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의도에 말린 윤석열 정부 '근시안 대북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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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잇단 실언이 가뜩이나 어려운 남북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올해 1월 11일 국방부·외교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느닷없이 “대한민국이 자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 우리 과학기술로 더 이른 시일 내에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3월 28일 국무회의에서는 “통일부는 앞으로 북한 퍼주기는 중단하고 북한이 핵개발을 추진하는 상황에서는 단돈 1원도 줄 수 없다는 점을 확실히 하라”고 주문했다. 4월 5일 국정과제점검회의에서는 “통일부도 우리 국민이 거기(북한의 간첩 행위·필자 주)에 넘어가지 않도록 대응심리전 같은 걸 잘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지시했다.
이러한 윤 대통령의 발언은 국제법에 위배되거나 정부 정책에도 상치되는 것이다. 자체 핵무장론은 5개 핵무기보유국 외에 핵무기 보유를 금지한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위배된다. 대북 인도적 지원 중단은 작년 8.15 대통령 경축사에서 ‘한반도 정치적 상황과 관계없이 대북 인도적 지원을 일관되게 추진한다’고 밝힌 ‘담대한 구상’과 배치되는 것이다. ‘우리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심리전’을 의미하는 대응심리전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이명박 정부 때 국가정보원과 군 사이버사령부가 여론 개입을 위해 벌인 ‘댓글 공작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윤석열 정부의 원칙 없는 대북정책은 북한의 굴복을 끌어내지 못한 채 남북관계에 부정적인 영향만 미치고 있다. 북한의 각종 미사일 시험발사가 계속되는 가운데, 4월 7일부터 지금까지 동서해 군통신선과 남북공동사무소 채널 모두가 불통 상태다. 남북 간 통신이 이틀 넘게 중단된 것은 2021년 10월 4일 이후 처음이다. 그뿐만 아니라 북한당국은 금강산 남측 시설물의 철거에 이어 개성공단의 일부 공장을 무단 가동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남측과 경제협력을 하지 않겠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는 냉전형 북·중·러 북방삼각만 촉진
북한은 지난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8차례를 비롯해 모두 73차례 미사일을 쐈고 올해도 ICBM 3차례를 포함해 총 9차례 미사일 시험발사를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제대로 된 대책도 제시하지 못한 채 대북 강경 발언만 남발하고 있다. 굳이 대책이라고 내놓은 것이라곤 한·미, 한·미·일 외교·국방 공조를 통해 북한을 압박해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겠다는 정도밖에 없다. 윤석열 정부 들어 연합군사훈련이 강화되고 북핵 수석대표 회의가 활성화된 것도 이런 배경 아래 이뤄진 것이다.
작년 6월, 9월, 12월(화상)에 이어 금년 4월에 개최된 한·미·일 북핵 수석대표 회의에선 이례적으로 첫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북한 해외잔류 노동자 송환, △사이버 자금 탈취 차단, △북한 인권상황 개선 등이다. 이 자리에서 미·일 수석대표는 한국의 ‘담대한 구상’을 지지한다고 밝혔는데, 이들이 과연 윤 대통령의 우왕좌왕하는 대북정책을 제대로 이해한 건지 아니면 자국 이익에 부합해서 그런 건지 의문이 간다.
한·미·일 공조에 의존하는 대북 압박만으론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빈번한 한·미, 한·미·일 군사훈련과 외교 공조는 북한 위협에 대해 뭔가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국내용일 뿐, 윤석열 정부의 막연한 기대와 달리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낼 수 없다. 오히려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방해하고 한반도 문제에 대한 일본의 발언권만 높여주었다. 또한 미·러 대립 격화와 미·중 전략경쟁과 맞물리면서 북·중·러를 밀착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북한은 2020년 2월 북·미 정상회담 간의 ‘하노이 노딜’ 이후 북·중·러 북방 삼각 형성을 위해 공을 들여왔다. 노동당 국제부는 홍콩 유혈 진압을 지지하고 외무성은 신장·위구르 문제에서 중국을 옹호했으며, 유엔총회의 러시아침공 규탄결의안에 반대한 데 이어 우크라이나에서 분리독립을 선언한 도네츠크·루한스크 공화국을 정식 승인하였다. 또한 리영길 국방상은 중국군 창건일에 축전을 보내 전략‧전술적 협동작전을 제안했고, 김정은 위원장도 푸틴 대통령에게 “전략적, 전술적 협력, 지원 및 연대”의 강화를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등 중국, 러시아와의 안보협력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1월 김정은 위원장은 당 중앙위 7기 4차 전원회의(2018.4)가 결의한 핵실험 및 ICBM 시험발사 유예(모라토리엄)를 해제한다고 밝혔다. 그 뒤 북한이 유엔안보리 결의를 위반해 ICBM을 쏘아대도 중국과 러시아의 거부권에 막혀 더 이상 유엔안보리 추가 제재 결의는 물론 의장성명조차 채택되지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서방 7개국(G7)이나 한·미·일 회담에서 성명이 나올 뿐이지만, 북한엔 ‘쇠귀에 경 읽기’이다. 되려 중국과 러시아는 유엔안보리에 대북 제재 완화 결의안을 제출했을 뿐 아니라, 지난 3월 중‧러 정상 공동성명에서 ‘모든 독자 제재의 전면해제’를 촉구해 북한에 힘을 실어주었다.
