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프랑스 '최상의 관계'…"식민지 역사 존중 보여줘"

디엔비엔푸 승전기념식에 프랑스 국방 참석

일본과 달리 '행동'으로 식민지 과거사 사죄

전쟁 벌인 한‧미‧일‧프랑스로 무게 중심 이동

전통적 우방인 중, 러 관계도 못지않게 중시

"베트남 정상, 22년만에 식민지 종주국 찾아"

'국익 중심' 자주 실용 외교의 진수 보여줘

2024-10-08     이유 에디터

"역사에 대한 존중의 정신과 공동의 미래에 대한 다짐을 보여주었다." 프랑스를 공식 방문한 베트남의 또 럼 국가주석 겸 공산당 서기장은 7일 프랑스의 오랜 식민 통치에 마침표를 찍고 베트남 독립의 결정적 계기였던 디엔비엔푸 70주년 승전기념식에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프랑스의 국방부 장관이 참석한 것을 높게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날 파리 엘리제궁에서 진행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였다고 베트남 관영 VNA 통신은 전했다.

 

파리 엘리제궁에서 실무오찬을 하기에 앞서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공식 방문한 베트남의 또 럼 국가주석 겸 공산당서기장을 맞이하고 있다. 2024. 10. 07 [AFP=연합뉴스]

"역사 존중의 정신, 공동의 미래 다짐 보여줘"

EU에선 프랑스가 첫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디엔비엔푸 전투는 1954년 3월 13일 보 응웬 지압 장군이 이끈 하노이 정부군이 프랑스군의 디엔비엔푸 진지에 포격을 가하면서 시작된 뒤 두 달 가까운 격전 끝에 5월 7일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끝났다. 그해 7월 체결된 제네바협정에 따라 프랑스군은 철수했다.

베트남은 이날을 기념해 지난 5월 7일 디엔비엔푸시에서 전국에서 수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70주년 승전기념식을 성대하게 열었다. 당시 팜 민 찐 총리는 축사를 통해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종식하고 전국적인 혁명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프랑스로선 자국군의 '패전기념식'이나 다름없는 치욕적 행사인데도 마크롱 대통령은 세바스티앙 르코르뉘 국방장관을 축하 사절로 보내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지금까지도 불법적 조선 강점과 잔혹했던 식민 통치를 부인하며 진정한 사죄와 반성, 배상을 집요하게 거부하는 역대 일본 정부들과는 달리 실제 '행동'으로 식민지 과거사를 사죄한 셈이다.

 

7일 베트남 디엔비엔푸시에서 열린 디엔비엔푸 승전 70주년 기념식. 2024. 05. 07 [EPA=연합뉴스]

디엔비엔푸 승전기념식에 프랑스 국방 참석

일본과 달리 '행동'으로 식민지 과거사 사죄

이 지점에서 원한 맺힌 과거사를 뒤로 하고 미래지향적 관계가 싹틀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날 정상회담에서 베트남은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comprehensive strategic partnership)란 최고 단계로 격상하는 데 흔쾌히 동의했다. 프랑스는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베트남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를 맺은 첫 사례다. 그리고 세계에선 중국, 러시아, 인도, 한국, 미국, 일본, 호주에 이어 8번째가 됐다.

이에 따라 양국은 더욱 실질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당, 국가, 정부, 의회의 고위 인사들을 비롯해 각급 대표들의 교류를 강화하기로 했다. 특히 그 핵심 기둥이 국방‧안보 협력이라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베-프 국방전략협력대화 개최와 군 장교 훈련 지원, 범죄 예방‧관리 경험 공유, 국제 및 지역 안보 포럼에서 상호지지 등에 합의했다고 VNA는 전했다.

베트남은 프랑스로부터 경제적 선물도 챙겼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위한 양허성 차관과 공적개발원조(ODA)를 지속적으로 늘리고 기업들이 EU-베트남 자유무역협정의 혜택을 전면적으로 실현할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 럼 서기장은 EU-베트남 투자보호협정의 조속한 비준을 촉구하는 한편, 유럽집행위원회가 베트남 해산물 수출에 대한 '경고'를 철회하도록 프랑스의 지지를 요청했다.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정상회의가 열리는 라오스 비엔티엔 호텔. 앞에서 무장 차량이 대기하고 있다. 2024. 10. 08 [AFP=연합뉴스]

'국익 중심' 자주 실용 외교의 진수 보여줘

베트남, 프랑스서 경제적 선물도 듬뿍 챙겨

프랑스는 또한 인프라와 항공우주 산업, 사이테크, 재생 및 수소 에너지 등 프랑스의 전문 역량이 뛰어난 분야에서 베트남과 공동 작업을 강화해 나간다는 데 동의했다. 고급 인력 훈련과 프랑스의 베트남 대학생에 대한 장학제도 확대도 포함됐다. 이와 함께 생태 및 순환 농업 분야에서의 협력과 글로벌 식량 안보 보장을 위한 베트남-프랑스-글로벌사우스(저개발국) 삼자 협력을 확대해 나가는 한편,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해서도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중국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남중국해 문제와 관련해서도 베트남은 프랑스의 지지를 얻어 냈다. 마크롱 대통령은 평화, 안정, 안보, 안전, 그리고 항해와 항공의 자유 보장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고 1982년 유엔해양법협약(UNCLOS) 등 국제법에 따른 평화적 분쟁 해결을 강조했다.

