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 굴욕외교에서 실리 찾자? 한겨레 맞는가

윤석열 굴욕 외교, 현실로 받아들이자는 주장

윤 있을 때 일본이 '성의' 보여 달라 '부탁'의 말

잘못된 현실 인정하자는 건 현실 악화시키는 것

2024-06-10     이명재 에디터

 한겨레의 10일자에 실린 논설위원의 칼럼 <일본도 코피 한두 방울 흘릴 각오는 해야>가 놀랍다. 윤석열 정권이 대일 굴욕외교를 벌이고 있지만 현실적인 선택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최대한 실리를 찾자는 논리를 펴고 있는 이런 글을 다른 신문이 아닌 한겨레의 지면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 칼럼은 제목에서처럼 일본 정부에 대해 '간곡한 당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정 어린 조언을 하는 듯한 이 당부의 글은 일본 정부를 향해 윤석열 정권이 굴욕적이며 자해적인 '결단'을 했으니 일본 정부도 이 유리한 기회를 놓치지 말고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 달라고 하소연인 듯 애걸인 듯 '부탁'의 말을 하고 있다.

이 글은 한·일 시민사회가 일본을 상대로 전후보상운동을 벌인 지 30여 년이 돼가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대부분 숨을 거두고 있는 ‘막바지 단계’에 이른 상황이라면서 윤석열 정부가 제시한 3자 변제안에 대해 일본도 '코피 한두 방울' 정도만이라도 '호응'해 달라고, 그래서 한일 관계의 새 시대를 열자고 일본 정부에 완곡하게 요청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눈을 의심할 이들이 적잖을 것으로 보인다. 제호만 가린다면 조선일보라고 해도 될 법하다. 그 논리의 근거와 전제, 그리고 '현실론'을 확고한 전제이자 근거로서 강조하는 그 입장을 읽다 보면 이것이 과연 한겨레에 실린 글이 맞는가, 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물론 이를 한겨레 전체의 입장이며 논지라고 할 수는 없다. 이 글에 필자의 생각이 전적으로 집약돼 있다고 함부로 단정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글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한겨레의 한일 관계에 대한 시각을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특히 이 글의 필자는 한겨레의 국제 분야, 무엇보다 스스로 전 국제부장으로서 일본 특파원을 지낸 이력을 밝히듯이 한일 관계를 다루는 논설위원으로서 한일 문제 관련 한겨레의 논지를 이끄는 이라고도 볼 수 있다. 최소한 한일 문제에 관한 한 한겨레를 대표하는 이들 중의 한 명이라고 봐도 될 것이라는 점에서 단지 '이런 견해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편의 칼럼으로만 볼 수는 없어 보인다.  

 

16일 서울 용산역 광장 강제징용노동자 상 앞에서 평화나비 네트워크 회원들이 '반성없는 한일정상회담 규탄, 굴욕적 강제동원 해법안 거부 대학생 공동행진'에 참석해 대통령실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하고 있다. 2023.3.16. 연합뉴스

이 칼럼은 "대법원 판결 이후 한·일은 피가 튀고 뼈가 꺾이는 것 같은 처절한 갈등을 벌였다"고 얘기하는 데서부터 마치 대법원의 판결이 문제의 근원인 양 주장하려는 듯하다. "이후 등장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3월 ‘제3자 변제안’을 뼈대로 하는 파격적이며 굴욕적인 양보안을 내놓았다"고 했는데, 이어지는 설명은 '굴욕적'인 것보다는 '파격적'인 것에 초점이 맞춰진 듯하다. 나아가 '현실적'인 판단을 한 것이라는 점을 얘기하고 싶은 듯하다. 굴욕적인 양보라고 한 대목에서 굴욕보다는 어쩔 수 없는 양보를 한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윤석열 대통령의 난데 없는 3자 변제안에 대해 "마땅히 위자료를 받아야 하는 원고들에게 현실적인 선택지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라는 해석이 이어진다.

그는 "그렇다고 한·일 시민들이 이뤄낸 이 엄청난 성과를 지금처럼 계속 골방에 방치할 수도 없는 일이다"고 했는데, ‘엄청난 성과’는 시민사회의 성과라는 의미인가, 아니면 윤석열 정부의 파격적이며 현실적인 선택지 제시가 이뤄낸 성과라는 뜻인가. 

이 글은 “3자 변제를 거부하는 이들은 피고인 일본 기업 자산에 대한 현금화를 진행하고 있는데, 대법원도 고민이 많겠지만, 이제 그만 결단해야 한다”면서 ‘일본이 높게 평가하는 윤 대통령' 재임 중에 현금화가 이뤄져야 하며 그것이 ‘외교적 충격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이 한국의 대통령의 굴욕 외교 노선을 높게 평가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며, 윤석열 정권이 제공해준 한일관계 역행 상황을 일본 정부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 활용하라는 논리를 펴고 싶은 것인가. 

