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철 지난 이념에 포획돼 세계질서 왜곡한다"

21세기에 20세기 냉전잣대로 미국‧서방은 '선'

북‧중‧러‧이란은 '악' 취급, 진영대립 생성·격화

중‧러 정치‧경제 체제의 중요 세부 요소 간과

아시아·동유럽·글로벌사우스 제도적 성숙 방해

2024-07-17     이유 에디터

"한때 난공불락이었던 20세기의 거인은 과거의 철 지난 패러다임에 인질이 되어 여전히 미국의 국내‧외 정책을 만들면서 미국의 국제적 위상과 권위는 훼손되고 있다. 미국의 인구 구성이 바뀌고 나머지 세계도 발전하고 현대화되고 새로운 냉전 후(post-Cold War) 현실에 적응하고 있지만, 미국 기성 정치권은 명백히 시대착오적인 향수에 집착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1일 워싱턴D.C.에서 열린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 지원 행사를 주관하며 연설하고 있다. 2024. 07. 11 [UPI=연합뉴스]

'20세기 거인' 미국, 철 지난 이념에 인질

"적대적 경쟁과 불변의 제로섬 게임 집착"

워싱턴D.C. 소재 미국 싱크 탱크인 국제정책센터(CIP) 선임 연구원이자 미 조지메이슨대 부교수인 조안나 로즈페도프스키는 '미국 외교정책은 역사의 포로인가?'란 15일 자 <모던 디플로머시> 기고에서 "21세기 들어 20년이 지났지만, 미국의 기성 정치권은 아직도 한때 미국을 글로벌 지배의 정점으로 끌어 올렸던 역사적 서사에 도취해 있다"라면서 이렇게 진단했다.

그의 이런 진단은 미국과 소련이란 두 초강대국의 대결로 상징되는 냉전이 종식된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미국은 여전히 냉전 시대의 '이분법적 프리즘'을 통해 세계를 본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미국의 최대 문제는 중국의 부상 및 영향력 확대와 러시아의 부활을 저지하는 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역동적인 오늘날의 국제질서와 경제·사회·정치 발전의 다면적, 다극적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게 로즈페도프스키의 견해다.

특히 동유럽권과 글로벌사우스(저소득국‧저개발국)는 이 기간에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루는 한편, 시장경제 모델을 수용하고 일부는 자유주의로 이념의 세대교체를 거친 것을 미국이 직접 목격하고도 국제관계를 "적대적 경쟁과 불변의 제로섬 게임"이란 틀에 가두고자 집요하게 시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 밑에는 소련 해체와 더불어 '소련 사람'은 사라지지 않았고 중국은 이념적, 군사적으로 서방에 대항하는 '소련의 당연한 계승자'란 인식이 깔려 있다고 봤다.

 

중국을 국빈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1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앞에서 열린 공식 환영행사 도중 시진핑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3월 대통령 선거 승리로 집권 5기를 시작한 뒤 첫 해외 방문지로 중국을 선택했다. 2024.05.16. AFP 연합뉴스

"이념적 딱지만으론 복잡한 현실 포착 못해"

중‧러 정치‧경제 체제의 중요 세부 요소 간과

로즈페도프스키는 "미국은 지금도 냉전 시대의 왜곡된 '이분법 프리즘'과 유감스러운 '...주의'를 통해 글로벌 사건들을 해석한다"며 "파시즘, 나치주의, 스탈린주의, 전체주의, 권위주의 같은 용어들은 적들을 묘사하는데 자주 소환되지만, 이런 딱지만으론 오늘날 지정학적 역학관계의 복잡한 현실을 포착할 수 없다"고 했다. 당연히 미국민 현실 인식 왜곡으로 이어진다.

그는 "러시아를 푸틴주의 관점에서, 중국을 시진핑의 단일한 일차원적 권위주의 관점에서 피상적으로 묘사하는 건 양국의 정치, 경제 체제의 중요한 세부 요소들을 간과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와 세계 경제로의 통합은 냉전 사고로는 제대로 포착할 수 없는 "도전과 기회"를 모두 제공하며, 러시아의 행동을 소련 스타일의 팽창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러시아의 명백한 안보 우려와 동기, 전략적 목적을 무시하는 처사로 그는 풀이했다.

