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는 범죄가 아니다
1. 인간의 죽음은 다양하다. 노화로 인한 자연사가 주조를 이루지만, 뜻하지 않은 사고사가 있고, 스스로 죽음을 앞당기는 자살도 있다. 또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 생명을 빼앗기는 타살도 있다. 사회적 참사는 개인의 오류가 아니라 사회적 안전망의 미비나 붕괴로 일어난 인간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예기치 못한 개인의 죽음은 제삼자에겐 단순한 비극적 사건일 수 있지만, 사랑하는 가족에게는 도저히 수납이 어려운 비현실적인 현실로서, 너무나 원통하고도 슬픈 사건이다. 그리고 죽임을 당한 이에게는 졸지에 무서운 폭력을 겪어 실존의 종말을 맞은 비극이다.
10.29 참사 이후, 다양한 언론 보도에서 의도적이든 아니든, 참사 피해자에 대한 정보가 누락되어 있었기에 어느 언론사라 할지라도 “누가” 그리고 “어떻게” 죽음이나 부상을 입었는지에 대하여 사회에 알리는 것은 죄가 될 수 없다. 참사 피해자는 이미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해 사망에 이르거나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참사의 순간과 더불어 사회적 관심의 대상,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귀한 생명이 죽임을 당한 대참사를 목도하면서 우리는 인간이므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이의 고통과 절망을 간접 경험하고, 예기치 않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들의 고통과 슬픔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이 경험과 슬픔에 대한 공감의 정도는 바로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가 지닌 집합적인 인간다움과 연대의 수준을 드러내는 척도다. 자식의 죽음을 겪은 이들의 분노와 원통함에 대한 공감 역시 우리가 인간으로서 누리려는 안전과 평화의 감정에 상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에 관심하면 할수록 우리는 자연스레 이 비극의 구조적 원인과 책임을 묻게 된다. 그것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라 뜻하지 않게 죽임을 당한 이와 그 가족을 홀로 슬픔 속에 버려두지 않고 연대를 나누려는 사회 구성원의 당연한 책무다. 이런 관심과 연대 행위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며 억압하려드는 모든 행위는 비인도적인 것이며, 오히려 그런 행위야말로 비열하게 정치적인 것이다.
2. 민주 사회에서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안전을 지켜줄 책무를 지니고 있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급여를 받는 모든 공직자는 대통령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과 권위를 가지고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특히 정치, 사회, 군사 및 경제적 영역에서는 그 영역의 전문가들이 우리 사회의 각종 지표와 데이터를 종합하여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강구함으로써 국민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보장하고 극대화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을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은 정치한 현실 분석에 근거한 정확한 예측이어야 한다. 이 예측에 따라 강한 실천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합법적인 국가 폭력, 즉 경찰과 군대라는 수단까지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는 것은 국가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인 정권이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예측을 정확히 하고 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안전망 시스템을 가동하는 데에서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10월 29일 13만이 넘는 인파가 이태원에 몰릴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서도, 안전 대책이 전무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악할 일이다. 사회 안전망 확보에 대하여 직접적 책임이 있는 서울시, 행안부, 경찰청, 용산 구청이 왜 예전처럼 예측과 그에 따른 안전 대책 확보에 실패했는지 그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고 반드시 엄중한 책임이 물어져야 한다. 이 책임을 물어야 할 최고 책임자는 대통령이다. 만일 이 일을 대통령이 수행하지 못한다면,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헌법적 책무를 해태하거나 망각하고 있다는 비판과 불신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3. 참사 이후 밝혀야 할 책임의 소재가 이리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상황은 언론과 검경이 애써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고 있다는 의혹을 가지게 한다. 상황 분석과 사회 안전망 설치 실패에 대한 지휘 책임을 묻기보다 참사 현장에서 최선을 다한 실무자급에게만 책임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수 언론은 고위 당국자의 무책임, 기만적 행태에는 침묵하면서, 10.29 참사에 대하여 책임을 묻는 이들을 음모를 꾸미는 자들로 간주하고 희생자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고발성 기사로 연일 대서특필 하고 있다. 그 이면에서 여당 정치권과 보수 언론은 희생자의 명단과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함구하고 있었다. 현 정권에 대하여 비판적인 인사를 향해서는 누군가 사소한 혐의만 던져도 시시콜콜 모든 혐의가 마치 확정된 사실인 양 폭로하며 여론 재판을 주도하는 행태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반면, 외신에서는 피해자의 이름과 사진, 그의 삶과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가족의 고통스러운 슬픔에 대한 기사들이 이어졌다.
