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미의 땅에서 분단의 시간을 걷다
「2024 통일걷기」 철원평야 구간 도보 여행기
248킬로미터 휴전선의 중앙에 철원 평화전망대가 있다. 남으로는 철원평야가, 북으로는 평강고원이 훤히 보이는 곳. 한국전쟁 당시 가장 피비린내를 뿌렸던 ‘철의 삼각지’를 조망할 수 있는 곳. 그리고 두루미를 기다리는 곳, 소설가 이태준을 생각하다 다시금 절망하게 되는 곳, 철원, 그 끝없는 길을 걸었다.
벼가 익어가고 있었다.
넓디넓은 평야, 그러나 걸어도 걸어도 끝닿지 않을 것만 같은 포장길. 간간이 지나가는 국방색 얼룩무늬의 소형 전술차량이 아니었다면 그저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 갈 법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8월 5일 월요일, 철원평야를 가로질러 DMZ 인근에 위치한 평화전망대를 둘러본 뒤 철원의 북서편 대마리에 위치한 두루미평화관까지 15킬로미터 구간을 걷는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2024 통일걷기」 열흘째 되는 날이다.
철원은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격전지 중 한 곳이다. 해발 400미터도 되지 않는 낮은 야산 하나를 두고서 열흘 동안 스물네 번이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던 백마고지가 이곳에 있다. 고지 이름조차도 무려 27만 발에 달하는 포탄의 연기가 자옥하게 산을 덮어 마치 백마가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닮았다고 붙여진 것이란다. ‘철의 삼각지’라 불리는 철원-평강-김화 일대에서 이처럼 격렬한 전투사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거듭된 포격으로 야트막한 야산이 아이스크림 녹아내리듯 파괴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아이스크림 고지’. 원래 명칭인 삽슬봉보다 더 많이 불린다.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에 두루미는 자유로이 남북 오가는데
그렇다고 철원에 전쟁의 그림자만 드리워진 건 아니다. ‘철원’ 하면 사람들은 ‘평야’를 떠올리고, ‘오대쌀’도 유추해낸다. 그 중 두드러진 건 바로 ‘두루미’다. 우리나라 대표적 두루미 서식지가 바로 이곳 철원평야이기 때문이다. 주로 두루미, 재두루미, 흑두루미를 볼 수 있는데, 검은목두루미, 캐나다두루미, 시베리아흰두루미, 쇠재두루미도 간혹 볼 수 있다고 한다.
두루미들이 철원을 애호하는 이유는 당연히 환경이다. 동절기 모든 강물이 얼어붙어도 철원평야에는 현무암 지형을 뚫고 올라오는 맑고 따뜻한 샘물, 일명 샘통이 있기 때문에 일대의 하천과 저수지가 얼어붙지 않는다. 시베리아의 혹한을 피해 내려 온 두루미들에게 더 할 나위 없는 사냥터와 잠자리가 되는 것이다.
이날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폭염경보가 내려졌지만, 이 일대는 다행히도 약간의 가랑비와 구름 낀 하늘 덕분에 두 시간 남짓의 걷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게 다다른 월정리역. 서울에서 원산을 잇는 경원선의 간이역이었으나 한국전쟁 와중에 불타버렸고, 이후 1988년 안보관광의 일환으로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물론 철길은 연결되어 있지 않다.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한때 논의되었던 경원선 복원 사업 또한 중단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월정리역 인근의 검문소를 지나 평화전망대로 올라가니 남으로 드넓은 철원평야가, 북으로는 광활한 평강고원이 펼쳐진다. 두 곳의 개활지를 구분하기란 너무 쉽다. 초록 허리띠, 4킬로미터 안팎의 울창한 숲이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틀렸다. 폭 4킬로미터의 비무장지대가 그 둘을 갈라놓고 있기 때문이다.
철원평야와 맞닿은 숲의 경계가 DMZ 남방 한계선이다. 울창한 수풀 너머의 평강고원이 펼쳐지는 경계가 아마도 DMZ 북방 한계선일 것이다. 그 사이에 자리한 비무장지대 DMZ은 지난 70년 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으면서 이제 야생 동식물이 서식하는 울창한 숲, 생태계의 보고로 변신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 이상의 의미도 크다. 바로 한국 유일의 평지 숲이기 때문이다. 물론 엄청난 양의 지뢰와 불발탄도 함께하고 있지만. 그래도 유네스코는 지난 2019년 철원을 비롯한 강원도와 경기도 연천의 DMZ 일대를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한 바 있다.
