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정치’ 넘어 ‘기억의 정치’로

항일독립운동 현장에서 본 두 가지 정치 지평

2023-07-11     박충구 칼럼
    생명과 평화윤리 연구자

우리가 한여름에 일본을 찾게 된 것은 일본 내 항일독립운동의 자취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오사카에서 출발하여 교토, 그리고 가나자와를 거쳐 도쿄에 이르는 긴 여정은 ‘시민모임 독립’(이사장 이만열, 대표 박덕진)에서 마련했다. 이 여정에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 관장, 그리고 문학평론가로서 윤동주 연구가인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 그리고 <더탐사> 시민학교 교장 김영 교수 외 대한민국, 호주, 미국 등지에서 온 33명의 시민이 동행했다.

흔히 해외여행은 새로운 풍광이나 역사적 유물을 찾아보고 음식을 즐기는 것이 일반이지만, 이번 여행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찾은 곳은 외진 산속 묘역이거나 조선인 노동자가 노역했던 채석장, 이봉창 의사가 의거를 한 장소, 체포되어 구금되었던 형무소 자리, 그리고 윤봉길 의사가 총살형을 받은 후 암매장 되었던 자리, 그리고 6천여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간토 살육의 현장 등이었다. 많은 이들에게는 오래 전 망각된 곳, 색 바랜 추모비나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 외진 곳이었다.

배운 자들의 매국으로 고통의 짐을 지게 된 조선 유민

이 여정에서 줄곧 나의 가슴을 짓누른 단어는 ‘매국’ ‘친일’ 두 단어였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유민이 된 민족의 고난은 오묘한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능한 정치가와 사대주의에 물든 매국노들 때문이었다는 생각에서다. 19세기 말, 세계정세에 눈이 어두운 정치가들과 탐관오리들은 나라 망하는 줄도 모르고 허세를 떨다가 친일 매국노들에게 정치적 주도권을 빼앗기고, 매국노들이 나라를 일제에 넘긴 부끄러운 역사를 남겼다. 이들의 무능과 매국 행위는 조선 민중들을 나라 잃은 유민으로 전락시켰고, 끝없는 압제와 착취, 그리고 차별을 겪는 처지로 내몰았다.

반면, 무능한 정치가와 친일 매국 세력은 민중의 억압자이자 수탈자인 일제로부터 수혜를 입어 호의호식과 권세를 누렸다. 매국 세력 중앙부에는 당대의 정치가, 법조인, 그리고 종교인이 주를 이루었다. 그들은 소위 많이 배운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조선 민중의 자존, 그리고 피와 땀을 내주고 일제의 귀족 지위까지 얻어 부귀영화를 누렸다. 일제에 강제 병탄된 이후 조선의 젊은이들은 일본의 저임금 노동자가 되어 채석장으로, 탄광지로, 군수공장으로, 전쟁터로 끌려갔고, 가난한 여인들은 종군 위안부로 강제 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해방 직전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의 수가 근 200만에 달했다 한다.

일본사회에서 하층민으로 살아가던 조선 유민들은 여기저기서 한인촌을 형성했다. 그 중에서 유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산 곳이 오사카와 도쿄 외곽이었다. 자신들을 지켜줄 나라가 없는 이들은 일본사회에서 다양한 억압과 차별을 받았다. 그 차별의 현장에서 모아진 애국의 의지는 여기저기서 국권 회복을 향한 항일운동으로 자연스럽게 표출되었다. 1919년 3월 1일 기미 독립선언에 앞선 ‘2.8 독립만세운동’이 그 한 예다. 당시 일본에 거류하고 있던 이들 대부분이 노동자였으므로 일본 내에서의 항일운동은 노동운동과 민족운동이 자연스럽게 결합해 주된 흐름을 이루었다.

 

윤봉길 의사를 암장했던 곳. 표지석과 함께 '장부출가생불환' 휘호를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박충구

차별받던 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신

조선인들은 차별 경험을 통해 저임금 문제나 인종 간 갈등의 근원이 바로 나라를 잃은 식민지인 처지에서 비롯됨을 깨닫고 있었다. 한때 진정한 일본인이 되기를 소원했던 이봉창이 일왕 폭살을 의도한 이유도 식민지인으로 겪은 비인간적인 차별 경험 때문이었다. 그는 1932년 1월 동경에서 일왕을 폭살시키려다가 실패한 후 일제에 의해 교수형을 당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 3개월 후 윤봉길은 약관 24세인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일제의 전승기념일 행사장 연단에 폭탄을 투척하여 상하이 거류민단장과 사라카와 요시노리 일본 육군대장을 죽이고 다수의 일본군 장성들을 다리나 눈을 잃은 불구로 만들었다.

