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충구역 폐기·전쟁훈련 재개가 '정상화'라니
'9.19 폐기''군사훈련 재개'에 조선·문화 반색?
군, '완충구역 해제'에 주요 신문들 1면 보도
경향 "안전핀 사라져"…한겨레 "우발적 충돌 우려"
조선은 의미·파장 빼고 "군사훈련 재개"만 언급
'남북신뢰 강조' 보도준칙 어긴 언론 가려내야
합동참모본부가 8일 “지상과 해상에 적대행위 중지구역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식 선언하고 9.19 군사합의에 따른 적대행위 중지구역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로 공중 '완충지역'도 해제돼, 이제 하늘·땅·바다의 군사적 충돌 완충지역은 모두 사라진 셈이다. 한동안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하던 9.19 합의는 역사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접경지역 내 군사훈련뿐 아니라 비무장지대(DMZ) 내 초소(GP)와 공동경비구역(JSA) 근무병들의 무기 휴대 등 근접 충돌 위험이 되살아났다. 남북공동유해발굴, 군사당국자 간 직통전화, 서해공동어로구역에서 남북 공동순찰 등은 이미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이제 한반도에는 군사적 충돌의 ‘안전핀’이 제거된 것이니, 총·포탄이 오가고 누군가 피를 흘리고야 마는 무력충돌이 언제 터질지 알 수 없게 됐다.
여전히 여론의 일부를 주도하는 주요 일간신문들은 9일 이 소식을 1면에 비중있게 다뤘다. 이 뉴스가 1면 톱에 오른 것은 당연하다. 그동안 북한과 대화의 문을 닫고 미·일 편향 외교를 추진해온 윤석열 정부가 문재인 정부의 9.19 합의를 헌신짝처럼 내다버린 것이 아주 새롭거나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최근 한반도의 군사적 상황 변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한 뉴스다. 국민의 안전·생명과 미래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론은 과장도, 축소·은폐도 없이 정확하고 냉정하게 한반도 안보상황의 변화를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동아, 중앙, 한국, 경향, 한겨레, 국민, 세계 등 주요 신문들은 하나같이 이 뉴스를 1면에 보도했다.
“완충 없는 한반도…적대만 남았다”(경향),
“합참 ‘적대행위 중지구역 더 이상 존재 않는다’”(국민),
“군, ‘9.19합의 남북 완충구역 더 이상 없다’”(동아),
“남북 육해공 완충구역 모두 사라졌다”(서울),
“남북 적대행위 중지구역 사라져/군 ‘사격·훈련 등 정상 실시’ 천명”(세계),
“9·19합의 사실상 종언…군 ‘유·해상 훈련 재개’”(중앙),
“합참 ‘완충구역은 없다’/남북 우발적 충돌 위험”(한겨레),
“남북 ‘육해공 완충구역’ 모두 사라졌다”(한국) 등이다.
거의 모든 신문이 '완충구역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핵심 이슈로 뽑았다. 이에 더해 경향과 한겨레는 '적대만 남았다'(경향), '우발적 충돌 위험'(한겨레)이라는 현실적 위기 가능성을 강조해 보도했다.
한겨레는 제목에 ‘남북 충돌 위험’을 강조하고 본문에서도 “4월 총선과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북한의 긴장 고조행위가 지속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고 보도했다. 또 “미국과 일본은 북한의 도발을 지적할 때 반드시 ‘대화의 문이 열려있다’고 평화관리 노력을 한다”는 관련 분야 학자와 “현 시기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각급에서 남북 간 대화가 복원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을 당부한 전 통일부 장관의 발언을 함께 실었다.
경향신문은 1면 톱 기사의 제목 “완충 없는 한반도…적대만 남았다”에서 현재의 남북 군사 긴장 고조에 대한 우려감을 드러냈다. 합참의 전날 발표문을 그대로 전하면서도 “사라진 ‘안전핀’ 때문에 국지적 충돌이 우려된다”는 점을 밝혔다. 다른 신문들도 1면에서 합참의 이번 9.19 합의파기 공식화 발표와 후속조치, 파장을 기사로 작성해 보도했다.
이 뉴스를 1면에 올리지 않은 ‘전국단위 종합일간지’가 있다. 조선일보와 문화일보다. 두 일간신문 모두 이 뉴스를 6면에 게재했다. 종이신문에서 6면은 1면에 비해 뉴스가치 면에서 떨어지는 기사나 1면 보도 이후 보완적 설명기사 등을 배치하는 지면이다. 뉴스가치 판단은 각 매체가 알아서 할 일이긴 하지만, 유독 조선·문화일보만 이 뉴스의 가치를 다른 종이신문들과는 달리 낮게 평가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극렬 ‘보수’, 극렬 ‘친윤’ 매체로 분류되는 이 두 신문에게 9.19 합의 공식 파기 발표와 이로 인한 군사충돌 위기 고조는 다른 매체들처럼 1면에 갈 만큼 중요한 뉴스가 아니었던 것일까?
