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화하는 기시다-김정은 '회담'…윤석열 설 자리는 어디?
기시다 "북한과 새 시대 연다…고위급 협의 직접 관할"
김영철, 통전부 고문 복귀…북‧일 정상회담 대비용?
식민지배 배상, 2002년 북‧일 '평양선언' 원용될 듯
미-중, 북‧일 해빙무드에도 윤, '격멸 훈련' 직접 주관
평양을 향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기시다 총리는 21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열린 정기국회 폐회 기자회견에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조기에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뜻을 다시 밝혔다.
지난달 27일 일본인 납북자의 귀국 촉구 국민 대집회에서 처음으로 운을 뗀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발언은 지난번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구체적이었다.
기시다는 회견에서 먼저 북한의 잇따른 탄도미사일 발사와 관련해 "빈도와 내용 모두 현격히 심각해지고 있다"고 우려를 표시하면서도 북한과의 대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북한과 일본 간 현안을 해결해 양측이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다는 관점에서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의 결의를 김 위원장에게 계속 전달하고 정상회담을 조기에 실현하기 위해 총리 직할의 고위급 협의를 하는 노력을 하겠다"고 말했다.
기시다 "북한과 새 시대 열 것…고위급 협의 직접 관할"
일본인 납북자 문제에 대해선 "납북자 가족들 대부분이 고령화되고 있어 문제 해결은 점점 더 긴급한 인권 문제가 됐다"며 "문제 해결을 위해 과단성 있게 대처하겠다"고 덧붙였다.
그의 발언 내용을 보면, 이미 물밑에선 북‧일 간 접촉이 꽤 진척돼 있음을 암시한다. 제일 눈길을 끄는 것은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다는 관점에서"라는 대목이다.
가깝게는 당면한 납치자 문제 해결 등을 위한 북‧일 정상회담 개최를 말하는 것이고, 길게는 일제 식민지배 배상과 적대관계 청산을 통한 국교 정상화까지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읽힌다.
해결해야 할 '북한과 일본 간 현안'은 크게 보면 세 가지다. 일본의 입장에서 가장 시급한 현안은 당연히 납북자 문제다. 기시다의 발언에서 보듯 납북자 가족 대부분은 고령화가 심각해 신속한 대처가 필요한 사안이다.
일본 정부는 1970∼1980년대 일본인 17명이 북한에 납치됐고, 그중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방북 후 일시 귀환 형태로 귀국한 5명을 제외한 12명이 북한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북한은 문제의 12명 중 8명은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4명은 아예 북한에 온 적이 없다고 맞서고 있다. 지금은 해결해야 할 납치 문제 자체가 없다는 게 북한의 입장이다.
다음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다. 이 문제는 일본이 단독으로 북한과 '담판'을 지을 수 있는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미국의 후견 아래 이 문제에 직접 관여함으로써 종국에는 북한과 미국을 '연결'시키는 중재자 역할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한반도 문제에서 주도권을 쥘 공산이 크다. 극단적 남북 대결 정책으로 일관함으로써 대북 소통 채널이 전면 차단된 한국의 윤석열 정부는 '오리알 신세'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이 한반도의 판도를 뒤흔들 지정학적 현안들을 놓고 북한과 협상할 때 필요하다면 윤 정부와 협의는 하겠지만 윤 정부는 '종속 변수'로 전락할 우려가 적지 않다.
식민지배 배상, 2002년 북‧일 '평양선언' 원용될듯
셋째는 일제의 식민 지배 배상과 전후 보상 문제다. 이것은 장기간의 미국과 유엔의 대북 제재로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한으로선 가장 절실할 현안이다.
북한과 일본은 과거에 이 문제의 처리 방식에 합의한 바 있다. 고이즈미 총리가 방북했던 2002년 9월 북‧일은 상호 재산청구권 포기와 경제협력 방식의 과거 청산을 담은 평양선언을 채택했다.