윤봉길 의사는 의거 직후 체포되어 5월 25일 사형을 선고받고 오사카 위수형무소로 이송, 수감되었다가 그 해 11월 18일 당시 일본군 9사단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었던 가나자와성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약 60Km 떨어진 형장에서 십자가 형태의 형틀에 묶인 채 일본군 사수가 쏜 한 발의 총탄을 미간에 맞고 숨을 거두었다. 일본인들은 그의 주검을 노다산 일본군 육군묘지 도로에 암장하여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니게 했다. 그의 죽음의 행로를 따라 걷던 내가 그가 암장되었던 바로 그 자리에 섰을 때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분과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매국노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의 수괴들과 어울려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을 때, 스물넷의 청년 윤봉길은 이곳에 이름도 없이 암장되었던 것이다. 그를 기리는 추모비 옆에는 그가 처자식 곁을 떠나며 남긴 글귀가 적혀 있었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갔다면 그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 이봉창, 윤봉길 의사를 비롯하여 항일운동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이들의 눈에는 해방된 조국과 자유를 쟁취한 민족이 어른거렸을 것이다.

 

간토 대학살이 벌어진 장소. 지진으로 인한 불길을 피해 강변으로 온 조선인들을 일본인 자경단들이 무참히 학살해 암매장했다. 박충구

일본인 니시자키 마사오 씨는 당시 일본 언론이 이 사건을 축소하여 다룬 기사들을 스크랩한 것을 들고 그 참극의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박충구

올해는 동경대지진 조선인 집단학살 100주년

비통한 마음은 간토대학살 현장에 세워진 위령비 앞에서 더욱 깊어졌다. 1923년 9월 1일 간토 시즈오카 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인해 수십만 가구가 매몰되거나 불에 탔다. 수십만이 재난을 겪고 근 1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대혼란 속에서, 일부 악독한 일본인들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고, 방화를 했다”라는 유언비어를 유포했다. 이에 선동되어 광기에 사로잡힌 일본인들은 자경단(自警團)이라는 학살 조직을 결성하고 조선인들을 낫과 도끼 등으로 무차별 살해했다. 일본 자경단원들은 지진으로 인한 불길을 피해 강변으로 피신해온 조선인들을 구제하기는커녕 무차별 집단 학살했던 것이다.

아비규환이었을 그 살육의 현장과 조선인 시체를 암매장했던 아라카와 강변을 내가 찾았을 때, 그 곳은 살육의 현장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했다. 그날 참변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을 1000여 개 가지고 있다는 일본인 니시자키 마사오 씨는 당시 일본 언론이 이 사건을 축소하여 다룬 기사들을 스크랩한 것을 들고 그 참극의 현장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당시 무려 6000여 명의 조선인이 학살되었으나 일본 당국은 이 집단살인 사건을 숨기고 덮어버렸다며 분개했다. 대한민국 정부조차 이 비극적 학살 사건에 대하여 지난 100년 동안 침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진작가 천승환이 찾아갔던 지바현 후나바시시에 서 있는 ‘간토대지진 희생 동포 위령비‘ 이면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한다. “희생된 동포의 원한은 천 년이 가도 남을 것이다.”

생명과 평화를 위한 ’기억의 정치‘

비록 항일독립운동사의 현장 일부만을 찾아보았지만, 이 과정에서 나는 명료하게 두 가지 상반되는 정치의 지평을 보았다. 무능한 정치와 매국 세력이 요구하는 망각의 정치, 그리고 억압과 수탈과 차별 속에서 죽임을 당한 약자의 피맺힌 고통을 소환하는 기억의 정치다. 피억압자의 기억을 제거하고 해체하려드는 정치는 정의롭지 못한 망각의 정치로 나타난다. 하지만 기억의 정치는 그 망각의 정치가 감추고 있는 악과 불의를 들추어내고 생명과 평화의 지평을 여는 정치다. 보복하고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억압자와 피억업자의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1919년 일본 유학생들은 ’2.8 독립선언문‘에서 국권 회복이 우리 민족 생존의 권리임을 선언하고 조국의 독립을 거부하는 일본을 향하여 혈전을 선포하는 등의 현실적 과제와, 민주 선진국으로 도약하여 세계평화와 인류문화에 공헌할 미래의 민족적 과제를 제시하였다.

1945년 해방된 이후, 친일세력은 친미세력과 손을 잡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장악하고 망각의 정치를 강요해 왔다. 망각의 정치는 일본군 종군위안부, 강제징용이나 노역도 침묵과 망각으로 밀어 넣고, 간토 대지진 당시 살해당한 6천여 조선인의 한도 100년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해방 직후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전쟁을 치른 것으로도 모자라, 70년이 지나도록 서로 총을 겨누고 원수처럼 다투는 우리의 실상은 과연 무엇일까? 또 다시 친일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생각하니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진 선열들 앞에서 죄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우리는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과 같은 의사들이 목숨을 버리며 꿈꾸었던 바 세계평화와 인류문화에 공헌하는 그런 조국의 독립을 과연 쟁취하였는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년인 2023년,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망각의 정치가 아니라 기억의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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