그 결과, 서방 대중은 지배욕이 강한 푸틴의 '신(新) 러시아화'(neo-russification) 정책에 따라 러시아군이 옛 소련권 국가로 진격하고 유럽 전역의 안보와 질서를 위협할 것으로 여길 공산이 크다, 로즈페도프스키는 작년 8월 르몽드 디폴로마티크 기고에서 국제정치학자인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이런 생각을 "근거 없는 믿음"이라고 일축하고 푸틴이 우크라이나 전체의 병합을 원한다는 증거가 없고, 설사 원한다고 해도 그 목표를 달성할 군사적 역량이 없다고 했던 주장을 소개했다.

 

조현동 외교부 제1차관(오른쪽),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장관, 모리 다케오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13일(현지시각)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일 외교차관 협의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3.2.14 연합뉴스

"민주적인 우리"와 "권위주의적 그들" 대비

미국‧서방은 '선'…북‧중‧러‧이란은 '악' 취급

미국의 이분법적 냉전 사고의 대표적 사례로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웬디 셔먼이 소환됐다. 지난해 2월 당시 셔먼 부장관은 중국이 미국 주도의 '규칙에 기반한 국제질서'에 대한 재편 시도를 한다고 보고 민주주의 가치 수호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과정에서 국제 체제를 "민주적인 우리"와 "권위주의적 그들"로 대비시켰다. '민주적인 우리'는 미국과 서방 동맹국을, '권위주의적 그들'은 중국, 러시아, 북한, 이란 등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글로벌 환경과 흐름이 냉전 시대완 많이 달라졌다는 게 로즈페도프스키의 생각이다. 미국과 서방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에선 대체로 "한때 20세기를 규정했던 이념 투쟁들"을 초월했다. 그 결과, 아시아, 유럽, 중남미 국가들은 경제 발전, 기술혁신, 지역 협력 등을 통해 생활 수준 향상에 집중하고 있으며, 신세대들은 세계화, 자유화, 제도 개혁을 수용해왔다.

로즈페도프스키는 "동남아 국가들은 이념 충돌보다 경제 성장과 지역 안정을 우선시한다"라며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의 국내총생산(GDP)은 2000년 1.8조 달러에서 2021년 3.2조 달러로 급증한 국제통화기금(IMF)의 통계를 인용했다. 그는 "대다수 동유럽 국가도 유럽연합(EU)에 가입한 이후 무역과 투자 증대에 힘입어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뤘다"고 말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폴란드의 GDP는 1990년 약 650억 달러에서 2023년 8110억 달러를 넘었고, 헝가리의 GDP는 같은 기간 1400억 달러 증가했으며, 체코는 1991년 약 298억 달러에서 2023년 3330억 달러를 넘어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브릭스 의회 대표단들이  참석한 확대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2024. 07. 11 [타스=연합뉴스]

미국‧서방 외 세계, 20세기 이념 투쟁 초월

"동남아, 이념보다 경제 성장‧지역 안정 우선"

로즈페도프스키는 "한때 극도로 이념적이었던 아시아와 동유럽권의 글로벌 공공정책의 우선순위가 변화하고 경제 발전을 열망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역사적 불만을 소환하고 영구화하는 데 여념이 없는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 패권에 대한 도전자를 과거 전체주의 정권에 비유하는 서사를 널리 퍼뜨리는 것은 이들 지역에서 제도의 성숙과 생산적 대화를 방해하고, 글로벌 현실과 갈수록 동떨어지는 미국 예외주의 정서를 영구화한다"고 덧붙였다.

중국과 러시아, 그 동맹국들을 "갈수록 호전적인 서방의 적들"로 묘사하는 것은 "같은 마음의 동맹국들끼리" 뭉치게 만들고 양 진영의 대립을 격화시키면서 세계를 그 어느 때보다 핵 대결에 근접하게 만들고 있다고 그는 우려했다. 이런 서사가 미국의 외교 정책을 외교적 관여보다 군사적 개입에 더 의존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로즈페도프스키는 "미 외교정책의 군사주의 역시 역사적 공포와 적대감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심지어 그것들을 대만, 북극, 우주 같은 잠정적 무력 대결의 새로운 전장들로 확산시킬 위험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외교적 관여보다 군사적 해법 강조는 미국이 다자 기구나 협력을 통해 지금의 도전을 극복하기보단 20세기의 부끄러운 과거를 연상시키는 물리적 충돌을 준비 중이란 인식을 강화한다"고 말했다.

