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평화 정상회의…"출구 못 찾으면 모두 지옥 볼 것"
유일 해법은 서구의 '팔레스타인 독립국' 약속 이행
통행로 개방·가자 위기·난민 수용·휴전 협상 논의
교전 중인 이스라엘-하마스, 뒷배인 미국-이란 불참
이집트·요르단 공동 성명, 팔' 난민 강제 이주 반대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21일 '평화 정상회의'(peace summit)가 열렸다.
이번 평화 정상회의는 지난 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민간인 집단 살해와 납치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전면 봉쇄한 채 15일째 무차별 폭격을 가하면서 270만 명의 주민이 사지로 내몰린 상황에서 대책 마련을 위해 긴급 소집됐다.
이집트의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이 호스트를 맡았다. 지리적으로 이집트가 가자지구와 이스라엘 양측 모두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악화일로의 상황을 방관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당장 물과 식량, 의약품 등 구호품 전달을 위한 이집트 라파 국경 통행로 재개방, 팔레스타인 난민 수용 여부, 그리고 이스라엘의 지상 침공 가능성과 하마스와의 휴전 및 인질 석방 협상 등의 이슈 모두에서 이집트가 어떤 스탠스를 취하느냐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로 답을 찾기 힘든 사안들인 만큼, 인근 아랍 국가를 포함해 가급적 많은 정상을 초청해 머리를 맞대고자 판단했음 직하다. 특히 지난 17일 최소 500명의 목숨을 앗아간 가자지구 알아흘리 아랍 병원 폭격 참사가 이스라엘의 소행이라고 확신하는 반이스라엘, 반미 시위가 아랍·중동 전역으로 급속히 번지는 상황도 긴급 소집의 배경이 됐다고 볼 수 있다.
교전 중인 이스라엘-하마스, 뒷배인 미국-이란 불참
이날 정상회의에는 아랍·중동에서는 물론,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주요국 정상이나 고위 관리들이 참석했다. 20일 로이터와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 등 외신에 따르면,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셰이크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 카타르 군주, 하마드 빈 이사 알-할리파 바레인 국왕, 샬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쿠웨이트 왕세자,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등 아랍·중동과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이 참석한다.
유럽에선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레제프 타이이프 에도르안 튀르키예 대통령,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가 참가하고, 전날 이스라엘을 방문한 리시 수낵 영국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도 함께 할 가능성이 있다. 이와 함께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샤를 미셸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 고위대표가 참가한다.
중국에서는 자이쥔 중동특사를 파견했고,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아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무장관과 카트린 콜로나 프랑스 외무장관이 각각 참석하기로 했으며 키프로스, 아랍에미리트(UAE), 일본 등도 대표단을 파견한다.
문제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당사자 중 하나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마무드 아바스 수반은 정상회의에 참석하지만, 핵심 플레이어인 이스라엘과 하마스, 각각 그 '뒷배'를 자처하는 미국과 이란이 불참한다는 점이다. 정상회의 결과에 회의적 전망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게다가 이번 가자 분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와 확전 방지를 위한 최선의 방안을 무엇인지를 놓고 서구와 아랍 사이의 간극이 크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이집트와 요르단 등 아랍 국가 중심으로 팔레스타인 평화와 관련한 선언문 채택을 바라고 있지만 서구가 반대할 공산이 크다.
유일한 해법은 서구의 '팔레스타인 독립국' 약속 이행
20일 미국 정치전문 매체인 폴리티코에 따르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수낵 영국 총리 등 서구 정상들은 아랍 지도자들에게 이스라엘 지지와 하마스 소탕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국제법상 자위권을 지니고 있다면서 현 위기를 주로 테러리스트 문제로 본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20일 백악관에서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만났다. 미셸 상임의장은 "우리는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을 규탄한다.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가 있으며, 이는 국제 인권법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고 했고, 폰 데어 라이엔 위원장은 "우리는 이스라엘과 함께 테러의 반대편에 서 있다. 동시에 팔레스타인 역시 하마스에 고통받고 있으며, 가자 지구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민간시설 폭격 등 이스라엘의 반인륜적 전쟁범죄는 문제 삼지 않았다.
