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황폐한 슬픔만 자라난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밑으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이보다 더 비참한 인간의 조건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신자유’ 시대, 악이 활개치는 세상
10.29 이태원 참사를 책임져야 할 주체들의 잔인함은 믿기 힘들 정도다. 인간성과 인간의 존엄함이 이 세상에서 절멸한 느낌.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이 참사 책임의 주체인 여당과 정부로부터 보호받기는커녕 도리어 2차 가해를 받는다. 개인정보 보호를 금과옥조로 삼던 그들은 희생자 명단이 공개되자 2차 가해자로 돌변해 막말을 쏟아낸다. 유가족과 고인을 향한 조롱과 비방이 뉴스 기사로, 온라인 커뮤니티로, 뉴스 댓글로 쏟아진다. 아무 말을 막 해도 되는, 바야흐로 당당한 ‘신자유’의 시대.
참사 희생자 영정이 놓인 합동분향소 앞에선 ‘윤석열을 지키는 사람들(윤지사TV)’이 매일 “이태원 봉쇄작전” 유튜브 생방송을 한다. 유가족을 자극하고 분향소 운영을 훼방 놓는 이들의 유튜브 서사 전략은 ‘새로운 자유’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이태원 분향소 참배객 모욕하고 조롱하기, 무릎 꿇고 호소하고 절규하는 유가족협의회 대표 고소하기, 놀라운 정도로 제도와 법의 허점을 잘 활용하는 ‘법잘알’로서 언론과 미디어가 좋아할 신묘불측의 수 두기. 이들은 몇 차례 유튜브 계정삭제를 당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유튜브 채널을 새로 개설해 ‘신자유’를 행하고 실천한다.
정치인들도 비슷한 수법에 편승한다. 내용이 무엇이든 보도량이 많아지는 게 ‘장땡’인 건지 유가족에게 마구잡이 막말과 패륜적 행태를 보이며 전국적 유명세를 얻는다. 유가족이 2차 가해를 제지해달라고 경찰에게, 여당 원내대표에게 호소하고 애원해봤자 소용없다. 느닷없이 시민분향소에 들러 “분향 좀 하려고 했더니 못 하게 하시네요”라며 쌩하니 돌아간 한덕수 국무총리를 보라. 분향 행위 인증이 관심사지, 유가족과 희생자 보호엔 무관심하다.
극단주의자들의 트롤링 전략
언론과 미디어는 이런 행위와 말들을 부지런히 실어 나른다. 자극적이고 반인륜적인 뉴스가 잘 ‘팔리니까’ 그런 걸까. 참사 규명의 본질은 사라지고 해프닝만 연일 릴레이 보도되는 오늘날 한국 주류 언론의 현실은 처참하다. 주류 언론이 기사 조회수, 클릭수, 댓글 경쟁에 매몰될수록 사냥감을 노리는 일부 열혈 극단주의자의 불판이 되고 있다.
특정 정보가 의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진위를 불문하고 대량의 정보를 쏟아붓는 디지털 극단주의 전략을 ‘트롤링’이라고 한다. 서울대 이재현 교수는 “정해진 주제에서 벗어난 내용이나 다른 사람의 화를 부추기고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내용을 일부러 공격적으로 올림으로써 판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인터넷 트롤링을 한다고 설명한다. 대규모로 생성된 트롤링 정보는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다뤄져야 할 중요 의제와 사안을 묻어버린다. 극단주의자들이 노리는 바다.
10.29 참사 희생자들이 언제, 어떻게, 어떤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했는지 밝혀진 게 하나도 없다. 이 상황에서 유가족이 무력하게 집에 돌아가 조용히 혼자 슬픔을 삼킬 수는 없다. 누구도 희생자들의 사인을 제대로 알려주지도, 책임지지도 않는데 어찌 망자를 떠나보낼 수 있으랴. 그런데도 그만하자는 이들이 있다면, 트롤링 정보에 기만당한 건 아닌지 자신의 미디어 이용 습관을 돌아봐야 한다.
자국 언론의 냉대와 왜곡에 절망한 유가족들은 외신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12월 21일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주최로 공식 외신 기자회견이 있었다. 워싱턴포스트, CNN, 뉴욕 타임즈, 미국의 소리(VOA), BBC, 일본 TBS, 대만 TBS 등 한국 주재 외신기자들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유가족들은 “참사 초기 외신의 정확한 보도가 한국 언론과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밝혔다. 외신 기자들에게 도와달라 절박하게 외치는 유가족들의 울음에 기자회견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공동 주최자인 ‘시민대책회의’가 낸 보도자료에는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이 들어 있었다.
