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유동성 '쌍둥이 원인'…이번 인플레 오래간다
'중국=저가품 화수분' 옛말, 미 천문학적 화폐발행
러-우크라 전쟁에다 기후위기 따른 곡물생산 감소
세계 설탕공급 1위 인도는 10월부터 수출금지 전망
스마트폰과 콘텐츠 가격도 하루 멀다고 치솟아
바야흐로 인플레이션의 전성시대다. 설탕부터 스마트폰, 콘텐츠까지 오르지 않는 것을 찾기 어렵다. 마트에 나가보면 모든 상품의 가격이 앙등 중이다. 여기에 최근에는 미국에서조차 논란이 되고 있는 팁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상륙하는 모양새다. 맹위를 떨치는 인플레이션이 언제쯤 수그러들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지금의 인플레이션이 공급과 유동성 양 측면에서 비롯된 것이라 장기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인도 등의 수출 중단으로 더 폭등할 우려가 커진 설탕값과 쌀값
세계 설탕 생산 1위 국가인 인도가 오는 10월부터 자국에서 생산되는 설탕의 수출을 금지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로이터 통신이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 매체는 익명의 인도 정부 소식통 세 명을 인용해 가뭄으로 사탕수수 수확량이 줄어 당국이 수출 금지 조치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인도 정부가 설탕 수출 금지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데는 가뭄에 따른 사탕수수 작황 부진이 배경이 됐다. 인도 전체 사탕수수 생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서부 마하라슈트라 주(州)와 서남부 카르나타카 주에서는 올해 장마 기간 강수량이 평년보다 최고 50% 적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현지 설탕 가격은 최근 2년 사이 가장 높은 수준으로 급등했고, 인도의 7월 식료품 물가 상승률은 11.5%를 기록하며 소비자 물가 상승을 견인했다. 인도 정부는 8월 설탕 판매량을 20만t 늘리는 등 물가 잡기에 여념이 없다.
한편 인도가 설탕 수출을 중단하면 국제 설탕 가격이 수년래 최고치로 치솟아 식료품 가격 상승세를 더욱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고 로이터는 내다봤다. 설탕은 수 많은 식품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터라 설탕 가격의 폭등은 슈거플레이션이라고 불릴만큼 위력적이다.
인도는 설탕 수출만 중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쌀 수출도 제한하고 있다. 인도는 최근 자국 내 곡물 가격이 요동치자 자국 쌀 수출 물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비(非) 바스마티 백미의 수출을 금지해 국제 쌀가격 상승을 초래했다. 뿐만 아니라 이달 19일에는 주요 식재료인 양파에 무려 40%의 수출세를 부과하기도 했다. 인도는 쌀과 양파의 세계 최대 수출국이다.
설상가상으로 인도의 쌀 수출 제한 조치로 국제 쌀 가격이 오르는 가운데 세계 쌀 수출 5위의 쌀 생산대국인 미얀마도 일시적으로 쌀 수출을 중단할 예정이다. 25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얀마는 국내 쌀 가격 상승을 막기 위해 이달 말부터 45일간 쌀 수출을 제한하기로 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다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는 기후위기에 따른 식량생산량 감소에 더해 인도의 설탕 및 쌀 수출 제한과 미얀마의 쌀 수출 중단까지 곡물가격을 상승시킬 악재만이 널려 있는 형국이다.
폰플레이션과 콘텐트플레이션의 습격?
스마트폰과 각종 콘텐츠 가격도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이르면 내달 출시되는 애플 아이폰15 시리즈 고급형 모델(프로·프로맥스) 가격이 최대 200달러 인상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 프로맥스 최대 용량(1TB)을 구매하면 300만원에 육박할 가능성이 있다.
24일 해외 IT매체 디지타임스 등에 따르면 아이폰15 프로 모델은 1099~1199달러(147만~160만원), 프로맥스 모델은 1199~1299달러(160만~174만원)에 출시될 것으로 보인다. 전작과 비교해 모델별로 100달러에서 최대 200달러 오르는 것이다.
만약 아이폰15 출고가가 실제 인상되면 한국에서 프로맥스 1TB는 280만원대에 근접하게 되는데, 이는 웬만한 TV,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살 수 있는 수준이다.
스마트폰 시장을 선도하는 애플이 가격을 인상하는데 삼성전자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애플과 경쟁하는 삼성전자 역시 Z플립5·폴드5 가격을 5만~10만원 올렸다. 애플과 삼성전자 등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을 선도하는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스마트폰 가격을 올리니 소비자들은 죽을 맛이다. 스마트폰은 필수품이 된 지 오래라서 스마트폰 가격 상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드물다. 스마트폰과 인플레이션을 합성한 폰플레이션의 시대가 도래했다.
