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도 한국도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

프랑스 빈민가 청소년 소요사태와 한국의 현실

'법과 질서' 회복하자는 슬라보이 지제크의 오판

구조적 차별과 공권력의 폭력이 낳은 분노 분출

한국의 우익 포퓰리즘 정부도 낙인·편견 부추겨

2023-07-24     전지윤 편집위원
전지윤 사회운동가·'연속성과 교차성' 저자 

이제는 소강상태에 접어든 프랑스 빈민가 청소년들의 소요(‘폭동’)는 오늘날 프랑스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 줬다. 마크롱 대통령과 프랑스의 주류 정치인들은 이것이 ‘폭력적인 게임’과 ‘자극적인 SNS’, ‘무책임한 부모들’ 때문에 벌어졌다는 식으로 책임을 떠넘겼다. 하지만 물론 진실은 다른 곳에 있었다.

먼저 프랑스에서 소수인종이나 이민자들은 가장 가난하고 일자리도 없는 2등 시민으로 밀려나 도심 변두리(방리유)에서 살아가고 있다. 또 프랑스의 주류 우익 정치인들은 이들에 대한 낙인과 편견, 인종 차별을 앞장서 선동해 왔다. 지난 대선에서 유력 대선 후보 4명 중 2명이 극우 인종주의적 네오 파시스트였다(마린 르펜과 에릭 제무르). 신나치들이 검은 옷과 복면을 하고 거리 행진을 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더구나 마크롱 정부가 ‘노란조끼 시위’와 연금 개악 반대 시위 등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적 대응을 적극 보장하며 프랑스는 군사화된 경찰국가로 발전해 왔다. 이 3가지 요소의 결합은 ‘소수인종은 곧 범죄자’라는 인종적 편견에 가득 찬 폭력적 경찰이 검문에 불응한 10대 알제리계 이민자인 나엘을 총으로 쏴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헬은 단지 면허증이 없다는 이유로 죽었다. 그것이 낳은 분노의 폭발에 대응하며 프랑스 경찰노조는 ‘우리는 해충과 미개인들을 처리하고 있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 상황은 미국에서 흑인들이 경찰의 총격으로 죽어가던 상황과 비슷하다. 미국에서도 이러한 경찰 폭력은 몇 년 전 방화와 소요사태를 낳았다. 당시 흑인 여성 작가인 킴벌리 존스는 이렇게 지적했다.

“사람들이 ‘왜 자신의 동네를 불태우느냐’고 물으면 이것은 우리의 동네가 아니라고 답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에게 문제가 생기면 당국이 와서 상황을 해결한다는 사회적 계약이 있지만, 상황을 ‘해결’하는 사람이 우리를 죽이고 있다. 그래서 사회계약은 깨졌다! 경찰이 길거리에서 우리를 죽일 때 계약은 깨졌다.”

따라서 최근 <한겨레>에 실린 세계적인 좌파 철학자인 슬라보이 지제크(슬라보예 지젝)가 프랑스 소요사태에 대해서 쓴 글 ☞ [세계의 창] 좌파도 ‘법과 질서’를 구호로 삼을 수 있어야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주요 대목을 인용하자면 이런 주장이다.

“프랑스 시위대는 저소득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시내버스를 공격했는데, 이는 평범한 이들의 일상을 지탱하는 시설을 파괴하는 행위이자, 가난한 이들에 대한 공격일 뿐이다. … 법과 질서를 빨리 회복하지 않으면 진보적 결과를 가져오는 대신 극우 지도자 마린 르펜을 다음 대통령으로 당선시킬 수 있다. … 이런 추세 속에서 좌파는 용기를 내어 법과 질서라는 슬로건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먼저, 이번에 프랑스 빈민가 청소년들의 소요사태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공격’이었다는 것은 사태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앞서 살폈듯이 이것은 거꾸로 ‘가난한 이들의 저항’이었다. 참가자는 대부분 프랑스 변두리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실업과 빈곤에 시달리던 이민자와 다인종 청소년들이었다.

 

프랑스 제2도시 마르세유에서 1일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자 시위 청년들이 대피하고 있다.  2023.7.1. AFP 연합뉴스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이 다인종 유색인 청소년들은 신분 확인을 위해 경찰에 제지당할 가능성이 백인보다 무려 20배나 더 높았다. 프랑스 경찰은 이들에 대한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폭력적으로 대우했다. 이러한 구조적 차별과 경찰 폭력이 낳은 분노가 나헬의 죽음을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

물론 자생적인 소요나 ‘폭동’은 계획과 지도에 따라서 질서 있게 벌어지는 시위가 아니다. 그래서 이번에 고급상점과 화려한 식당만이 아니라 작은 가게와 자동차들도 파괴되고 불탔다. 그 과정에서 변두리에 사는 마찬가지로 가난한 이들도 피해를 입었다. 이는 분명 비판받아야 하고 고쳐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피억압자의 저항에서도 어느 정도 나타날 수 있는 모순적 현상이기도 하다.