김정은-기시다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20년 전 평양선언을 기초로 삼아 협상한다면 해법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일본이 북한에 제공할 무상자금과 장기저리 차관의 액수와 관련해 북한이 요구한 금액과 일본이 제시한 금액에 차이가 있는 것이 쟁점이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고이즈미 총리에게 최소 100억 달러를 요구했다는 일본 언론의 보도도 있었다. 한국의 경우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을 통해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인정과 사죄도 없이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를 제공하는 선에서 문제를 봉합했다.
김영철, 통전부 고문 복귀…북‧일 정상회담 대비용?
기시다 총리의 어조에선 북‧일 정상회담에 대한 강한 의욕이 묻어났다.
그는 △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 △ 나의 결의를 김 위원장에게 계속 전달하겠다 △ 정상회담을 조기에 실현하겠다 등의 강조법을 쓰고 북한과의 고위급 협의체를 총리 직할로 두겠다는 뜻도 밝혔다.
일각에선 기시다가 최근 일본판 주민등록증인 '마이넘버 카드' 문제와 장남의 총리 공저(公邸·공관) 송년회 논란 등으로 지지율이 급락한 데 대한 하나의 돌파구로 납북자 문제와 북‧일 정상회담을 활용하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이날 회견에 대한 북한의 반응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긍정적 움직임이 감지된다.
지난 19일 북한 노동당 제8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김영철 전 노동당 대남비서가 통일전선부 고문 직책으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복귀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김정은 위원장의 최측근으로서 2018~2019년 북미정상회담과 남북정상회담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잊힌 존재가 됐다.
일각에선 이번에 통전부 고문으로 복귀한 것을 두고 북‧일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일본과의 고위급 협의에 대비한 인사가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앞서 북한은 기시다의 제안 이틀 만인 지난달 29일 박상길 외무성 부상의 담화를 통해 일본인 납북자 문제 등과 관련한 '일본의 변화'를 요구했지만,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화답했다. 그리고 같은 날 북한은 군사 정찰위성 발사 계획을 윤 정부는 빼고 국제해사기구(IMO)와 일본에 사전 통보를 해줬다.
미-중, 북‧일 '해빙 기류'…윤, '격멸훈련' 직접 주관
이처럼 북한과 일본이 대화모드로 급선회 중인 와중에도 윤 정부는 대북 압박에 몰두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6.15 남북공동선언 23주년인 지난 15일 경기도 포천의 승진훈련장에서 진행된 '2023 연합·합동 화력격멸훈련'이다.
이는 한미 연합전력과 육해공 합동전력이 최신 무기를 동원해 적 도발 시 응징·격멸 능력을 과시하는 일종의 화력 시범이다.
2017년 이후 6년 만에 국가급으로 열린 이 훈련은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주관했고 여당인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와 이종섭 국방장관도 참석했다.
이날 한국군의 F-35A 전투기와 K9 자주포를 비롯해 미군 측의 F-16 전투기와 그레이 이글 무인기 등 첨단 전력 610여 대와 71개 부대 2천500여 명의 한미 장병이 참가해 역대 최대 규모로 실시됐다고 연합뉴스는 전했다.
북한은 화력격멸훈련 당일인 15일 국방성 대변인의 '경고'를 내고 "우리 무력은 적들의 그 어떤 형태의 시위성 행동과 도발에도 철저히 대응할 것"이라고 반발하고 오후 7시 30분 동해 상으로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의 중국 방문과 대만 독립 반대 입장 표명을 계기로 미‧중 간 '해빙 기류'가 완연하다.
그리고 이날 기시다 총리가 중국과의 건설적이고 안정적인 관계 구축, 경제 등 국익 관점에서 러시아와의 협력 방침을 밝히는 등 중‧일, 일‧러 관계도 화해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윤 정부만 '6‧25 전쟁 마케팅'을 하면서 반북, 반중, 반러 기조를 고수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