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를 찍어도 그림이 되는 곳
과천관과 민들레, 보기좋음의 비밀
지난 토요일(27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다녀왔습니다. 휴일이라 오전인데도 미술관은 젊은이들로 붐볐습니다. 예술이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되 때로 그 이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젊음과 미술관은 궁합이 잘 맞습니다. 그날 저는 콘텐츠보다는 ‘보기 좋은 모습이 무엇인가’에 몰입했습니다. 그림보다 액자에 관심있는 뚱딴지.
과천관은 야트막한 건물이 주변 산세와 함께 중뿔나지 않습니다. 건물과 그 주변이 화강암 외피를 둘러 해가 쨍한 날이면 눈이 부십니다. 그래도 참아줄 만한 것은 수소문 끝에 문경에서 덜 튀는 색깔의 석재를 찾아낸 건축 담당 공무원과 건축가의 노고를 알기 때문입니다.
아 참.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저는 편집과 사이트관리를 맡은 임종업 에디터입니다. 다른 에디터들이 쓴 기사의 오탈자를 잡고 제목을 손질하여 적절한 시간에 사이트에 올립니다. 밤낮 모니터를 들여다보는지라 별 볼 일이 없습니다. 어쩌다 쓰고 싶은 소재가 있으면 개발괴발 써 밀어넣습니다.
이번엔 공간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과천관은 시선을 벗어난 사무공간과 수장고를 논외로 하면 대체로 나선형 중앙계단을 좌우로 원형, 사각형 전시공간을 거느린 구조입니다. 나선형 계단은 본래 비워두기로 한 곳이지만 백남준 선생의 ‘다다익선’이 처음부터 자리잡아 터주대감으로 상주합니다. 어쩌겠습니까. 왼쪽의 원형공간은 도너츠처럼 생긴 것이 디자이너의 역량을 시험합니다. 때로 뜨악하고 때론 상상이상의 전시가 펼쳐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MMCA 사진 소장품전: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는 전면 가로 점선, 후면 방사선으로 가벽을 세운 것이 대체로 유럽풍 정원을 연상시킵니다. 어두운 색깔의 벽과 부분조명은 광학의 소산인 사진들과 잘 어울립니다.
오른쪽 사각공간은 천장까지 뻥 뚫린 중앙홀을 싸고 사각형 전시장을 층층 쌓은 구조입니다. 저층은 시의적인 전시, 위로 갈수록 덜 시의적인, 소장품 위주의 전시를 펼칩니다. 제가 들른 날은 1층 1, 2전시실에 <연결하는 집: 대안적 삶을 위한 건축>이, 2층 3, 4전시실에 <MMCA 기증작품전: 1960-70년대 구상화> 전시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연결하는 집>은 아파트공화국에서 획일을 거부하는 개인주택, 그 중에서도 건축가가 설계한 주택들을 소개합니다. 본래 건축전은 2층의 1개 전시실을 전용했는데, 1층으로 옮겨왔더군요. 층을 옮긴 건은 아무래도 건축가 개인전이 아닌, 담론적인 주제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힘이 들어간 듯합니다. 2층 기증작품전은 밝은 색 가벽으로 작가별로 구획하여 지금껏 보아온 전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작가의 비중보다는 작품의 양에 따라 공간이 할애돼 있더군요. 기증작품의 특성상 어쩔 수 없어 보입니다. 건축전은 미술관 상근 디자이너가, 기증작품전은 외부 디자인회사가 맡아서 꾸린 차이랄까요.
미술관은 대개 유명 건축가의 설계입니다. 과천관은 김태수 작가의 작품입니다. 지을 당시 홀로일 때는 몰랐는데, 서울관이 개관하면서 두 공간이 대비가 되더군요. 서울관에 익숙해진 눈에 과천관 사각 전시관은 층고가 무척 낮아 보였습니다. 공간디자이너가 서울관의 높은 층고 공간을 디자인하다가 과천관 전시를 맡게 되면 시각교정을 해야 할 듯합니다.
어쨌든 과천관에서 서울관 개관 이전 시절을 상상했습니다. 당시로선 새로운 공간에 적응하려는 학예사와 디자이너가 애쓰던 모습 말이죠. 작품을 어떻게 배치할까를 고민하며 텅 빈 공간과 대화를 하고 백지에 평면도를 수없이 그리며 최적의 분할을 찾아내던 일. 전시 오픈 직전까지 먼지 풀풀 나는 곳에서 작업자들과 씨름하던 일. 오픈 세레모니를 뒤로 하고 쓸쓸히 미술관을 나서던 실무자들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렇게 감상에 젖은 까닭은 <연결하는 집> 전시에 딸린 워크숍, 영화상영으로 할애된 제1전시장이 빈 공간을 연상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전시장 바깥에 설치된 디자인물과 CI 소품들이 이를 부추겼습니다. 공간에서 최적의 조건을 찾아낸 종요로움.
‘원형구역’(원형정원, 동그라미 쉼터, 옥상정원)을 재생하여 개방한 <MMCA 과천프로젝트 2023: 연결> 프로젝트는 매혹적이었습니다. 조경전문가가 조성한 정원은 녹색으로 푸르고, 설치예술가가 설치한 조형물이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 뙤약볕이 아니었더라면 한참을 앉아서 다리쉼을 하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멀리 관악산 송신탑이 뾰족하고 대공원 리프트가 직선을 긋고 있더군요. 그곳에 이르는 통로는 ‘디자인 된 온도’가 아닌 달궈진 온실처럼 더웠습니다.
그렇습니다. 같은 공간이어도 그곳에 무엇을 어떻게 채우는가, 누구와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전혀 달라집니다. 공간, 콘텐츠, 공간디자인 등 아름다움 3종세트가 겹쳐 보기 좋더라도 서사가 개입하면서 공간은 비로소 장소로 바뀌는 거죠. 과천행은 공간에서 장소로, 장소에서 다시 공간으로 왕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작년 2월 이래 시민언론 민들레는 저에게 장소가 되었습니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청년의 모습으로 기억하는 유 아무개 국장이 주름진 얼굴에 환하게 피워올린 웃음과 맞닥뜨린 게 덫이 되었습니다. 김호경 국장도 알고보니 베니스 비엔날레에 같이 다녀온 인연이 있더군요. 외인부대와 같던 분들이 이제 동료가 되어 그들의 말투, 짓투, 글투 모두 익숙해졌습니다. 뾰족하던 사이도 무던해졌습니다. 물론 의견이 다른 때는 있지만 대화로 수렴합니다. 거칠었던 민들레 사이트도 틈틈이 손을 봐 그런대로 봐 줄 만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보기 좋은 모습’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제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제 자리에 있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민들레가 만들고자 하는 사회의 궁극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상 잡설이었습니다. 시간 날 때 과천관에 들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