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한 룰라를 보면서 '평화의 축구공'이 떠오른 까닭
돌아온 서민대통령이 소환한 추억, 가져올 변화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다 실바가 돌아왔다. 지난 30일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서 날아온 낭보다. 77세의 나이에 룰라가 대통령 선거 3선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까마득히 잊혔던 두 가지 기억을 소환했다. 축구공과 맞담배다.
브라질 국가대표팀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축구의 최강팀. 십여년 전 룰라 대통령의 흔쾌한 동의 하에 남북 국가대표 단일팀과 브라질 국가대표팀과의 친선경기가 추진된 적이 있었다. 작금의 한반도 안팎의 정세를 감안하면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한때 양국 정부 차원에서 울력으로 도모했던 이벤트였다.
2005년 5월25일 한국을 국빈방문 청와대에서 이뤄진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측이 제안한 아이디어를 그가 수락함으로써 합의됐던 것.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을 불어넣는데 축구공만큼 효율적인 것은 없었을 터이다. 룰라 처럼 남과 북에서 모두 인기 있는 외국지도자도 드문데다가 축구라면 브라질 아닌가. 남북 단일팀이 브라질 국대팀과 자웅을 겨루는 장면은 생각만해도 유쾌한 그림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불발됐지만, 두 대통령이 남과북, 브라질이 함께 공을 차자는 아이디어에 선뜻 뜻을 같이 했다는 사실 자체가 신선했다.
룰라는 2004년 브라질 브라질리아 대통령궁에서 처음 열렸던 노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 자리에서 느닷없이 시거를 빼어물어 좌중을 당혹케 한 적도 있다. 자칫 외교적 결례로 번질 수 있었던 상황에서 역시 애연가였던 노 대통령이 "한 대 달라"고 청해 정상 간 맞담배로 화기애애한 자리가 됐다는 일화(이백만 전 청와대 홍보수석)도 생각난다. 공식 프로토콜과 의식으로 구성되는 정상회담에서 파격이 벌어진 것은 두 지도자가 모두 서민 출신이어서 가능했을 법하다.
룰라의 재기는 코로나19의 대유행 탓에 2018년 이후 열리지 않고 있는 세계사회포럼(WSF)추억도 소환시킨다. 룰라는 대통령 재임시절은 물론 퇴임 후에도 WSF에 참석해 스위스 다보스의 세계경제포럼(WEF)의 대안 아젠다를 강조했던 예외적인 지도자였다. 룰라의 복귀로 세계는 오랜만에 국제적인 영향력을 장착한 지도자를 다시 보유하게 됐다.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갈등 등 악재가 쌓이는 국제사회에 중재자 역할을 할 자원이기 때문이다. 북한 핵문제와 남북, 북·미 갈등의 개선과 무관하게 현단계에서 남북한을 교차방문할 가장 마춤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물론 룰라의 지지자들이 마음껏 축배를 들기엔 아직 께끄름한 상황이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이 선거결과 발표 이틀이 지난 1일 2분 동안 짧게 연설하면서 지지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결과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자제를 당부했다. "결과에 승복한다"는 말도 룰라에게 "당선을 축하한다"는 말도 없었다. 비서실장이 뒤이어 "대통령은 정부이양을 시작하도록 지시했다"고 말했을 뿐이다. 1.8% 차 패배에 승복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없는 태도다.
보우소나루의 오만한 태도에서 드러났듯이 룰라를 감옥에 보냈던 브라질 기득권층이 룰라가 가져올 변화에 순순히 따를 가능성은 희박하다. 룰라가 지난 10여년 간 걸어온 퇴임-투옥-석방-대선 출마-당선의 지난한 여로가 그랬듯이 앞길 역시 순탄치 않을 것을 예고한다. 그러나 브라질 민주주의는 ‘기로(edge)’에서 벗어날 기회를 헛되이 날려버리지 않을 것이다. 또 누가 아는가. 룰라가 한반도에 '평화의 축구공'을 선사할지. 실현 여부를 떠나 그럴 역량을 갖춘 지도자의 부활은 미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반도에도 분명 상서로운 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