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잔치' 아세안 정상회의서 삿대질한 미·일과 중·러
상대를 아시아 평화·안정 깨는 '주범' 지목
미 "중, 남중국해서 점점 더 불법적 행동"
"남중국해 최대 불안 요인은 미 군사 활동"
아세안 회원국 대부분 '중심' 지키며 관망
라브로프 "일본 무장화 우려…배후 미국"
중동 관련 이견에 정상 공동 성명 불발돼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진짜 흔드는 주범은 누구인가?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에서 10일 개최된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정상회의와 뒤이어 11일 진행된 동아시아 정상회의(EAS)에서 미국·일본과 중국·러시아가 서로 상대를 지목하며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필리핀, 싱가포르 등 일부 친미 동맹국은 남중국해 이슈를 고리로 한 미국의 대중 공세에 가세했지만, 대다수 아세안 회원국은 어느 편도 들지 않는 모양새였다.
상대를 아시아 평화·안정 깨는 '주범' 지목
미 "중, 남중국해서 점점 더 불법적 행동"
AP·AFP·로이터 통신 등에 따르면, 먼저 중국을 자극하고 나선 건 미국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을 대신해 참석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11일 미국-아세안 정상회담 개회사를 통해서였다. 블링컨은 "우리는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점점 더 위험하고 불법적 행동을 하는 것에 매우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는 아세안 국가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선박을 훼손하며 분쟁의 평화적 해결 약속과 모순된다"라면서 "미국은 인도·태평양에서 항해와 비행의 자유를 계속해서 지지해 나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문제를 계속 이슈화하겠다는 뜻이다.
또한 블링컨은 최근 대만은 중국에 예속되지 않는다는 라이칭더 대만 총통의 발언을 중국이 비난한 것과 관련해 "중국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를 도발의 구실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대만 해협 전역에 걸쳐 안정 수호에 기여할 것을 약속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한국과 함께 미국의 '행동대' 역할을 하는 필리핀이 나섰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은 10일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필리핀이 국제법을 위반한 중국의 행동으로 "지속적으로 괴롭힘과 위협에 처해 있다"며 아세안과 중국 간에 남중국해 행동 강령을 마련하기 위한 협상을 서두를 것을 촉구했다. 양측은 2026년까지 강령을 완성하기로 하고 초안 작성을 위한 협상을 진행해왔지만, 강령의 구속력 여부 등을 둘러싼 이견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도EAS 회의에서 "남중국해에서 유엔해양법협약을 포함한 국제법 원칙에 따라 항행과 비행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것"이라고 가세했다. EAS에는 '아세안+3(한·중·일)'에 미국·러시아·인도·호주·뉴질랜드 5개국을 더해 모두 18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남중국해 최대 불안 요인은 미 군사 활동"
아세안 회원국 대부분 '중심' 지키며 관망
중국은 10일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리창 총리가 미국, 일본 등을 염두에 둔 듯 "아시아에 블록 대결과 지정학적 충돌을 가져오려는 시도"가 있다고 말했지만, 뒤이어 작심한 듯 마오닝 외교부 대변인이 직접 나서 미국을 비판했다. 마오 대변인은 "미국과 몇몇 역외 국가들이 남중국해에서 대결을 선동하고 긴장을 조성하기 위해 무기 배치와 군사 활동을 확대하고 있다. 이것들이 남중국해의 최대 불안 요인"이라고 맞섰다. 그는 중국과 관련 당사국들은 대화와 협의를 통해 분쟁을 해결할 "모든 능력과 지혜"를 갖추고 있다고 말해 미국의 개입 중단을 촉구했다.
이에 AP 통신은 "아세안은 최대 교역파트너이자 세계 3위 투자국인 중국과의 해상 분쟁에 신중하게 처신해왔다"며 "양측이 20억 명의 시장을 아우르는 자유무역지대로 확장하는 데 집중하는 상황에서 그 문제로 인해 교역 관계가 훼손되지는 않았다"라고 진단했다.
미국이 남중국해 이슈를 활용해 중국과 아세안을 '이간'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아세안 10개 회원국의 대외 정책 기조는 '아세안 중심성'이다. 이는 미국과 중국 등 특정 패권국 편에 서지 않고 자율적으로 외교를 펴나가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어 미국의 '줄 세우기' 시도는 대다수 아세안 회원국에는 의도한 만큼 먹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아세안 정상회의를 아세안과의 경제협력 제고를 위한 장으로 여기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의 블링컨 장관은 미얀마 내전과 북한 문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불법 침공 등 역내·외의 지정학적 이슈를 다루는 정치적 무대로 활용하고자 애썼다. 블링컨이 아세안 회원국을 상대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에 대한 단호한 대응을 주문한 게 그 대표적 사례다. 이날 EAS 회의에 러시아의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도 참석했지만, 둘은 전혀 대화하지 않았다.
말련·인니·유엔 "이스라엘 즉각 휴전하라"
블링컨 "이스라엘 공격, 정당한 이유 있다"
이스라엘의 가자 대학살에 이은 레바논 지상 침공과 무자비한 학살 행위와 관련해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등 친팔레스타인 무슬림 국가들이 이스라엘에 즉각 휴전을 거듭 촉구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아세안 정상들과 별도 회담을 열고 "가자의 죽음과 파괴는 이제껏 봤던 어떤 다른 상황과도 비교되지 않는다"면서 긴급한 정치적 해결을 호소했다.
그러나 언제나 미국이 문제다. 미온적 대응으로 일관하면서 이스라엘을 옹호했다. 블링컨은 이스라엘군이 11일 레바논 주둔 유엔평화유지군(UNIFIL)을 공격해 인명 피해를 초래한 것에는 "분명히 비난받을 만하다"고 했지만, 레바논 헤즈볼라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 확대는 "명확하고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감싼 뒤 미국은 외교적 해결책을 찾고 있다고 하나마나한 답변을 했다. 가자와 레바논에서의 참극이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AFP는 한 아시아 국가 외교관을 인용해 특히 중동 위기에 대한 주요 참여국 간의 이견이 컸던 탓에 정상회의 공동 성명에 합의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참여국들 이견 탓에 정상 공동 성명 불발
라브로프 "일본 무장화 우려…배후 미국"
AFP에 따르면, 러시아의 라보로프는 취재진에게 미·일과 한국, 호주, 뉴질랜드가 공동 성명을 "심하게 정치화하는 바람에 채택될 수 없었다"면서 "서방국들은 뭣보다 러시아, 중국의 이익에 반대하는 데 아세안과의 관계를 활용하고자 했다"고 주장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특히 아시아에서 미국의 행동을 "파괴적"이라고 비난했다. 라브로프는 일본 자위대의 '무장화'의 배후에 워싱턴이 있으며, 미국은 다른 나라들을 동원해 러시아와 중국에 대항하도록 시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아시아판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 제안과 관련해 그는 "군사 블록 창설 구상들은 늘 대립의 격화 위험성을 동반한다"면서 "일본에 관한 한 우리는 진지하게 일본의 무장화를 우려한다...일본은 미국의 압박으로 그런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