외신 기자회견에서 드러난 새로운 사실들
아직 ‘사인 미상’ 상태인 희생자 고 정아량 씨의 어머니는 발언문(편지)에서 “내 딸의 시신을 이태원과 멀리 떨어진 수원 아주대 병원에서 발견했을 때 딸의 목에 난 칼자국을 보았다. 마약 검사를 하기 위해 내 딸의 신체를 훼손한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그들이 시신의 행방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 아닌가. 내 딸은 순수하고 착한 아이였다. 한국 정부가 무고한 젊은이들에게 마약 혐의라는 거짓말을 씌워 두 번 죽였음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호소했다.
정 씨의 어머니는 딸을 잃은 큰 슬픔보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 상황에 대한 분노가 더 크다고 밝혔다. 현장에 함께 있었던 아들은 눈앞에서 누나를 잃었다. 아들은 생존했으나 자책과 트라우마로 엄청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특별수사본부는 보호받고 치료받아야 할 피해자인 미성년자 아들에게 비인간적이고도 고압적인 연락을 계속해 왔다고 한다.
희생자 고 김의현 씨의 누나는 동생이 인파 속에서 위험에 처한 누군가를 도와주려다 희생당했다고 밝혔다. 그의 사인은 압사로 ‘추정’되고 사망 시각은 오후 10시 15분으로 ‘추정’된다는 것만 알고 있다. 경찰로부터 사망자 가족에겐 연락이 갈 거란 말을 들었으나 이튿날 12시까지 아무 연락이 없었다. 동생 친구가 여기저기 수소문해 동국대 영안실에 있음을 ‘직접’ 알아냈다고 했다. 경찰은 그때까지도 연락이 없었다. 김 씨 가족은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위로의 말 한마디 없는 대통령 이름 석 자가 새겨진 조화를 받았고, 이름 모를 국회의원 여러 명이 사진을 찍고 갔다고 했다. 이후 정부의 연락은 없었다. 어머니와 정신과 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트라우마센터로부터 괜찮냐는 연락을 받은 것이 전부다.
현재 14개국 26명의 희생자 중 베트남, 일본, 미국, 호주 등 총 8명의 희생자 가족이 유가족협의회에 연락해온 상황이라고 한다. 고 이지한 씨의 아버지 이종철 씨는 “12월 10일 어렵사리 유가족협의회가 만들어졌고, 현재 103분의 희생자 가족이 모였다. 외신기자들께서 해외 희생자 가족과 연락이 닿으면 유가족협의회를 알려주십사 부탁드린다. 한국 정부와 유가족협의회 간 진행 상황을 공유하고 희생자 가족을 위해 모든 역량을 동원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 이수현 의인과 고 김의현 씨의 죽음은 무엇이 다른가
올해 4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파견한 한일정책협의대표단의 방일 첫 일정은 도쿄 신오쿠보역에서의 추도식이었다. 2001년 1월 신오쿠보역 선로에 추락한 일본인 취객을 구하다 목숨을 잃은 의인 이수현 씨의 희생을 기리는 행사였다. 신오쿠보역사에 마련된 추모 동판 앞에서 대표단 단장인 정진석 국회부의장은 “한일 양국이 새로운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즈음에 이수현 의인의 희생정신이 서먹한 관계의 새로운 다리가 돼 발전적 미래를 함께 공유했으면 좋겠다"(2022년 4월 24일 연합뉴스 인용)고 말했다. 의인 이수현 씨의 희생과 의로운 행동은 21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높이 기려지고 있고, 신오쿠보역 추모 동판은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일본에 갈 때마다 찾는 명소가 되었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려 인파에 뛰어들었다가 희생당한 사람이 고 김의현 씨만 있었을까. 고 김의현 씨의 의로운 행동은 고 이수현 의인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남을 도운 숭고한 행동이 알려지고 기려지기는커녕 놀러 갔다가 당했다는 식의 모욕을 접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작가 프리모 레비는 “진실을 마음대로 바꾸고, 사실을 왜곡하고 삭제하고 거짓을 첨가하는 게 합법적인 국가에서는 프로파간다가 정보를 대체한다. 그런 국가에서는 당신은 권리를 지닌 시민이라기보다는 신민”이라고 말했다. 진실하고 투명하게 각각의 죽음과 희생을 설명하지 못하면, 언론과 미디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10.29 참사는 끝날 수 없다. 우리 마음속에 황폐한 슬픔만 자라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