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호전적인 나라입니다”
‘온 누리에 평화!’ 성탄과 새해 인사에 꼭 들어가는 말이다. 방방곡곡 모든 이들의 오랜 염원이다. 그럼에도 지금 세계는 안보와 경제, 에너지 위기의 풍파 속에 흔들린다. 평화의 목소리보다 전쟁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가장 큰 진원지는 우크라이나(이하 우크라) 전쟁이다. 이 시각 평화는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우크라 딜레마
1. 전쟁 개시 여덟 달쯤 지난 10월 10일. 부시/오바마 시절 미군 합참의장을 지낸 M. 멀린 제독은 abc 방송 인터뷰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핵전쟁 가능성 관련 언급은 너무 나간 것’이라며 ‘가능한 모든 외교적 방법을 동원, 문제해결에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2. 바로 다음 날, 러시아 외무장관 라브로프는 우크라 전쟁과 관련, 미국에 외교협상을 제안했다. 미국은 즉각 거부했다. 거부 이유는? “그건 러시아의 무의미한 말일 뿐, 건설적이고 합법적 제안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3. 10월 25일. 바이든 대통령에게 우크라 전쟁의 외교적 해결을 촉구하는 민주당 진보모임 의원들의 서한이 미리 공개되었다. 그러자 의원들에 대해 ‘배신자’ ‘비애국자’라는 비난이 소셜 미디어에 폭주했다. 중간선거를 앞두고 놀란 의원들은 보좌관이 실수로 유출한 것이라며 공식적으로 서한을 철회했다.
4. 11월 10일. 합참의장 M. 밀리 대장은 CNBC 인터뷰에서 “헤르손 진입 등, 러시아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성공적인 만큼 겨울이 오기 전 지금이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백악관과 국무성 등에서는 아직 그럴 때가 아니라고 밀리 대장의 발언을 일축하면서 미국의 우크라 지원 입장을 재천명했다.
5. 12월 21일,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은 백악관 초청으로 방미 중 의회 연설에서 “더 많은 무기와 현금을 지원해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미국은 패트리엇 미사일과 거액의 원조로 화답했다. 한편, 나토 사무총장은 “우크라 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지금이 나토와 러시아가 직접 맞붙을 수도 있는 위기국면”이라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의 상황진단을 종합해보면 미국은 지금 우크라 딜레마에 빠져 있다. 전쟁을 확대하지 않을 수도 그렇다고 마냥 확대할 수도 없는 상황. 그 사이 우크라 전쟁의 유탄은 미국이나 러시아보다 유럽에 치명타를 날리고 있다. 또 전쟁의 여파는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 물가인상, 정치불안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평화를 위한 노력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문전박대 당하는 평화
3월의 136억 달러에 이어 의회가 5월 들어 다시 400억 달러에 이르는 우크라 군사원조법을 처리할 즈음, 대다수 찬성 목소리 사이에 반대 발언이 있었다. “이 자리의 여야 의원들 모두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는 위험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불과 일 년 전 소총을 둘러맨 양치기들과의 전쟁에서 졌다.(2021년 8월 아프간 전쟁에서 탈레반에게 패배, 철수한 것을 말함) 그런 나라가 지금 무려 6천 개의 핵탄두를 가지고 있는 나라와 붙어보겠다며 달려들고 있다.”
마치 평화주의자의 연설처럼 들리니 진보성향 민주당 의원의 발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위 발언을 한 사람은 공화당 하원의원이었다. 법안은 결국 민주당 전원 찬성, 공화당 대다수 찬성, 반대는 하원 57, 상원 11, 총 68명. 그렇게 통과되었다. 9월 하순에도 우크라 원조법안이—일부 국내용 예산항목도 포함한—비슷한 양상으로 통과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 의원들은 공화당보다 더 강경했다. 이들은 러시아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전 세계에 독재정권을 세우려는 푸틴의 시도 저지,’ ‘인류에 대한 범죄 차단,’ ‘전쟁으로 위기에 처한 우크라 민주주의 수호’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들은 나아가 군사원조 조건으로 우크라 사태의 외교적 해결 노력을 법안에 첨부하자는 제안조차 반대했다.
표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필두로 95명의 소위 ‘진보의원 모임’ 소속 민주당 의원 전원이 찬성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9/11 테러사태의 광풍 속에서 이라크 전쟁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던 의원도 이번에는 달랐다. 또 반우크라 전쟁—반나토—반제국주의 성명을 발표한 미국 민주사회주의 조직 회원인 의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진보의원 모임의 취지문에는 활동원칙의 하나로 ‘정의, 존엄, 그리고 평화(justice, dignity, peace for all)’를 명시하고 있으며, ‘정의로운 외교정책 추진(just foreign policy)’을 구체적 방안으로 내세우고 있다.
지난 9월, 미국의 ‘우크라 평화연대(Peace in Ukraine Coalition)’ 조직 간부들이 의회를 찾아갔다. 군사 원조법이 먼저가 아니라 평화 노력이 먼저라는 차원에서 의회 설득 및 선전 활동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의사당 진입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1/6 트럼프 쿠데타 이후 강화된 의사당 경비조치 때문이었다. 결국 반전평화 단체의 의회로비 활동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의 같은 시기, 신나치 조직으로 애초 미국의 군사지원 불가 대상인 ‘아조프 연대’ 소속 대표단은 의회를 방문했고, 의사당에서 공화 민주 양당의 주요 인사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 대표단 중에는 아조프 연대와 우크라 극우 파시스트 조직의 공동 창립자도 들어있었다.
카터의 충고
2019년 4월, 카터 전 대통령은 중국을 주제로 트럼프 대통령과 나눈 대화 내용을 공개했다.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는 힘을 키울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라는 트럼프의 물음에 카터는 이렇게 답했다. “1979년 이래 중국은 전쟁을 벌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전쟁을 벌이는 동안 중국은 경제부흥과 외교에 진력했습니다. 건국 이래 지금까지 242년 미국 역사 중 전쟁이 없던 해는 고작 16년입니다.”
반전평화의 주장을 비애국적 행태라며 미국 사회가 외면하는 데에는 이런 역사가 놓여있다. 우크라 전쟁은 왜 벌어졌는가, 바이든 정부가 취하는 대외정책이 평화의 원칙에 부합하는가, 미국의 대외정책은 정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민주당의 진보모임 의원들조차 제대로 논의도, 답도 하지 않는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미국과 나토,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판적 발언이나 분석에 대해 ‘푸틴 추종자,’ ‘친러파,’ ‘푸틴 로봇’이라는 식의 비난이 쏟아진다. 신종 매카시즘이다.
바이든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은 ‘가치동맹’을 내세우며 자유, 민주, 인권 같은 덕목을 강조한다. 그 가치목록에서 ‘평화’는 찾아볼 수 없다. 트럼프와의 대화를 이어가면서 카터는 이렇게 덧붙였다. “미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호전적인 나라입니다.”
새해 온 누리에 평화가 가득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