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다>는 제목이 말해주듯 ‘이성적 아닌 감정적’ ‘사려 깊은 대신 충동적’ ‘국민 정서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혼자 동떨어진 생각’을 한다며, 윤석열이 이런 사람인 줄을 몰랐다고 말한다. 혼자 동떨어진 생각을 해 온 언론, 국민 대다수의 정서를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언론은 조선일보 아닌 다른 어느 언론이란 얘기인가.

이 칼럼이 드러내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는 모습은 여전히 전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위의 칼럼이 실린 바로 옆의 사설 <국방과 경제만큼은 동요나 빈틈 없어야 한다>가 국회 탓을 하듯 ‘윤석열이 이런 사람인 줄 모르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늘 남의 탓이다. 그래서 이 신문은 “그동안에도 경제 발목을 잡아온 국회가 탄핵정국으로 가고 있다”면서 다시 '거대 야당' 탓을 하고 탄핵 추진을 슬그머니 공격하고 있다.

휘몰아치듯 비상계엄의 상황이 전개되던 때, 그래서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눈에 들어오는 일들을 단지 줍듯이, 건지듯이 사실을 담아 보도하던 모습을 보이던 언론들은 이제 사태가 평온을 찾아가면서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친위쿠데타, 내란을 기도했던 사람들은 건재하고 비상계엄이 위헌 위법행위라고 규정했던 국민의힘과 그 대표는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 탄핵에 반대하는 상황이지만 언론은 내란상황을 어느새 정치적 공방으로, 정쟁쯤으로 중계하고 있다.

비상계엄이 내려진 포고령은 제 3항에서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고 해 언론 탄압 기도를 노골화했다. 지금과 같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윤석열이 왜 있게 됐는지에 대해 스스로 돌아볼 생각도 능력도 없는 언론이라면, 그런 한국의 언론에 그같은 외부로부터의 포고령이 굳이 필요한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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