마크롱은 동남아 지역에서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중심성'에 대한 지지를 확인하고 프랑스-아세안, EU-아세안 관계를 계속 증진해 나가겠다고 했다. '아세안 중심성'은 미국과 중국 등 특정 패권국이나 진영에 가담하지 않고 아세안이 '중심'이 되어 자율적으로 외교를 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 마크롱은 폭력 종식과 긴장 완화를 추구하는 베트남의 스탠스를 높이 평가하고 평화적 수단과 국제법에 따른 우크라이나, 중동 등지의 분쟁 해결을 강조했다.

 

베트남을 국빈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3일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2023 12. 13. 브이엔익스프레스 홈피 캡처

미국-중‧러 전략 경쟁 격화에 치솟는 몸값

"베트남 정상, 22년 만 식민지 종주국 찾아"

미국 외교 전문지 '더 디플로매트'는 8일 자 기사에서 "옛 식민지 종주국에 대한 람의 2일간의 방문은 베트남 정상으론 22년만에 처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디플로매트는 지난 2년간 베트남이 한, 미, 일, 호주, 프랑스 5개국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은 사실을 전하면서 "베트남이 중요한 지역적, 글로벌 강국들과 관계를 확대하고 심화하려는 결연한 시도임을 시사한다"고 평가했다. 이어 디플로매트는 "이는 가능한 한 많은 강국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는 베트남의 전방위 외교정책과 잘 들어맞는다"라고 덧붙였다.

격화하는 미국-중국, 미국-러시아 간 전략 경쟁 와중에 베트남의 몸값은 치솟고 있다. 작년 9월 1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전쟁을 벌였던 베트남을 국빈방문했다. 양국 관계는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단번에 격상됐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러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는 데 꼭 필요한 나라 중 하나인 베트남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해 11월 27일 당시 보 반 트엉 베트남 국가주석이 도쿄를 찾아 일본과도 동일한 관계로 격상했다.

당연히 중국은 경계했다. 보름도 안 된 그해 12월 12일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 베트남을 국빈방문해 당시 응우옌 푸 쫑 공산당 서기장(7월 작고)과 정상회담을 했다. 시 주석은 양국이 민족의 독립과 해방 투쟁을 함께 한 '사회주의 공동 운명체'임을 강조하고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 국가주석의 묘소를 참배하기도 했다. 베트남의 마음을 사려는 행보였음을 물론이다.

 

베트남을 국빈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 네 번째)이 10일(현지시간) 하노이 공산당 중앙당사에서 응우옌 푸 쫑 공산당 서기장(오른쪽 다섯 번째)과 회담하고 있다. 이날 두 사람은 양국 관계를 가장 높은 단계인 '포괄적 전략 동반자'로 격상하는 데 합의했다. 2023.09.10. 연합뉴스

전쟁 벌인 한‧미‧일‧프로 무게 중심 이동

전통 우방 중, 러 관계도 못지않게 중시

베트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쫑 서기장은 지난 6월 19일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국빈방문을 초청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불법 침공해 작년 3월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체포영장을 발부받은 푸틴에게 정상외교의 장을 열어준 베트남에 불만을 드러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또한 럼 주석은 서열 1위인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하자마자 시 주석을 만나기 위해 8월 19일 베이징을 찾았고, 지난 9월 25일엔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한 기회에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과도 만났다. 인도‧태평양 지역의 급변하는 지정학적, 지경학적 현실을 반영해 한때 전쟁까지 벌인 한‧미‧일, 프랑스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면서도 전통적 우방인 중, 러와의 관계도 그에 못지않게 중시하는, 그야말로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의 일관된 외교정책은 자주와 자립, 평화, 우호, 협력, 발전, 그리고 외교 관계의 다변화 및 다자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베트남은 '4불(不) 국방정책'을 견지하고 있다." 작고한 쫑 서기장이 지난해 9월 국빈방문한 바이든 대통령 면전에서 한 말이다. '4불' 국방정책은 △ 군사동맹에 가담하지 않고 △ 어떤 나라를 반대하고자 다른 나라 편에 서지 않으며 △ 베트남 영토에 외국 군사기지를 두거나, 다른 나라에 맞서기 위한 베트남 이용을 거부하고 △ 국제관계에서 무력의 사용이나 위협에 반대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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