"정권이 바뀐 뒤 결정이 나오면, 2018~2019년에 맞먹는 ‘제2의 한일전’이 터지게 될지 모른다"고 했는데, 박근혜 정부 때의 위안부 합의를 문재인 정부에서 들어와서 바로 잡으려고 했던 것이 한일전을 불렀다며 비판하고 싶은 것인가.

그래서 그에게는 일본의 '호응'이 아쉬운 것인 듯 “일본이 이에 대해 지금껏 내놓은 ‘호응 조처’란 일본경제단체연합회가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채 값도 안 되는 2억엔(약 17억6000만원)을 내놓겠다고 한 것이 전부다”라고 지적한다. 이는 비판을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좀 더 금액이 많기만 하면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인가. 일본 피고 기업들이 피해자들의 자녀들이 본사를 찾아가 면담을 요청하는데도 만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데, 피해자들을 만나 주고 더욱 많은 돈을 ‘위로금’으로 지급하면 그것은 일본의 ‘전향적 대응’인 것인가.

이 칼럼은 한일간의 피해자 보상 문제를 "이제 후세에 넘겨야 할 때"라고 했다. 마치 피해자에 대한 '위로금' 지급으로 이 문제가 종결되는 것이라는 판단을 하는 듯하다. "피해자들이 사망하고 있는 상황에서 운동의 성과를 차분히 정리해 후세에 전하는 것은 남은 세대의 몫일 것이다"고 한다. 그러나 한일간의 피해자 보상, 보상 아닌 배상 문제는 이 정도가 문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다. 30여 년, 아니 국교 수교 후 60년, 해방으로부터 80년간 지연되고 있는 문제를 이제야 뒤늦게 풀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위로금'이라는 말 자체가 이 문제의 끝이 아닌 시작을, 해결 시작도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이 사안은 결코 피해자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 글은 무엇보다 '현실론'이 대전제로서 깔려 있다. 현실론은 그 자체로는 결코 배척할 입장이나 근거가 아니다. 그러나 현실론을 펴려 한다면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이 '현실'인가, 라는 질문이다. 이 칼럼은 윤석열 정권의 3자 변제안이 ‘현실적인 선택지’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라고 했는데, 그러나 윤석열은 현실적인 선택지를 제공한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를 바꿔버린 것이었다. 그것이 한일 문제에 대해 특히 요구되는 현실론이다. 현실을 어떤 '현실'이 되게 하느냐, 어떤 현실은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현실인가에 대한 판단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입장인 것이다.

이 칼럼의 필자는 마지막 대목에서 이 글의 결론으로 일본에게도 ‘당부’한다면서 윤 대통령은 ‘굴욕외교’라는 비난을 감수하며 피가 철철 흐르는 내상을 감수했는데, 일본도 코피 한두방울쯤 흘릴 각오는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 싫다면, 지금이라도 고령인 피해자들의 손을 잡고 단 한마디라도 ‘미안했다’고 말해달라고 한다.

굴욕외교를 내상을 감수하는 윤석열의 결단으로, 용단으로 보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얘기인가. 일본은 코피 한두 방울쯤이면 되니 그 정도로 성의 표시를 하면 된다는 조언을 하려는 것인가. 일본의 진정한 반성 없이는 과거도 미래도 있을 수 없는 이 문제를 상거래쯤으로 여겨 물물교환하듯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이 정당한지는 제쳐놓고라도 코피 한두 방울 정도로 주고받을 수 있다는 식의 그 '부등가 교환'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 '한마디라도 미안했다고 말해 달라'고 하는 부탁을 하고 있는데, 가해자에 대해 단 한마디 말 정도의 동정과 시혜만 베풀어주면 된다는 애걸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이 글의 필자가 펴고 있는 현실론을 읽다 보면 묻고 싶어지는 것은 한겨레의 '현실'이다. 한겨레가 보는 한국사회의 현실, 한겨레가 읽고 보며 자신의 지면을 통해 전하는 '현실'은 어떤 현실인가를 묻고 싶다. 

그리고 또한 묻고 싶은 것이 한겨레 내부의 '현실'이다. 위의 글과 같은 도발적인 주장을 폭넓게 수용하는 것이 한겨레식의 민주주의적 다양성인 것인지 묻고 싶다. 내부 여론의 다양성과 민주주의는 '한겨레적'인 것이지만 그와 함께 필요한 것은 공론과 인식의 수준에서의 최저치, 양식의 최소한의 문제이다. 

윤석열식의 해법에 대해 현실적인 선택지로 인정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을 더욱 추락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런 현실론을 펴는 글들을 읽을 때 한겨레의 독자들 가운데 적잖은 이들이 느낄 당혹감과 굴욕감은 '코피 한두 방울'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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