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그를 몇 번이나 더 죽이려는가

광복의 달에 당한 '광복군의 죽음'과 지금의 현실

그에 대한 진정한 추모는 '진정한 광복' 이룰 때

2024-08-19     이명재 에디터
이명재 에디터

너무도 급작스러운 통한의 죽음, 산봉우리에서의 의문의 실족사지만 그것은 독재권력에 의해 가격을 당한 피살이었음이 분명한 이의 반백 년이 돼 가는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식이 엊그제(17일) 열렸다. 49년 전 이날 홀로 산행을 하다가 포천의 약사봉 벼랑에서 추락해 이승을 떠난 이, 일본군을 탈출해 6000리 길 사투를 벌이며 맨발로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에 가담한 이래 항일과 민주와 통일에 온몸을 내던진 사람, 반유신독재의 선봉에 섰으며 '재야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이, 그 사람 장준하다.

그가 세상을 누린 햇수 57년이었으니 결코 짧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생애다.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일들, 많은 이들이 그의 앞에 놓은 일들을 생각할 때 그 노년에 가까워진 나이조차 ‘요절’이라고 해야 할, 너무도 때 이른 죽음이었다. 그의 앞에 놓인 과업을 생각할 때도 그렇지만 그 자신이 사실 '청년'이란 점에서도 그러했다.

급히 수습돼 매장됐던 그의 유골을 2011년 이장하면서 기념공원이 마련된 파주 통일동산에 모인 100여 명의 추모객들은 "떠났던 것이 아니라 빼앗겼던" 이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 추모의 시간에 이제 통곡과 오열은 없었다. 50년 다 돼가는 세월은 눈물과 비탄을 마르게 할 시간인 듯했다.

그러나 애도의 마음은 말랐다기보다 다른 감정이 돼 이들을 감싸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를 다시 불러내고 있었다. 그의 억울한 넋을 위로하는 진혼곡과 초혼무가 아니라도 그가 그 부름에 응답해 무덤에서 일어나 걸어오는 듯했다. 장준하의 죽음을 신문에서 보고 울었던 고등학생이 이제 백발의 노인이 돼 부르는 것에 손 흔들며 살아 있는 이들에게로 걸어 나오는 듯했다.

 

17일 열린 '장준하 선생 49주기 추모식'에서 춤꾼 무나미 씨가 진혼무를 추고 있다. 왼쪽에 장준하 선생의 얼굴이 부조돼 있는 것이 보인다. 2024.8.17

돌이켜 생각하면 그의 죽음은 사실 예고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유신 독재권력이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해 현해탄에 수장시키려 했던 것이 그의 죽음보다 불과 2년 전이었다. 서울대 법대 교수가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변사하고 인혁당으로 날조된 8명의 사형이 집행되던 때였다. 긴급조치로 구속 수감됐다 죽기 전년의 12월 말에 병환으로 출옥한 그는 나오자마자 대통령 박정희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으로 국헌 준수 선서를 헌신짝처럼 버린 것, 일인독재체제를 구축한 것을 규탄했다. 거국적인 민주항쟁을 준비하던 그의 앞에 죽음의 위협은 항상 따라다녔다. 주변에서 신변을 걱정했으나 그는 산정으로 오르겠다며 홀로 나섰다.

그의 죽음은 또한 증언이며 계시와도 같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죽음이 8월에 찾아온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건 한국 현실에 대한 증언이었다. 일본군으로 징병됐다가 탈출해 광복군을 찾아 6천 리 장정에 나섰으며, 1945년 광복 사흘 뒤인 8월 18일 광복군 대위로 국내 진공 작전에 나서 여의도 공항에서 일본군과 대치했던 그다. 그런 그가 광복 30년이 된 해의 8월에, 광복절 이틀 뒤에 죽음을 맞았다. 광복군 출신의 지식인이 일본군 출신이 지배하는 조국에서 설 땅을 찾지 못한 현실이었다. 죽음 1년 전 74년 그가 정보기관에 연행됐었던 것도 다른 날도 아닌 광복절에 일어난 일이었다. 8월의 광복절의 그 '빛'이 아닌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가듯 스스로 저벅저벅 들어서듯 그는 자신의 몸을 봉우리 위로, 그 암흑의 끝과 같은 약사봉 위를 향해 홀로 올라갔던 것이다.

장준하의 8월의 죽음, 그리고 빛을 찾은 ‘광복(光復)’의 8월에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지금 2024년 8월에 벌어지고 있는 해괴한 일들과 겹친다. '장준하의 8월'로 돌아간 듯, 50년 전의 날, 70년 전의 시절을 다시 사는 듯한 회귀가 펼쳐지고 있는 2024년의 대한민국이다. 수십 년 전 그의 죽음을 지금 현재의 것으로 만들고 있는 2024년의 8월의 풍경이다.

그같은 풍경이 장준하의 죽음을 그때로 종결지은 것이 아니라 지금 다시 죽이고 있다. 우리 사회가 50년간 쓰고 있는 장준하에 대한 '잔혹극'인 것이다. 그는 대체 몇 번의 죽음을 겪어야 비로소 그 죽음이 종결될 것이며, 그는 안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추모식에 모인 이들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장준하는 <사상계>를 창간하면서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고 얘기하곤 했다. 그것은 “돌베개를 벨지언정 못난 조상이 될 순 없다”는 청년 장준하의 결의로 품게 된 이래 남은 생애를 지탱해 준 것이기도 했다.

그의 그 말이 새삼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그러나 그 말은 이제 다른 의미로 울려온다. 그에 대해 ‘못난 후배’가 되지 않기 위하여, 라는 말로 우리 자신을 향해 울린다.

누군가를 추모한다는 것은 실은 두 번 기억하는 것이다. 한 번은 고인을 위해서, 한 번은 자신을 위해서, 그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추모는 곧 생일이다. 남은 이들의 생일인 것이다.

37년이 지난 뒤에야 그의 유골을 이장할 때 머리 뒷부분에서 발견된 망치로 가격당한 함몰은 광복군 시절 미군 특수부대 훈련으로 단련된 신체로도 피할 수 없었던 불의의 습격이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이 피살임은 많은 이들의 증언과 증거들이 확신하게 한다. 그의 죽음의 진상은 아직 미궁이며 미제의 상태지만 한사코 진실을 봉인시키려 하는 그 시도야말로 역설적으로 죽음의 진상을 가리키고 있다.

그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분명 필요한 과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죽음의 진상을 억누르는 현실의 진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독립기념관장에 일제강점을 미화하고 항일 역사를 부정하는 인물을 앉힌 것에 대해 광복회장은 “괜히 불필요한 논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니다. 오히려 그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직면하게 하고 응시하게끔 하고 있다. 실제를 구체적으로 보게끔, 그 실체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 크기와 완강함을 분명히 보지 않을 수 없게끔 하고 있다.

제대로 정산되지 않은 역사는 언제고 청구서를 내밀게 돼 있다. 그 청산과 정리 없이는 역사는 한없이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가 될 뿐이다. 해방과 광복을 진정한 광복으로 만드는 것은 일직선으로, 한순간의 해결로 종료될 수 없는 지난한 과정임을 우리는 지금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 그것이 이미 완료됐다는 생각을 품는 것이야말로 그것을 미완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미완인 채 완료하는 것이야말로 장준하를 거듭 죽이는 것이다. 장준하는 몇 번이나 더 죽음을, 추락을 맞아야 할 것인가. 장준하 죽음 50년을 앞둔 올해 그에게 올릴 추모의 말은 이것이다. 그 추모사는 우리 자신에게 올리는 조사이기도 하며 또한 각성과 결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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