시민언론 민들레가 희생자의 명단을 확보하여 세상에 알리자 이번에는 여당 인사를 비롯하여 정부 고위 인사들, 그리고 여러 시민단체에서 민들레를 향한 비난을 몰매 때리듯 쏟아냈다. 이어 검찰에서는 희생자 명단을 세상에 알린 민들레의 보도를 범죄로 간주하고 수사를 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도대체 희생자의 명단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어떻게 범죄행위인가? 지금 우리 사회가 악명 높았던 나치 정권과 유사한 파쇼 사회이며 전체주의 체제란 말인가? 희생자의 이름을 밝히고, 그들의 삶을 추모하는 것은 사회적 대참사로 인해 희생된 이들을 향한 애도의 일환이다. 애도도 권력의 허락을 받아서 해야 하는 세상인가?
4. 나치 정권이 유대인과 동성애자, 중증 장애인, 그리고 집시를 반사회적 존재로 규정하고 비인간화하며 인종청소를 하던 그 시대에 어느 기자도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하여 그들의 이름을 알리거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사로 쓰지 못했다. 오히려 당시 독일 주요 언론은 인종차별적 증오를 부추기는 히틀러 편에 서서 유대인을 탐욕스런 돼지나 범죄 집단으로 몰아가는 선동의 도구가 되었다. 그 결과, 1938년 11월 9일 밤, 일명 크리스탈나흐트(Kristalnacht)에 독일인들은 유대인의 상점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부수고, 그들의 회당에 불을 질렀으며, 길거리에서 유대인들을 집단 구타했다. 그 광기에 사로잡혀 야만의 밤에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며 주먹을 휘두른 이들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당시 독일 인구의 과반이 넘는 이들이 개신교도였고, 나머지는 가톨릭교도였다. 이들의 범죄는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고, 이때부터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이들의 죽음은 신문에 실려지지 않았다.
권력에 의하여 숨겨진 죽음, 그 수는 600만이 넘었다. 나치는 죽임을 당한 이들의 명단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누군가 그것을 드러낼 경우 범죄로 간주했다. 1945년 나치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야 비로소 희생자들의 이름이 세상에 호명되고, 그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 홀로코스트 뮤지엄이 세워졌고, 곳곳마다 희생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엘리 위젤은 “인간의 구원은 기억의 능력에서 온다”고 했다. 문명사회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억울한 희생자의 이름과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기억하는 행위를 정치적 목적을 가진 행위라 매도하거나 범죄로 여기지 않는다.
오래전,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홀로코스트 뮤지엄을 찾아 갔을 때, 나는 인간의 흉악함에 몸서리치면서 동시에 인간의 고귀함을 마음 깊이 느꼈다. 그 때, 내가 그곳에서 보았던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신발 더미들의 침묵은 나에게 깊은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 그와 유사하게 이태원 희생자들의 신발을 모아놓은 현장 사진을 보면서 같은 질의 공포를 느꼈다. 그 신발의 주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아무런 상관없이 산 자 중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검찰은 참사 희생자의 명단을 공개했다고 시민언론사를 수사하겠다고 한다. 희생자의 이름을 드러내고 그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억하는 것은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염원이 담긴 애도 행위다. 애도는 억울한 죽음을 겪은 이들을 향한 산 자들의 의무이므로 결코 범죄가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