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의 무지막지 '인간차별'…검찰정권에서는?

눈엣가시들 '불량배'로 몰아 삼청교육대로

올림픽 때 눈에 띌라 '부랑인' 싹쓸이 격리

윤 정부에선? '없는 사람'은 '없는 취급'

2023-12-22     이승호 에디터
목봉 체조를 하고 있는 삼청교육대 입소자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1일 눈에 띄는 언론 보도가 두 건 있었다. 한 건은 5공 시절 삼청교육대 사업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핵심 사업’으로 규정한 문서에 전두환이 직인을 찍었다는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는 보도다. 또다른 한 건은 법원이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기사다.

삼청교육대 사건과 형제복지원 사건은 전두환 군사정권과 관계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건 모두 ‘특정 국민’을 교화의 대상으로 규정, 폭력적 방법으로 수용소에 감금·처벌했다는 역사를 갖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북한이라는 ‘외부의 적’과 함께 ‘사회적 약자’를 ‘내부의 적’으로 만들었다. 독재를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전략이었다. 전두환은 정권 초기부터 ‘사회악 일소로 국가기강 확립’을 내세우며 ‘비정상적 사회인’ 색출에 나섰다. ‘사회정화’ ‘폭력배 근절’ ‘사회악 일소’ 등의 구호가 나라 곳곳에 울려 퍼졌다.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검거 4명 중 1명은 미성년자였다

1980년 7월 4일 국보위는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 불량배 일제 검거’를 발표했다. 발표문에는 ‘이들에 대해서는 일정기간 선도순화한 후 건전한 애국시민으로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하고 사회복귀 후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고 선량한 시민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법적 조치를 포함하여 최대한 지원’하며 ‘이번 조치를 지속적 범국민적인 사회운동으로 승화 발전시켜 사회정화를 정착화 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정권은 곧 ‘범국민적인 사회운동’에 나섰다. 전두환은 ‘삼청계획 5호’라는 걸 만들어 1980년 8월~1981년 1월 삼청교육대를 가동했다. 정권은 삼청교육대에 가둘 희생자들을 찾아 연인원 80만 명의 군경을 동원했다. 국가의 여러 부처와 일선의 행정조직까지 나서 희생자 찾기에 혈안이 됐다. 잡힌 사람들은 보병사단, 특전사 등 전국 25개의 부대에 설치된 삼청교육대로 실려 갔다.

검거된 사람 4명 중 1명은 학생, 청소년 등 미성년자였다. 경범죄나 단순비행을 저지른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언론인, 노동자도 있었다. 광주시민은 더 차별받았다. 인종주의적이며 파시즘적 폭력은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5·18이 광주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국지적 폭력이었다면 ‘정의사회 구현’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전면적 폭력이었다. 전두환을 계승한 노태우 정권의 ‘범죄와의 전쟁’은 ‘정의사회 구현’의 또다른 모습이었다.

 

박정희 시절 부산 북구 주례동에 있던 형제복지원의 초창기 모습.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올림픽 유치하려 전두환이 키운 형제복지원

전두환은 대외적으로 독재정권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올림픽이 필요했다. 올림픽은 국내의 국민적 반독재 정서를 잠재우는데도 유효한 재료였다. 전두환은 정권 초기부터 올림픽 유치를 위해 공을 들였다. 외국인들에게 ‘깨끗한 한국’을 보여주는 게 급선무였다. 1980년 11월 30일 전두환 정권은 IOC에 올림픽 유치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듬해 1월 6일에는 KOC가 올림픽 유치계획을 위한 실무반을 꾸렸다.

얼마 뒤 전두환 정권은 ‘정부는 88올림픽 등에 대비,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깨끗한 인상을 주고 국민들의 불쾌감을 없애기 위해 이제까지 단속에 치우쳐왔던 부랑인 문제를 복지차원에서 해결키로 하고 내년에 재활사업을 강력히 추진할 방침’임을 밝힌다.