조선일보 기사의 제목 “북 완충 수역 포격에…군 ‘우리도 훈련 재개’”를 보면, 이 신문에서 이번 합참의 9.19합의 파기 공식화와 이로 인한 군사 충돌 위기고조에 대한 우려감을 찾아보기 힘들다. 기사 본문의 대부분이 북한이 9.19 합의를 언제, 어떻게 위반하며 도발했는지와 그에 대해 우리 군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정리한 것이다. 평화가 흔들리는 작금의 상황에 대한 걱정보다는 그 책임이 북한에 있으니 남한은 강력 대응해야 한다는 논리뿐이다.
문화일보의 “군, 완충구역내 사격훈련 재개 지침 하달” 기사도 9.19 합의 무력화의 의미와 문제점을 따지는 일은 아예 접고, 국방부와 합참이 앞으로 어떤 군사훈련을 전개할 것인지를 나열해놓았다. \
조선일보와 문화일보 기사를 보면 윤석열 정부의 대북 정책방향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신원식 국방장관이 말한 대로 ‘북이 도발하면 무조건 강력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평화보다 전쟁, 안전보다는 불안이 그들이 추구하는 안보관이다. 두 신문은 이런 윤 정부의 안보관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들인 것이다.
그러니 두 신문에 전면전이 아닌 국지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군과 민간인의 돌이킬 수 없는 인명피해를 가져올 것이란 우려나, 북한과 대화의 문을 조금이라도 열어보자는 제안은 찾아볼 수 없다. 조선·문화일보에게 9.19합의 폐기와 군사훈련 재개는 걱정거리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일이거나 반색할 만한 소식이었을지 모른다.
이 두 신문은 본문에서 9.19합의 파기 후 남측이 벌일 여러 가지 군사훈련(합참과 육·해·공군, 해병대의 포병·함포사격과 기동훈련)을 전개하는 것을 두고 ‘정상화’라고 표현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전방지역에서의 방위태세 훈련을 6년 만에 재개해 정상화할 방침”이라고 썼다. 극렬 우익 매체, 친윤 신문에게 군사적 대치와 양측 군사훈련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는 ‘비정상’이요, 각종 군사훈련이 전개되고 충돌위기가 고조되는 것은 ‘정상’인 것이다.
조선일보 등 극우 언론들은 과거 한반도 위기가 한껏 고조되면 이를 대서특필해왔다. 남북 분단과 대치 상황을 보수세력 결집에 이용해 온 것이다. 예전 권위주의 정부에서는 대놓고 북한의 호전성을 언론을 통해 과장해 보여주거나 아예 ‘북풍’을 일으켜 선거에 도움을 받아왔다.
그렇다면 이번 9.19합의 완전 파기 발표로 인한 위기고조를 크게 쓸 법 한데 왜 대서특필하지 않았을까? 이번 발표가 남측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추정을 해본다. 그동안 북이 9.19 합의를 위반해 도발한 경우 극우·보수언론들은 이를 대문짝만하게 기사화해 보도했다. 그러나 이번 상황은 그 반대다. 남측이(윤석열 정부가) 남북간 합의를 최종적·공식적으로 폐기했다는 사실을 굳이 크게 보도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북측이 먼저 완충지역을 도발했고, 그래서 남측 윤석열 정부는 앞으로 이 지역 군사훈련을 재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도하면 될 일이다.
언론인들이 제정해 놓은 여러 보도준칙 가운데에는 ‘평화통일과 남북화해협력을 위한 보도제작 준칙’이라는 것이 있다. 기자협회·언론노조·PD연합회가 공동으로 1995년 처음 제정했고, 2017년에 개정한 바 있다. 이 준칙 전문에는 “지금까지 우리 언론은 남북관계 및 통일문제 보도·제작에서 화해와 신뢰 분위기 조성에 기여하기보다는 불신과 대결의식을 조장함으로써 반통일적 언론이라는 오명을 씻어내지 못했다”라는 문장이 있다. 보도실천요강의 ‘1. 남북긴장해소 노력’에서도 “남북간 긴장 및 불의의 사고 발생 시 신속하고 평화적인 해결을 이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춰 보도한다”고 되어있다.
언론인 스스로가 만든 보도준칙을 아무렇지도 않게 위반하면서 독자 시민들에게 신뢰나 책임·권한을 얘기할 수는 없다. 한반도 평화와 안보는 굳이 보도준칙을 거론하지 않아도 너무나 중요한 문제다. 우리나라 언론사 가운데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보다는 정권의 안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언론이 여럿 있으니, 독자들이 기사를 잘 가려서 읽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