신냉전과 다극화 구도에서 경제활로를 찾는 북한
그렇다면 유엔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어떻게 생존과 활로를 모색하고 있나?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 등 서방과의 협력으로 경제도약을 이루기 위해 단계적인 한반도 비핵화라는 협상카드를 갖고 미국과 담판을 시도했다. 하지만 ‘하노이 노딜’로 이러한 구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기존의 자력갱생 정책으로 되돌아갔다. 북한은 경제 규모가 작고 오랫동안 자력갱생 체제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외국과의 적은 자본·기술 협력만 있어도 체제를 유지하는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코로나19 때문에 잠정 폐쇄했던 북·중, 북·러 국경을 차례로 개방해 국경무역을 재개했다. 이를 통해 유엔안보리가 금지하지 않은 물품들의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최근에는 라오스, 캄보디아 등 사회주의·권위주의 국가들과 경제교류를 재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유엔안보리 결의 2397호가 금지하는 정제유·석유제품 수입과 석탄 수출은 결의를 위반해 선박 간 환적을 하고 있다. 공해상에서 북한선박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자 최근엔 북한 영해에서 불법 환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유엔안보리 제재로 합법적인 외화 획득이 어렵게 되자 해외에 잔류하고 있는 북한 근로자의 임금과 사이버 수단을 통한 화폐 탈취로 눈을 돌렸다. 유엔안보리 결의 2395호에 따라 2019년 말까지 해외 북한 근로자들이 전원 귀국하게 돼 있었지만, 코로나로 인한 국경봉쇄로 일부만 귀국하고 나머지는 잔류하며 지금도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또한 유엔 전문가패널에 따르면, 북한은 해킹을 통해 거액의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2015~2019년 사이 사이버 수단을 통해 20억 달러의 탈취 시도가 있었으며, 2022년 한 해에만 2조 1783억원(약 16억 5050만 달러)의 암호화폐를 탈취해 외화를 얻고 있다.
중기적으로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의용군을 파견하거나 우크라이나에서 분리 독립한 도네츠크·루한스크 공화국의 재건사업에 참여하는 식으로 외화를 벌어들일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8월 도네츠크 공화국 수장 푸쉴린은 돈바스 재건사업에 북한노동자 파견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주북 러시아대사 마체고라도 러시아의 원자재·비료·곡물과 북한 노동 인력의 협력 가능성을 언급했다. 또한 올해 3월에는 러시아 인터넷매체가 북한군 1만~1만5천 명이 의용군 자격으로 전투지역에 투입될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해외 북한 근로자의 송환을 언급한 유엔안보리 결의 2397호 8항은 “회원국은 자국 관할권 안에서 소득을 얻는 모든 북한 주민(all DPRK nationals earning income in that Member State’s jurisdiction) 및 감독주재관 전원을 본 결의 채택 24개월 내 북한으로 송환할 것을 결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기에 △비회원국(도네츠크,루한스크) 내 북한 근로자, △회원국 내 비임금 주민(북한군인)의 경우는 금지대상이 아니다. 즉, 유엔 비회원국인 도네츠크나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에 북한 근로자를 파견하거나 회원국인 러시아에 의용군은 물론 비소득 주민인 공병부대원의 파견은 불법이 아니라는 뜻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북한은 미·러, 미·중 대립이 격화되어 진영 구도가 정착되면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경제연합(EAEU)과의 협력으로 활로를 찾을 것으로 보인다. EAEU는 러시아를 비롯해 벨라루스· 아르메니아·카자흐스탄·키르키스스탄 등 옛 소연방국가들로 구성되며 세계 최대의 면적에 세계 4위의 경제 규모를 갖고 있다. 현재와 같이 서방 진영과 중·러 진영의 디커플링(탈동조화) 및 대립 구도가 심화되면, EAEU가 유엔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를 무시하고 북한과 경제교류를 재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직도 윤석열 정부 안에는 북한이 벼랑끝 전술을 쓰고 있다고 보고 여기서 밀리지 않으면 북한이 굴복할 것으로 기대하는 참모들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벼량끝 전술은 상대에게 뭔가 얻으려고 할 때 쓰는 것이다. 지금 북한이 한국이나 미국에 어떤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있어 ‘하노이 노딜’ 이전과 같은 벼랑끝 전술을 쓸 필요도, 가능성도 없다. 윤석열 정부가 김정은의 의도에 말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라도 깨닫지 못한다면 현재 같은 안보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남북대화 여건을 마련하려는 진지한 노력 없이 당면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미·일 안보협력에만 매달린다면 위기의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정부는 이제라도 근시안적 접근에서 벗어나 대북정책을 근본 전환하길 바란다.