간호 노동자들이 파업하면 노동자들이 병원 이용에 불편을 겪고, 장애인들이 지하철에서 투쟁하면 노동자들이 출퇴근이 어려운 피해를 겪는다. 따라서 ‘노동자와 장애인들의 저항은 가난한 이에 대한 공격’인가? 그것은 자기들만의 고급주택가(아크로비스타)에 살면서, 힘없고 소외된 가난한 이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탓하게 만들려는 윤석열 정부 같은 권력자들의 전형적인 이간질 시도이다.

그러므로 ‘법과 질서를 빨리 회복해야 한다’는 지제크의 주장도 타당하지 않다. 구체적 현실에서 지제크의 주장은 마크롱 정부가 무자비한 경찰 폭력과 법적 처벌을 통해서 빈민가 청소년들을 짓밟는 것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마크롱 정부는 소요사태에 참가한 청소년들에게 징역 1~2년과 수만 유로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하는 가혹한 대응으로 ‘폭동’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빈민가 다인종 청소년들과 차별받는 이민자들의 불만과 분노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법과 질서’를 숭배하는 우익 권력자들과 지지자들의 자신감만 높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즉, 이것이야말로 지제크가 걱정하는 ‘극우 지도자 마린 르펜을 다음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가장 빠른 길이다.

실제로 마크롱 정부의 강경 대응 속에서 르펜의 지지율은 더욱 치솟고 있다. ‘법과 질서를 지키며 이민자들의 폭동을 더 강력한 방식으로 해결할 사람’은 중도우파인 마크롱보다 극우 신나치인 르펜이라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제크는 문제를 악화시킬 방법을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제시하는 셈이다.

물론, 진보좌파는 무조건 법과 질서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검찰 특활비 같은 문제에서 우리는 불법을 넘어서 무법천지에 가까운 실체가 드러난 ‘윤석열 정치검찰’을 폭로하고 비판해야 마땅하다. 나헬을 죽인 프랑스 경찰의 대응도 불법 범죄로 처벌받아야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법과 질서’는 권력자들과 우익의 무기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는 더 많은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대부분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있거나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최근에 타이 헌법재판소는 총선에서 압도적 지지로 총리 후보에까지 오른 피타 림짜른랏 전진당 대표의 의원 자격을 정지시켜 버렸다. 그가 부모에게 물려받아 불법적으로 방송사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 방송사는 이미 16년 전부터 방송을 중단한 상태였다. 징병제 폐지와 군주제 개혁 등 진보적 정책을 제시하고 시민들의 큰 지지를 얻은 전진당이 타이 권력자들의 기득권을 위협하고 있는 게 진정한 이유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지금 검찰이 야당과 건설노조 등에 대해 가하는 압수수색, 수사, 기소들도 단지 ‘법과 질서’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우파 정부와 권력자들의 구호였던 ‘법과 질서’를 좌파가 가져오자는 지제크의 주장은, 특히 그가 프랑스 소요사태의 구체적 맥락에서 그런 주장을 한 것은 난센스이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게 아니라 이번에 프랑스 거리에서 다인종 이민자 청소년들이 외친 구호가 더 적절하다.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

 

프랑스 전국일주 사이클 대회 '투르 드 프랑스' 첫날인 지난 1일 거리의 관람객들이 경찰 총격에 숨진 10대 청소년 나엘을 추모하며 ''나엘을 위한 정의를'라고 쓰인 펼침막을 내걸고 있다. 2023.7.1. AFP 연합뉴스 

물론, 무고한 피해를 낳지 않기 위해서뿐 아니라 구조적 차별과 경찰 폭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고립되기 쉽고 분산적인 방화나 약탈이 아니라 중앙 정치권력에 맞서서 구조적 대책을 요구하는 조직적인 저항이 건설될 필요가 있다. 이번 소요사태의 쓰라린 경험이 프랑스 시민들과 진보진영이 그런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을 기대한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한국 상황도 비슷한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는 노조, 장애인, 여성, 중국인, 진보좌파를 겨냥해 낙인을 찍고 편견을 부추기며 차별을 선동하는 우익 포퓰리즘 정부이다. 한국 경찰은 총은 사용하지 않지만 갈수록 거침없이 압수수색과 폭력적 탄압을 향해 나가고 있다. 그런 ‘건폭몰이’는 양회동 건설노동자의 죽음을 낳았다.

더구나, 이 나라에서도 정부와 경찰이 시민의 권리와 안전을 지켜준다는 약속과 계약은 이미 깨졌다. 윤석열 정부는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를 앞장서 돕고 있고, 이태원 참사만이 아니라 이번 수해 피해와 오송 참사 속에서도 어떤 책임 있는 자세도 보여 주지 않았다. 따라서 윤석열 정부에 맞선 우리의 연대와 투쟁은 더욱 강력해져야 하고, 프랑스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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