이에 반해 아랍 지도자들은 현실적인 유일한 해결책은 서구가 이스라엘 옆에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건설한다는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와 관련해 엘시시 대통령은 카이로 정상회의에서 "팔레스타인 문제의 미래"를 반드시 논의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는 이스라엘의 보복을 "자위의 범위를 넘어서고 가자 인들에 대한 집단적 처벌에 해당한다"고 비난했다. 앞서 엘시시 대통령은 이집트의 우선순위는 폭력을 중단하고 가자지구에 갇힌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인도주의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상회의 긴급 소집에 앞서 엘시시 대통령은 19일 카이로를 찾은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과 만나 가자 전쟁의 즉각적인 중단과 민간인 보호, 가자지구 봉쇄 해제 및 인도적 구호 물품의 반입을 촉구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팔레스타인 주민의 요르단이나 이집트로의 강제 이주에는 분명한 반대한다는 내용도 공동 성명에 못 박았다. 두 정상은 당초 아바스 수반과 함께 18일 요르단 암만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만날 예정이었으나 가자지구 병원 폭발 참사와 관련해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차원에서 바이든과의 만남을 전격 취소하기도 했다.
이집트와 요르단은 이스라엘 점령지인 가자와 요르단강 서안에 각각 접해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 패하면서 이집트는 가자지구를, 요르단은 서안지구를, 시리아는 골란고원을 빼앗겼으며 그리곤 66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곳들엔 정착촌이 밀려들었다.
이집트·요르단 공동 성명, 팔' 난민 강제 이주 반대
팔레스타인 주민의 강제 이주에 반대하는 이집트와 요르단의 심경은 복잡하다. 뭣보다 문제는 차제에 팔레스타인 주민을 접경한 두 나라로 쫓아내 영원히 팔레스타인인의 국가 건설 열망을 끊겠다는 이스라엘의 '집요한 계획'에 부응할 위험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군은 '대피'한 가자 주민이 하마스 소탕 후 제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하지만 그간의 행태로 보면 전혀 신뢰할 수 없다는 게 엘시시의 생각이다. 그 대신에 엘시시는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이 끝날 때까지 가자지구 주민을 이스라엘의 네게브 사막에 머무르게 하자고 역 제안했다.
엘시시 대통령은 18일 이번 전쟁은 하마스와의 싸움만을 겨냥한 게 아니며 "민간인 거주자들을 압박해 이집트로 이주시키려는 시도"라며 이는 지역의 평화를 파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압둘라 2세 국왕도 "요르단에는 난민이 없을 것이며 이집트에도 난민이 없을 것"이라고 가세했다. 요르단에는 과거에 난민으로 들어온 팔레스타인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
난민 수용 문제도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대규모 난민이 유입된다면 두 나라 모두 재정 형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이와 관련해 미 외교전문지인 포린 폴리시는 20일 "금융 전문가들은 점점 더 걱정스럽게 이집트의 부채 문제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집트의 올 여름 국내총생산 대비 부채비율은 전년 대비 16.8% 증가한 97%에 도달한 상태다.
난민에 섞여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원들이 이집트의 시나이반도로 넘어오면 그곳이 또 다른 이스라엘과의 전쟁터로 바뀔 우려도 적지 않다. 그 경우 40여 년간 지속된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 평화조약도 위험에 처하게 되면서 역내의 혼란을 부채질할 공산이 크다.
사태의 관건을 쥔 이스라엘과 하마스, 그 뒤의 미국과 이란이 모두 빠진 카이로 정상회의에서 무슨 결과물이 도출될지는 봐야겠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점에서 가자 전쟁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하면서 국제사회의 공론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도 의미가 있으며, 이런 시도가 특히 미국과 이스라엘에 압박으로 작용할 여지도 있다.
레바논의 아크라프 리피 전 법무장관은 폴리티코에 "미국은 중재하지 않고 말로서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비판하고 이날 카이로 정상회의에 대해 "우리는 모두를 위한 출구를 찾기를 희망한다. 그러지 못하면 우리 모두는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