일상을 영위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스트리밍 서비스 등 각종 콘텐츠 가격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상승 중이다. 스트림플레이션(streamflation)란 신조어도 나올 정도로 넷플릭스 등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 Over The Top)는 최근 1년간 30% 가까이 가격이 치솟았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OTT업계는 올해 10월 전방위적인 구독료 인상을 계획 중이다. 18일 OTT업계에 따르면 넷플릭스는 9.99달러에서 14.49달러로, 디즈니플러스는 7.99달러에서 13.99달러로, 파라마운트플러스는 9.99달러에서 11.99달러로, HBO맥스는 14.99달러에서 15.99달러로 구독료 인상을 예고했다. 한편 광고 시청에 따른 끊김 없이 유튜브를 볼 수 있는 유튜브 프리미엄 가격도 11.99달러에서 13.99달러로 인상이 예정됐다. 글로벌 업체가 미국 내 요금 인상을 예고한만큼 한국에서의 OTT 요금 인상은 정해진 수순이다.
OTT업계뿐만 아니라 도서, 영화 등의 콘텐트 산업 전반에도 가격 인상의 쓰나미가 밀어닥쳤다. 이제 1만 5000원 이하의 책은 찾기 어려우며, 극장에서 영화를 보려 해도 일반관 기준 1만 5000원은 기본이다. 공연업계도 티켓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리고 있다. 콘텐츠와 인플레이션을 합성한 콘텐츠플레이션이 소비자들의 주머니를 가볍게 만들고 있다.
팁 문화까지 소비자들을 괴롭혀
인플레이션의 파도에 휩쓸려 정신이 혼미한 소비자들에게 미국에서나 볼 법한 팁(tip·봉사료)을 요구하는 곳이 속속 등장하면서 소비자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트리고 있다.
택시 호출 플랫폼 카카오T에서 팁을 줄 수 있는 기능을 시범 도입한 데 이어 몇몇 카페와 유명 베이글집에서도 팁을 요구하는 기능을 마련한 것인데, 소비자들은 마땅히 고용주가 부담해야 할 임금의 일부를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라며 반발한다.
미국에선 팁플레이션(심지어 판매가의 20%를 팁으로 요구)이라는 말이 유행일 정도로 팁 문화의 폐해가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정작 미국에서 배워야 할 건 배우지 않고 배우지 말아야 할 걸 배우는 듯 해 심란하다.
이번 인플레이션은 장기 지속될 가능성 높아
설탕, 쌀, 스마트폰, 콘텐츠 등 오르지 않는 걸 찾기가 힘들다. 마트에 가기가 겁날 지경이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인플레이션이 단기간에 해소될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는 사실이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인플레이션은 공급과 유동성 양 측면에서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해소가 결코 쉽지 않다. 역사에 유동성의 대홍수 시대로 기록될 지난 20여년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았던 건 2000년대 초 세계시장에 본격적으로 결합한 중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면서 저가의 상품을 거의 무제한으로 글로벌 시장에 공급한 덕택이었다.
그걸 간과한 미 정부와 연준(FED)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0%대 기준금리와 양적완화(QE)를 통해 천문학적 유동성을 시장에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자 인플레이션이 등장할 일이 없다고 확신한 채 코로나 팬데믹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를 아득히 웃도는 규모의 유동성을 시장에 공급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당시의 중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의 중국이 아니었다. 중국은 미국과의 패권경쟁에 더해 생산비용 폭증,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산업구조 재편 등의 원인으로 더 이상 글로벌 시장에 저가의 상품을 무제한으로 공급하는 생산공장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상태였다. 즉 돈이 아무리 많이 풀려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천문학적 규모의 상품 공급을 할 수 있는 공급 사이드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긴 것이다.
공급사이드에 치명적 문제가 생긴 줄도 모르고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들은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통해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유동성을 시장에 풀었다. 혹자는 연준이 코로나 팬데믹 발발 단 2달 만에 300년 동안 늘었어야 할 화폐량을 발행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화수분처럼 글로벌 시장에 저가의 상품을 공급하던 중국이 과거 같지 않고 시장에 풀린 유동성의 규모는 상상력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서는 것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고, 그 현실이 바로 인플레이션을 초대했다. 공급 사이드가 확연히 개선되거나 유동성이 대거 회수되지 않는 한 인플레이션의 퇴치는 요원할 것이다. 상당 기간 인플레이션을 디폴트값으로 상정하고 투자행위와 소비행위를 하는 게 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