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연속 금리 동결…1년 간 ‘물가’ 방치한 한국은행

올해 마지막 금통위서 금리 동결 결정

10월 물가상승률 3.8%… 미국과 역전

금리 인상 적기 놓친 부작용 속속 나타나

내년 물가 전망치도 0.2%포인트 상향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을 판"

2023-11-30     장박원 에디터

‘물가 안정’

한국은행 신축 통합 별관에는 이 문구를 새겨넣은 대형 현판이 걸려있다. 한국은행의 존재 이유가 물가 급등으로 통화가치가 훼손되는 것을 막는 데 있다는 의미다. 과연 한국은행은 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최소한 올해는 ‘물가 안정’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책무를 저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30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2023. 11. 30. [사진공동취재단] 연합뉴스

한국은행은 30일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서 현재 연 3.50%인 기준금리를 또 동결했다. 올해 2월 이후 7회 연속 금리를 묶어둔 것이다. 그 결과 통화가치는 형편없이 떨어졌다. 한국은행이 1년 내내 금리를 동결한 결과 물가가 치솟으며 국민 지갑이 얇아진 것이다.  

한국인의 대표 외식 메뉴인 짜장면 가격은 7000원을 돌파했다. 올해 9월까지 근로자 월급은 9만6000원 증가했으나 급등한 물가수준을 반영한 실질임금은 4만2000원 줄었다. 농산물과 가공식품, 전기료와 버스, 지하철 등 공공요금이 일제히 올라 국민이 체감하는 생활물가 상승률은 이보다 훨씬 높다.

 

   한국과 미국의 기준금리 격차. 연합뉴스

한국과 달리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지난해 6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9%를 넘어서자 기준금리를 공격적으로 높였다. 지난 9월 이후 두 달 연속 금리를 동결했으나 올해 들어 7월까지는 계속 올렸다. 지난해 3월부터 따지면 11차례 연속 금리를 인상했다. 현재 미국 기준금리는 5.25~5.5% 수준이다. 한국은행이 30일 올해 마지막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서 금리를 동결하며 한국과 미국의 금리 차이는 2%포인트를 유지하게 됐다.

미국 연준이 긴축의 고삐를 조인 반면 한국은행은 금리를 묶어둔 결과 ‘물가 안정’이라는 성과에서 큰 차이가 나고 있다.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미국보다 높아진 것이다. 지난달 10월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8%로 미국 물가상승률(3.2%)보다 높았다. 양국의 물가상승률이 역전한 것은 2017년 8월 이후 6년 2개월 만이다.

유럽연합(EU) 물가 상승률도 9월 4.9%에서 10월에는 3.6%로 떨어졌다. 유로존 20개국으로 범위를 좁히면 물가상승률이 2.9%로 더 낮다. 벨기에 등 일부 유럽 국가는 강력한 긴축 정책으로 물가가 작년보다 하락했다.

 

소비자물가 추이 (2023년 10월)

한국은행이 금리를 동결할 때마다 과도한 가계부채와 경기침체 우려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중앙은행의 최우선 과제가 통화가치 안정이라는 점에서 우선순위가 뒤바뀐 인식이다. 경기침체와 가계부채 문제는 한국은행보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안이다. 한국은행은 ‘물가 안정’에만 집중하면 된다. 만일 한국은행이 금리를 적정 시기에 올렸다면 지금보다 물가가 떨어졌을 것이고 가계부채도 덜 증가했을 것이다. 

금리 인상 시기를 놓치다 보니 한국 경제는 갈수록 스텝이 꼬이고 있다. 한국은행은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2.2%에서 2.1%로 낮춰 잡고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는 2.4%에서 2.6%로 0.2%포인트 높였다. 외국계 투자은행(IB)도 최근 비슷한 전망치를 내놓았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JP모건 등 8개 주요 외국계 투자은행의 10월 말 기준 보고서에서 내년 한국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가 평균 2.4%로 집계됐다. 한 달 전 발표된 전망치인 평균 2.2%보다 0.2%포인트 상향된 것이다.

1년 가까이 지속된 금리 동결 탓에 여전히 높은 물가를 의식한 듯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금리 인상 가능성을 거듭 언급했다. 그는 30일 금융통화위원회 회의가 끝난 뒤 기자회견에서 “저(이 총재 자신)를 뺀 6명의 금융통화위원 중에 4명이 3.75%로 인상 가능성을 열어두자는 의견”이라고 밝혔다. 통화정책 방향 회의 의결문에서도 “물가가 당초 전망보다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물가상승률이 목표 수준(2%)으로 수렴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통화 긴축 기조를 충분히 장기간 지속할 것”이라고 했다.

이 총재는 지난 8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업무보고에서도 “앞으로도 당분간 높은 물가 오름세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므로 기준금리의 인상 기조를 이어 나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7번 연속 금리를 동결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30일 금리 동결 발표 직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이 1월 0.25%포인트 올린 것을 마지막으로 끝났다는 분석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이 총재를 ‘양치기 소년’ 취급하며 그의 금리 인상 가능성 언급을 ‘할리우드 액션’ 정도로 본 셈이다.

 

 한국은행 신축 통합 별관에 걸려있는 '물가 안정' 현판. 

문제는 미국 등 주요국이 긴축 기조를 멈추고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내릴 때 한국은행이 곤란한 처치에 놓일 수 있다는 점이다. 물가가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나라를 따라 금리를 내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창용 총재가 물가상승률이 목표 수준인 2%로 수렴하는 시기가 많이 늦어질 가능성을 언급한 대목에서 이런 고민을 엿볼 수 있다. 금리를 제때 올렸다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고차 방정식이 된 것이다. 여러 전문가가 한국은행이 연속으로 금리를 동결할 때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던 이유다.

한국은행이 통화가치 안정에 손을 놓고 있자 정부가 물가 관리에 나서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행과 정부의 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려 물가를 잡는 것이 정도이고 가장 빠른 길인데 정부가 인위적으로 물가를 잡으려다 보니 곳곳에서 잡음이 생긴다. 정부가 기업이 판매하는 개별 제품 가격 결정에 개입하고 은행 금리에 관여하는 후진국형 ‘관치’가 횡행하고 있다. 정부의 물가 관리에는 한계가 있다. 인플레이션은 통화가치가 떨어지는 현상인 만큼 통화 당국인 한국은행이 풀어야 한다. 정부의 물가관리는 보조 수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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