‘철원’ 하면 또 궁예의 태봉성을 떠올릴 수도 있다. 사람 마음을 읽어낸다는 ‘관심법’으로 널리 회자되었던 궁예왕이 이곳에 궁궐을 짓고 철원성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지금의 철원의 기원이다. 이후 태조 왕건이 고려를 개국한 뒤에 1년 정도 머무르기도 한 곳이다. 그러나 정확한 내역을 알 수 없다. 바로 이 DMZ 안에 그 유적이 고스란히 있기 때문이다. 다만 기록에는 ‘궁궐이 무지하게 크고 사치스러웠다’고 전해진다. 역시 발굴조사를 진행할 수 없다. 지뢰와 불발탄 때문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는 어긋난 남북관계 때문이다. 한때는 남북이 공동으로 DMZ 내 유적을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뜻을 모으기도 했지만, 이제는 다 지나간 이야기, 가슴 아픈 이야기다.
평강고원의 동쪽 낙타봉에서 시작해서 일명 ‘김일성고지’라 불리는 구암산을 거쳐 남측 지역인 백마고지에까지 이르는 전망대의 홍보 동영상 관람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 다시 철원평야를 털레털레 걷고 또 걸었다. 무거운 마음이었다. 갈 수 없는 땅, 갈 수 없는 나라. 옆에서 걷던 생태전문가 최태영 박사가 말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생태환경 조사를 위해 전문가들이 이곳 철원지역 DMZ에 조사연구 활동을 벌이곤 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군복과 방탄조끼를 입고 철모까지는 썼는데, 군화를 신지 않은 연구자들이 나뭇잎으로 따고, 잠자리채로 곤충을 잡고, 동물의 배설물을 살펴봤지요. 북측에서 봤다면 꽤나 우스꽝스러웠을까요?”
DMZ 내에 기대했던 여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수달과 멧돼지 흔적이 나타나지 않아 의외였다며 당시를 회상하던 최 박사의 얼굴은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그런 조사연구 활동도 함께 멈춰 섰어요”라는 대목에서 굳어졌다. 그렇다, 분단은, 끝 모를 대립과 반목은 양측 모두를 스스로 상처나게 한다, 밝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기에. 그렇게 도착한 목적지 숙소, 두루미평화관. 초입에 큰 비석이 있다. 장마철이 지난 탓일까, 거무튀튀해진 비석을 읽고서 소스라치듯 놀랐다.
상. 허. 이. 태. 준. 문. 학. 비.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이라는 말을 나돌게 했던 ‘한국 단편문학의 완성자’, 바로 그 이태준 선생이었다. 문학비 옆으로 등신 크기의 석조흉상, 오른쪽 어깨에 비해 왼쪽 어깨가 좁게 처리된, 그런 까닭에 흉상이 얹힌 대좌의 왼쪽 공간이 여유롭게 보이는 이태준 흉상도 그 옆에 자리하고 있다. 기억을 되살려 보니, 철원 출신이 맞았다. 철원에서 태어나, 어렵사리 서울과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식민지 조선에 돌아와 기자 생활로 글쓰기를 시작했던, 지금도 글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읽기 마련일 『문장강화』와 수필집 『무서록』 그리고 ‘한 작가의 수기’라는 부제가 붙은 중편소설 「해방 전후」….
1946년 발표된 이 소설에서 그 일제 강점기 친일 성향의 문인보국회에 참가했던 주인공 현은 해방 정국에서 유엔의 신탁통치 안을 두고서 찬탁과 반탁으로 갈라진 당시 분위기에 대해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수립된 후 청 왕조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스스로 유명을 달리한 학자 왕국유를 거론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제 생각하면, 청나라를 깨뜨린 것은 외적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저희 인민의 행복과 진리를 위한 혁명으로였다 (중략) 왕국유가 그 정성, 그 목숨을 혁명을 위해 돌리었던들, 그것은 더 큰 인생의 뜻이오, 더 큰 진리의 존엄한 목숨이었을 수 있었을 것 아닌가?’
그리고 북한으로 월북한 그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과 함께 종군기자로 남측에 내려오기도 했다. 아마도 전선을 따라 여러 차례 오르내리며 고향 철원을 들렀을 것이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그 이후 남한에서는 잊힌 소설가가 되어버렸다,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완전히 복권된 것도 아니다. 남한에서는 여전히 이태준을 경멸하는 시선들이 많기에.
철원 너른 들에 두루미는 아직 오지 않았다, 때가 되지 않았으므로. 두루미가 없는 평야에 백로와 가마우지들이 여유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DMZ 푸른 숲에는, 볼 수는 없지만, 너구리와 삵이 경쟁하듯 배설물을 남길 것이다. 겨울이 되면 두루미도 당연히 돌아올 것이다. 자연의 시간이 부러웠다,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2024 통일걷기」 열흘째 되는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