 

8일(현지시간)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받은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오크흐마트디트 어린이병원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러시아군은 미국 워싱턴DC에서 개막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를 하루 앞둔 이날 우크라이나를 대규모로 공습해 최소 33명이 숨졌다. 2024.07.09.AP 연합뉴스

로즈페도프스키 "미국, 세계관 재구성해야"

미국에 유리한 '역사 남용 행위'  강력 비판

'적들'에 대한 미국의 잘못된 인식에 대해 그는 △ 적들의 정권은 위험한 동시에 부서지기 쉽다 △ 그들의 말은 신뢰할 수 없다 △ 그들은 히틀러의 화신과 같은 지도자를 가진 나치다 등 세 가지 포인트로 요약했다. 미국이 21세기에도 계속 최강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조언도 곁들였다. 첫째는 미국의 세계관 재구성이다. 현 세계 질서의 다극적 성격을 인정하고 강대국 경쟁 패러다임을 넘어서라는 주문이다. 다른 나라가 협력하면 인센티브를 주고, 제재와 관세 등 처벌이나 천박한 외교적 약속과 협박성 수사를 삼가라고 했다.

둘째는 분석과 정책 처방의 통합이다. 유아독존의 워싱턴D.C. 서클을 넘어서 국내외의 광범위한 목소리들을 수용하고 특히 급격한 현대화를 경험한 나라의 경제, 안보 이익 고려를 포함하고 추격자들의 특수한 안보 우려도 유념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셋째는 "우리 대 그들"의 이분법 폐기다. 상대방을 다음(next) 마오쩌둥, 히틀러, 스탈린 등으로 규정하는 공포증 전술은 정교한 분석과 외교적 해법을 방해하는 등 역효과를 낳는다는 판단에서다. 이런 접근법은 특히 비동맹인 글로벌 사우스를 비롯해 잠재적 동맹국을 소외시키고 미국 정책들에 대한 글로벌 분노에 기름을 붓는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로즈페도프스키는 "미국이 21세기에도 영원히 물질적, 이념적 강대국으로 남기 위해선 공포 제조를 단념하고 현실 인식을 재조정하고 미국에 유리하게 역사를 남용하는 행위를 단념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이 열리는 7일 오후 용산구 전쟁기념관 인근에서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관계자가 한미일 군사동맹에 반대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 2023.5.7. 연합뉴스

"미국, 우방과 적 모두에 오픈 마인드 필요"

군사주의, 미국 헌법 질서의 기본구조 손상

끝으로 군사주의보다 외교와 다자 관여이다. 군사적 개입에서 외교적 관여로 외교정책의 초점을 이동하라는 주문이다. 그는 "미국은 국제협력, 다자 분쟁 해결, 경제 발전을 외교정책의 주된 수단으로 우선시해야 한다"며 "군사주의를 하나의 외교정책으로 격상하는 건 국내‧외에서 군사주의를 부르고 바로 미국 헌법 질서의 기본구조를 망가뜨리게 된다"고 경고했다.

로즈페도프스키는 "힘은 옳다"는 전략에서 벗어나 글로벌 공동체와 인간의 열망을 정확히 반영한 새로운 21세기 비전을 제시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그래야 미국은 한때 싸우고 이겼지만, 지금은 화석화된 이념 투쟁에서 해방될 수 있다"며 "미국은 우방과 적 모두를 향해 전향적 사고, 오픈 마인드, 그리고 민첩한 태도를 배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로즈페도프스키는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이자 역사가인 알렉시 드 토크빌이 1930년대에 자신의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미국은 선하기에 위대하다. 그래서 미국이 선하기를 그친다면, 위대함도 그칠 것이다"라고 말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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