정권은 곧 실행에 나섰다. 거리의 부랑인, 노숙자, 걸인 등을 ‘보호 대상’으로 규정했다. ‘보호 대상’은 약 1만 1500명으로 추정했다. ‘보호 대상’은 ‘보호 시설’에 가두기로 했다. 정권은 ‘보호 시설’을 신설하는 한편 형제복지원 같은 기존의 ‘보호시설’을 적극 활용하기로 결정한다.

폭력적인 ‘부랑인’ 소탕 작전이 시작됐다. 폭력은 ‘도시환경 저해요인 특별정비’라는 이름으로 서울, 부산 등 대도시에서 자행됐다. 거리의 노점상, 껌팔이, 야바위꾼, 걸인 등이 붙잡혀 갔다.

1986년 말 기준 전국에는 8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600여 개의 ‘사회복지시설’이 있었다. 이 가운데 공식 ‘부랑인’ 수용 시설은 36개였다. 또 이 중 21개는 형제복지원 같은 사설 ‘보호시설’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사설 보호시설들과의 ‘거래’에 적극 나섰다. 경찰과 공무원들은 부랑인 등 ‘보호 대상’을 잡아 ‘보호 시설’에 넘겼다. ‘보호 시설’은 대가로 국가 보조금을 받았다. 형제복지원은 그 한복판에 있었다. 보조금을 더 받기 위해 직접 거리로 나가 걸인, 노숙자, 장애인 등을 닥치는대로 ‘납치’했다.

형제복지원이 설립된 것은 1961년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 직후다. 1975년 ‘내무부훈령 410호’에 따라 사설수용(소)의 법적 근거를 국가로부터 부여받았다. 이때부터 형제복지원은 부산시와 ‘부랑인 수용보호 위탁계약’을 맺고 돈벌이에 나섰다. 형제복지원은 전두환 정권과 본격적인 돈거래를 하며 ‘전성기’를 맞는다.

 

프로축구 경기를 관전하는 전두환(왼쪽)과 이순자 씨. 대통령기록관

윤석열의 ‘없는 사람’ ‘배운 게 없는 사람’…‘인간 차별’ 아닌가?

군사정권 시절의 ‘인간 차별’은 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윤 대통령은 ‘어떤 사람들’은 부정식품을 먹고 장시간 노동해도 괜찮다는 차별적 인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군사정권의 독재자는 폭력을 동원해 노골적인 ‘인간 차별’을 했지만, 윤 대통령은 정책이나 제도를 통해 은근한 ‘인간 차별’을 하려는 것 같다.

윤 대통령은 2021년 7월 19일 매일경제 인터뷰에서 ‘없는 사람은 부정식품이라도 먹어야 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같은 인터뷰에서, 나중에 철회하기는 했지만, 주 52시간 근무제에 대해 비판하면서 주 120시간 근무를 주장하기도 했다. 아래는 당시의 발언 일부다.

“상부에서 뭐 이런 거 단속해라 저런 거 단속해라, 하는 (식품위생) 단속 지시가 막 대검 부서를 통해서 일선 청으로 막 내려오는데, 이제 프리드먼의 책을 이렇게 보면은 거기에 다 나와요, 이런 거는 단속하면은 안 된다, 왜냐하면 단속이란 것은 퀄리티 기준을 딱 잘라 줘 가지고 이것보다 떨어지는 것은 전부 형사적으로 단속하라는 건데, 프리드먼은 그 아래도 완전히 정말 먹으면은 사람이 병 걸리고 죽는 거면 몰라도, 부정식품이라 그러면은 없는 사람들은 그 아래 것도 선택할 수 있게, 더 싸게 먹을 수 있게 해 줘야 된다 이거야. 이거 먹는다고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가 하면 윤 대통령은 대선후보 때인 2021년 12월 22일 전북대 학생들을 만나 “극빈의 생활을 하고 배운 게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도 모를 뿐 아니라, 자유가 왜 개인에게 필요한지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도 했다. 저소득·저학력 계층을 차별하는 발언이었다.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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